94화
주문은 토마토입니까?
“나랑 같이 있어줄 건가?”
뭐지? 이건 꼭…….
베카의 저 말은 어린 시절의 지호를 떠올리게 했다.
말벌에 쏘였던 날, 병원에서 깨어난 지호가 느닷없이 나에게 결혼하자고 했던 그 순간을.
물론 지금과는 전혀 다른 맥락이었지만, 그때의 기분을 다시금 느끼게 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베카는 자신이 커버리면 내가 떠나지는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본인을 마탑의 괴물이라 부르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베카는 내가 자신의 귀여운 겉모습만을 좋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자신의 외모가 변해버리면 내 마음도 전과 같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걸지도…….
사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베카의 치명적인 귀여움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베카를 아끼는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니야.
물론 어른이 된 베카의 모습은 아직 상상이 잘되지 않지만, 16000살인 영계가 병아리 상태인 걸 보면 아직 머나먼 이야기이지 않을까?
내가 죽기 전에 베카가 성인이 되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미지수지.
난 고작 겉모습이 변한다고 해서 가까운 누군가의 마음이 변할 것을 걱정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그것만으로도 베카가 이제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것만 같아서.
나만큼은 변하지 않겠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당연하지! 베카가 어떤 모습인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아. 내가 좋아하는 건 베카, 그 자체이니까.”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하자 베카는 조금 놀라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
내게 되묻는 베카의 입가에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가 떠올라 있었으니까.
“두 번 말하면 입 아프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약속할게. 네가 어른이 되더라도 곁에 있어주겠다고. 대신 너도 내가 할머니 됐다고 안 놀아주면 안 된다?”
베카가 어른의 모습을 할 때면, 아마 나는 할머니가 되어 있겠지.
같이 있으면 베카가 내 손자인 줄 알겠네.
약속의 의미로 먼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베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손가락을 걸었다.
“그럼 걱정할 것 없겠군.”
혼잣말처럼 뭔가를 속삭인 베카가 한결 여유로워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참고로 약속을 무를 수는 없다.”
그러고는 베카는 내게서 확답을 듣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럼!”
베카가 불안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덥석 답을 내어놓긴 했지만 어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든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꼭 내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것만 같아.
띠링!
곰곰이 고민하던 그때 익숙한 나무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4번 오더가 들어왔습니다. (……자세히 보기)]
이 시간에 오더라고?
창밖을 바라보니 벌써 까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평소 같으면 다들 탕에 들어가 있거나 잘 시간인데?
뭐, 나로서는 오더가 하나라도 더 들어오면 좋지만!
“베카, 나 잠시만. 오더가 들어와서.”
나는 내게 손가락을 건 채로 얌전하게 앉아 있는 베카에게 양해를 구하고 손을 빼냈다.
손을 거둬들이자 베카의 표정이 생선을 빼앗긴 고양이처럼 시무룩하게 변했다.
평소 같으면 저 표정에 넘어갔겠지만 오더가 들어온 이상 지금은 미룰 수가 없었다.
빨리 오더를 수행해서 자금을 모아야 박시우와 지호가 당장 헌터를 그만두게끔 할 수도 있고, 하루 빨리 스탯을 올려서 실종된 부모님을 찾아 나설 수도 있으니까.
미안, 베카!
눈에 아른거리는 베카를 외면하고 자세히 보기 버튼을 누른 순간, 나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4번 오더 의뢰자 정보: 저승의 염라/오더 장소 : 저승탕]
[오더 내용 : 쑥 라테 한 잔과 박토마토]
[4번 오더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거절 시 사유를 작성하세요. 단, 사유가 타당하지 않은 경우 자동 수락 됩니다.)]
염라가 쑥 라테를 시킨다고? 왜?
오늘만 해도 운수와 샤레니안은 자신들이 쑥 라테의 피해자라며 농성을 부렸다.
그리고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때 분명 염라도 함께 있었다.
그렇다면 쑥 라테의 위험성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문득 탕 앞에서 염라를 만났을 때 내게 저녁을 먹고 보자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게 오더를 넣는다는 뜻이었나?
‘그런데 말이야…….’
쑥 라테에 한눈이 팔리는 바람에 이제야 오더 내용이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서 박토마토가 왜 나오는 건데?’
염라는 나를 놀리는 데에 제대로 맛 들린 모양이었다.
열 받는 김에 확 그냥 거절해버려?
[오더 완료 시 보상 : 근무 태만 면제권(7일), 500만 골드, 특수 보상(오더 의뢰자의 만족도에 따라 차등 지급)]
그러기에는 오더 보상의 유혹이 너무 달콤했다.
게다가 근무 태만 면제권은 오더 때마다 받을 수 있는 보상이 아니었기에 이대로 싱겁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베카, 나 오더가 들어와서 가봐야 할 것 같아. 금방 다녀올 테니까 그동안 영계랑 놀고 있을래?”
“……알겠다.”
아쉬워 보이긴 했지만 베카는 기특하게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가지 말라고 조르면 어쩌나 했는데…….
영계가 함께 있어서 괜찮은 것 같았다.
친구도 사귀고, 이렇게 베카의 세상도 점점 넓어지는 거겠지.
“역시 우리 베카, 용감해!”
베카의 보드라운 곱슬머리를 쓸어준 뒤, 나는 쑥 라테를 만들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였다.
“장고야, 찬장아! 쑥 라테 한 잔이다!”
[‘굴복한 온천 냉장고(S)’: 예, 셰프!]
[‘납작코 온천 찬장(S)’: 예, 형님! 바로 가루 준비하겠습니다.]
냉장고와 찬장의 기합에 찬 시스템창과 함께 쑥 라테 제조가 시작됐다.
* * *
“의외로군, 당연히 계약자가 가지 못하게 붙잡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수온이 부엌을 떠난 뒤, 설거지를 마친 영계가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물었다.
“붙잡고 싶었다.”
식탁에 기대어 앉아 있던 베카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붙잡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뚝뚝 묻어나왔다.
“그럼 왜 붙잡지 않은 거냐? 그랬다면 계약자가 더 머물 수도 있었을 텐데.”
“내 욕심 때문에 수온이 하고 싶은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까.”
“의외로군, 넌 좀 더 제멋대로일 줄 알았는데.”
“내가 바라는 건 내 욕심을 채우는 게 아니다.”
영계가 씻은 그릇들을 정리하며 베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그때였다.
부엌의 미닫이문에 비친 베카의 그림자가 점차 커지더니 장성한 남자의 형체로 변했다.
그림자는 수온이 두고 간 성인용 가운을 집어 들어 자연스럽게 몸에 걸쳤다.
어느새 그곳에는 꼬마 베카 대신 가운으로 가려지지 않는 넓은 골격과 다부진 몸을 가진 아름다운 외모의 성인 남자 베카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매력적인 입매를 가진 입술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쓸던 그가 미처 다 뱉지 못한 말을 이어갔다.
“수온이 내게 욕심을 가지길 바라는 것.”
보는 이를 홀릴 듯한 베카의 보석 같은 적안이 수온이 머물던 자리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뿐이다.”
그것이 자신이 가진 세계의 전부라는 듯 간절하게.
* * *
저승탕 앞에 선 나는 들어서기를 여러 번 망설였다.
그 이유라고 하면은…….
나는 손에 든 쟁반으로 눈을 돌렸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도 쑥 라테 상태가 이상하다.
술래잡기 때처럼 괴물로 변할 정도는 아니지만, 해령한테 먹였을 때랑 비슷한 색이야.
다른 성좌였다면 별다른 생각 없이 가져다줬겠지만…….
상대는 염라다!
그래서 몇 번을 다시 시도해봤지만, 결과는 한결같았다.
영계에게 도움을 청해보기도 했지만 온천의 요리법은 해령밖에 모른다고…….
그렇다고 해령을 불러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이걸 먹고 염라가 탈이라도 났다가는 대대로 대머리인 흑두루미가 날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난 흑두루미의 기다랗고 뾰족한 부리가 내 이마를 사정없이 쪼아대는 불길한 상상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안 되겠어. 쑥 라테를 주문해서 탈이 나도 책임을 묻지 말라는 각서라도 받든가 해야지.
문서가 아니면 말로라도 꼭 약속을 받아두겠다고 생각하곤 저승탕 안으로 들어섰다.
염라가 담배 없이 못 사는 골초라는 것을 일찍이 알았기에 오늘도 탕 안은 연기가 자욱할 줄 알았는데 온천의 물안개만 가득할 뿐, 공기는 쾌적했다.
그러고 보니까 근래에 들어서 염라가 담배를 피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집무실에서도 그랬고, 오늘 온천에 왔을 때도 그랬다.
혹시 요즘 금연이라도 하나?
물론 그편이 저승의 담배 연기에 쓰러진 전적이 있는 나에게는 훨씬 좋았지만.
“때를 맞춰 왔군.”
탕으로 들어오는 기척을 느낀 건지 염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이제 막 온천욕을 마치고 나온 듯한 염라가 붉은 띠가 달린 검은색 가운을 걸친 채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붉은 입술이 잘 익은 열매가 갈라지듯이 열렸다.
“토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