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냥택 당했다
우리 베카, 아닌 척하면서 좋아하고 있었구나?
꼭 식빵을 굽고 있다가 깃털 장난감을 낚아채고는 흐뭇해하는 검은 아기 고양이 같아.
볼은 또 왜 저렇게 빵빵한 거야? 잘 익은 호빵 같네.
찹쌀떡 같은 볼을 만져보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나는 베카가 해준 달걀 요리를 남김없이 해치웠다.
‘아, 맛있게 잘 먹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지금 설마 마탑 꼬맹이가 한 음식이 맛있다고 한 거냐”며 자신의 귀를 의심합니다.]
‘맞는데? 베카가 해준 요리 완전 맛있었어.’
[‘탑의 주인’이 깨끗한 빈 접시를 보며 흐뭇해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쑥 라테 맛보다가 미각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며 진심으로 걱정스러워합니다.]
‘야, 그런 걸 진심으로 걱정하지 말라고! 운수, 넌 내가 만든 쑥 라테 먹어보지도 않았잖아?’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아냐?”고 합니다.]
‘지금 내 쑥 라테가 똥이라는 거야? 너 쑥으로 만든 똥 봤어?’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똥은 아니지만 똥을 유발하는 건 봤다”고 합니다.]
짜증나지만 듣고 보니까 맞는 말이네.
이미 해령을 포함해 여럿을 화장실에 드나들게 만든 전력이 있는 터라 말문이 턱 막혔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의 시스템창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의 시스템창을 좋아합니다.]
‘잠깐만, 내가 해령은 인정하는데 샤레니안은 아니지!’
운수에게 공감하는 성좌들의 시스템창을 바라보던 중 억울해진 나는 이의를 제기했다.
‘샤레니안, 넌 쑥 라테 부작용이 없었잖아! 독에 면역이 된 몸이라 아무 이상도 없을 거라면서?’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나도 몰랐다. 독에 면역이 된 이 몸조차 쑥 라테에 무너질 줄은……”이라며 패배를 인정합니다.]
그러고 보니까 샤레니안에게 쑥 라테를 먹인 날, 베카가 만든 돈가스 몬스터가 날뛰는 걸 수습하느라 미처 인지하지 못했는데.
쑥 라테를 먹고 난 이후부터 샤레니안은 돈가스 몬스터가 정리될 때까지 자리에 없었다.
‘설마 쑥 라테를 먹고 난 이후로…….’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그때부터였다. 남자 화장실 첫 번째 칸 양변기와의 추억이 생긴 것은……”이라며 아련한 표정을 짓습니다.]
이 아련한 표정은 뭔데!
그래서 오늘 나한테 쫓길 때도 남자 화장실 첫 번째 칸에 숨은 거였어?
의도하지 않게 샤레니안과 남자 화장실 첫 번째 칸에 숨겨진 눈물겨운 사연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성좌 ‘불사의 살인귀’의 피해 사실이 확인되었다며 “암살 쑥 라테 제조자는 진실을 인정하라”라고 항의합니다.]
이때다 싶었는지 운수가 나를 압박해왔다.
가만히 당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그 유명한 박시또도 미치게 만드는 게 바로 난데 말이야.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샤레니안이 오늘 자기 손으로 나한테 쑥 라테를 만들어달라고 오더를 넣었잖아.’
샤레니안이 쑥 라테를 주문한 걸 잊고 있었던 건지 격하게 항의하던 운수의 시스템창이 일순간 잠잠해졌다.
그건 샤레니안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면 솔직히 쑥 라테의 부작용까지 즐긴다고 봐야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너 그런 위험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냐”며 성좌 ‘불사의 살인귀’에게서 멀찍이 거리를 둡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샤레니안도 엄연한 성인이니까 취향을 존중해줘라”며 안타까운 눈길을 보냅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 : ???]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성좌 ‘불사의 살인귀’를 외면합니다.]
사실 샤레니안이 쑥 라테를 주문한 건 자본주의 미소 스킬 효과 때문이지만…….
그건 나 빼고는 아무도 모른다, 이 말씀이지?
샤레니안이 조금 불쌍하긴 하지만 이걸로 해령의 오더 보상을 날려먹은 건 없던 일로 쳐주지, 뭐!
“베카, 오늘 저녁 맛있게 잘 먹었어!”
성좌들과의 실랑이를 끝내고서야 베카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나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베카는 내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다급하게 빈 접시를 싱크대에 넣으며 날 향해 다짐하듯이 말했다.
“더 연습해서 다음에는 더 맛있는 요리를 해주겠다.”
아……. 다음도 있었어?
성좌들이 내가 요리할 때마다 뜯어말리지 못해 안달이었던 게 이런 이유였구나?
새삼스럽게도 그 순간, 나의 쑥 라테 제조를 두려워하는 성좌들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베카의 다음 요리도 몬스터가 아닐 수 있을까?
짜릿했던 돈가스 몬스터의 추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등골이 서늘해지며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어져 있던 달걀 요리의 처참한 외관이 머릿속에 되새겨졌다.
만약 그 요리가 몬스터가 되었다면 최소한 달걀귀신 확정인데…….
그랬다면 온천에서 호러에 스릴러를 더한 영화를 한 편 찍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그건 너무 위험해. 온천의 평화를 위협하는 건 내가 만든 쑥 라테로 충분해!
“베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마음으로 이름을 부르자 베카가 나를 돌아봤다.
안 돼! 베카, 왜 또 토끼처럼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거야?
그러면 내가 널 말릴 수가 없잖아!
이렇게나 순진한 얼굴을 한 아이가 예쁜 마음으로 나를 위해서 요리를 해준다고 하는데 그걸 막는다고?
그런다면 난 쓰레기야!
“……기대하고 있을게!”
난 결국 베카의 귀여움에 백기를 들었다.
“응!”
내 말을 들은 베카는 주먹을 쥐며 전보다 더 요리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어쩔 수 없지. 다음 요리가 멀쩡하길 빌어보는 수밖에…….
“베카, 그런데 요리는 누구한테 배운 거야?”
“약 항아리가 가르쳐줬다.”
베카한테 요리를 가르쳐준 게 어르신이었어? 역시 금쪽이 전문가셔!
“보면 볼수록 약 항아리는 신기한 그릇이다. 처음에는 달걀 요리가 몇 번 달려드는 바람에 제법 성가셨는데, 약 항아리의 도움을 받으니 달걀이 더는 날뛰지 않았다.”
보통은 달걀이 날뛰거나 달려들지 않는 게 정상이란다.
“앞으로도 요리는 어르신한테 도움을 받는 게 좋겠어. 원래 같이 하면서 실력도 느는 거거든.”
적어도 어르신이 있으면 요리가 몬스터로 변할 일은 없겠지.
“그렇군. 네 말대로 약 항아리의 가르침을 받겠다.”
다행히 베카는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어르신 덕분에 한시름 덜고 나니 그제야 베카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올려두었던 물건이 보였다.
그건 그의 탕에서 주운 성인용 가운이었다.
계속 찜찜한 기분이 들 바에는 직접 물어보는 게 좋겠지?
“베카,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된다.”
“이 가운, 오늘 탕에 들어갔을 때 발견한 건데 혹시 베카 거야?”
“그러…….”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말투로 답하곤 했던 베카가 왠지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 그럴 리가 없지. 그 가운은 나한테 너무 크다.”
어라? 잘은 몰라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베카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고 말이야.
좀 더 가운에 대해 캐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럼 이걸 누가 베카가 쓰는 탕에 가져다 둔 걸까? 가운이 완전히 젖어 있었던 걸 보면 누군가 입고 탕에 들어간 것 같거든.”
“……사실은.”
내가 계속해서 의심을 거두지 않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베카가 운을 뗐다.
“사실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운의 주인 베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른침을 삼키는 그때, 베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가운은 내가 가져간 게 맞다.”
“그렇다는 건 가운을 입은 게 너가 맞다는 소리야?”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베카가 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가운을 입은 건 약 항아리다.”
에??? 어르신이 왜 거기서 나와?
“어르신이 이 가운을 입고 온천을 하셨어?”
“미안하다. 온천 이용료를 떼먹을 생각은 아니었다. 약 항아리에게 탕을 빌려줬다고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달걀과 사투를 벌이느라 잊었군. 약 항아리가 온천욕을 즐긴 값은 내가 따로 계산하도록 하겠다.”
말없이 어르신에게 탕을 빌려주고는 목욕값을 내지 않아서 불안해하던 거였어?
그런데 어르신도 온천을 하시는구나. 그냥 약 항아리인 상태로 물수건으로 닦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럼 그렇지. 나한테 언질 없이 탕 한 번 빌려줬다고 바들바들 떠는 꼬마가 성인일 리가…….
그냥 마탑주나 성좌들이 사는 세계에서의 나이와 인간의 나이는 기준이 다른 거야.
16000살이 넘는 영계도 병아리만 한걸? 그럼 5000살은 완전 꼬맹이가 맞지.
그나마 남은 의심조차 사라지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뭔데?”
“만약에 내가 그 가운이 딱 맞을 만큼 크더라도…….”
내 바로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은 베카가 조그만 손을 꼼지락거리며 뜸을 들였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마치 집사를 간택하는 길냥이 같았다.
“나랑 같이 있어줄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