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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92)화 (92/190)
  • 92화

    베카는 달걀을 찢어

    “염라, 다른 녀석도 아니고 네가 각인을 새겼다고? 차라리 샤레니안이 똑똑하다는 걸 믿겠다.”

    해령은 바로 눈앞에서 직접 듣고도 염라가 내게 각인했다는 걸 믿지 않는 눈치였다.

    도대체 염라는 어느 틈에 나타난 거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하긴 산 사람은 아니니까 당연한 걸지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고 있는 그때, 염라의 입술이 닿은 자리에 일순간 보랏빛의 나비 문양이 떠오르며 빛났다.

    이게 염라의 각인?

    각인을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해령이 각인을 새겼을 때, 나는 온천수에 휩쓸려서 정신을 잃은 상태였으니까.

    염라의 각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해령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가라앉아 있었다.

    “진짜 염라 네가 스스로 각인을 새겼다고? 각인을 새기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을 텐데……. 이곳에서 제일 지혜로운 성좌인 줄 알았는데 너답지 않게 바보 같은 짓을 했군.”

    해령은 여전히 염라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하긴 나도 히든 퀘스트 보상이 염라의 각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각인을 갖는 순간, 계약자뿐만 아니라 성좌도 내게 묶이게 된다.

    그 말은 즉 나는 저승의 문을 여닫는 것처럼 염라의 힘과 권한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지만, 염라는 내 생명에 문제가 생기면 페널티를 받게 되는 불평등한 계약이랄까?

    물론 히든 퀘스트를 완료했으니까 내게 각인을 새긴 거겠지.

    그게 아니었다면 염라도 굳이 자기 손으로 손해 보는 일을 하지는 않았을 거다.

    어쩌면 지금쯤 제정신으로 돌아와 각인했을 때의 해령처럼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이제 와서 각인을 물러달라고 으름장을 놓거나 하면 어떡하지?

    해령은 딱히 위협적일 게 없었지만, 염라는 달랐다.

    저승의 왕이기도 하고 명부도 있잖아! 난 거기에 이름이 쓰이면 꽥 하고 죽어버리는 파리 같은 목숨이라고!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바보 같은 짓.”

    불안에 떨고 있는 내 머리 위로 염라가 커다란 손을 덮었다.

    그 바람에 머리에 걸쳐져 있던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착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떨어진 수건을 바라보는 해령의 시선이 순간 서늘해진 것도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승의 왕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손이 차가울 줄 알았는데…….

    염라의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그 온기 덕분에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불안이 한순간에 사라질 정도로.

    “왠지 그대와 함께 있으면 바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예상과 달리 나를 보는 염라의 눈빛은 온화했다.

    아까 낮에 봤을 때만 해도 평소랑 다름없었는데 반나절 만에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닐 테고…….

    의외로 염라는 각인한 것을 후회하거나 난감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나를 더 친근하게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 어쨌든 명부에 이름이 쓰일 위기는 넘긴 건가?

    “아, 그러고 보니 그대…….”

    염라의 기다란 손가락이 나의 이마에 흘러내린 앞머리를 살짝 들췄다.

    “오늘은 토마토가 아니군.”

    아……. 잊고 있었다. 그놈의 토마토!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나는 열이 바싹 올라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염라를 흘겨봤다.

    그는 씩씩대는 나를 지켜보면서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조금은 가까워진 것도 같고.”

    염라의 흡족해하는 걸 보니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얼굴이 붉어진 상태라는 것을.

    “토마토.”

    내 쪽으로 몸을 낮춘 염라가 내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아오! 약 올라! 누가 염라 웃는 얼굴 보는 게 힘들다고 했어? 이렇게 얄밉게 잘만 웃는데!

    “박수온, 그렇게 여유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일방적으로 염라의 수에 휘말리고 있는 중에 해령이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주워 들며 말했다.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고?

    난 혹시나 해령이 오더를 넣었나 싶어 시스템창을 살폈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오더는 없었다.

    “왜? 나 뭐 급한 일이라도 있어?”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묻자 해령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아, 맞아! 저녁!”

    갑자기 염라가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베카가 저녁을 해주기로 했는데 잊다니! 이게 다 토마토 때문이야.

    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인 염라를 다시금 세모 눈을 하고 흘겨봤다.

    정작 염라는 타격이 전혀 없어 보였지만.

    분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이겨먹기엔 염라는 연륜과 내공의 수준이 달랐다.

    아무렴, 세상의 모든 영혼을 심판하는 게 염라인데 내가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상대해봤자 배만 고프지.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마음먹은 순간, 해령이 말을 덧붙였다.

    “빨리 가지 않으면 네가 좋아하는 꼬맹이가 해준 요리가 식어버리고 말 텐데. 그렇게 되면 네게 따뜻한 요리를 대접해주지 못했다는 것에 꼬맹이는 실망하겠지.”

    그건 안 되지! 베카가 만들어준 첫 식사인데 실망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너희들은 저녁 안 먹어?”

    곧장 베카에게 달려가려던 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대치하듯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해령과 염라 사이에 흐르는 기운이 심상치 않아서였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전에도 말했지만 성좌들은 꼭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

    “나도 휴식을 취하러 온 것뿐, 식사는 됐다.”

    해령에 이어 염라도 저녁 식사를 거부했다.

    뭐, 혼자면 많이 먹고 좋지!

    “하지만…….”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염라가 나를 돌아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대는 식사할 필요가 있으니 저녁을 먹고 보도록 하지.”

    저녁 먹고 보자고?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무슨 볼일이……?

    “그래! 그러지, 뭐! 온천에 온 김에 푹 쉬다 가고!”

    그래도 온천 단골손님인데 이 정도 립 서비스는 해줘야지! 나는 호방하게 대답했다.

    ‘베카야, 지금 간다!’

    나는 염라에게 살갑게 인사를 전하고 난 뒤, 베카가 손수 만든 저녁을 먹기 위해 분주히 2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 * *

    [‘탑의 주인’이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새까맣게 탄 프라이팬과 냄비를 들고 우왕좌왕합니다.]

    [가이드 ‘영계’가 ‘탑의 주인’에게서 새까맣게 탄 프라이팬과 냄비를 전달받고 재빠르게 주변을 정리합니다.]

    [‘탑의 주인’이 부엌을 채운 검은 연기를 없애기 위해 다급하게 손부채질을 합니다.]

    [가이드 ‘영계’가 환풍기를 켜서 부엌을 환기합니다.]

    뭐지. 갑자기 부엌이 부산스러워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베카가 만든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설렘을 안고 부엌으로 달려왔는데 쉴 새 없이 떠오르는 시스템창에 왠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저녁 준비가 된 건 맞겠지? 영계가 뭔가를 급하게 수습하는 것 같기는 한데…….

    [‘탑의 주인’이 깨끗해진 식탁 위에 요리를 올려놓습니다.]

    식탁에 요리를 올린다는 알림창을 마지막으로 굳게 닫혀 있던 부엌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연 건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한 베카였다.

    “수온, 저녁을 먹을 준비가 된 건가?”

    그런데 왜 이렇게 재투성이가 된 거지? 비장한 표정으로 치켜든 저 뒤집개는 또 뭐고?

    눈앞의 베카의 모습은 요리라기보다는 힘겨운 전투를 마치고 온 전사 같았다.

    “준비됐어!”

    어쩐지 점점 더 불안해지긴 하지만 요리의 상태가 어떻든 베카의 정성이 중요한 거니까!

    “그렇다면 들어와도 좋다.”

    베카가 내게 입구를 통과할 수 있는 자격을 내어줬다.

    일단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조심스럽게 고개부터 내밀어 부엌의 상황을 살폈다.

    생각보다 부엌은 멀쩡했다.

    다행이야. 지난번 돈가스를 만들겠다고 나섰을 때처럼 몬스터가 뛰어다니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아.

    “계약자여, 왔는가?”

    높은 의자에 올라선 영계가 설거지를 하다 말고 뒤를 돌아보며 나를 반겨줬다.

    싱크대에 각종 프라이팬과 냄비가 쌓여 있는 걸 보니 베카가 벌인 일의 뒷수습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영계가 대신해서 설거지해줄 정도면 둘 사이가 정말 가까워졌나 보네?

    벌써 사이가 두터워진 것 같은 둘을 보니 절로 흐뭇해졌다.

    “응, 저녁 먹으러 왔어.”

    “여기에 앉아라.”

    베카가 내가 앉을 의자를 손수 빼줬다.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워왔대. 저 작은 손으로 의자를 빼주다니! 말 그대로 심장을 저격당해버렸다.

    “자, 이제 베카가 만든 달걀 프라이를 먹어볼…….”

    기분 좋게 숟가락을 들자마자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달걀 프라이가 내가 아는 거랑 좀 많이 다르게 생겼네?’

    베카가 내어놓은 접시에는 정체불명의 물체가 놓여 있었다. 달걀을 어떻게 하면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 있는 거지?

    “동그란 모양을 만들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먹는 게 내키지 않는다면 은색 뱀이 해주는 요리를 먹어도 괜찮다.”

    베카의 표정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눈앞의 요리 상태처럼…….

    아니지, 뭐 어때? 생긴 것과 달리 맛있을 수도 있잖아?

    “아니야. 스크럼블처럼 먹으면 돼!”

    이건 베카의 정성이야. 눈 딱 감고 먹는 거다!

    나는 숟가락에 흩어진 달걀들을 모아 크게 한입 먹었다.

    ……어라? 맛있잖아?

    믿기지 않지만 정체불명의 달걀 요리는 지호가 만들어준 것만큼이나 맛이 좋았다.

    베카, 의외로 요리에 재능이 있을지도?

    “먹을 만한가?”

    “베카……? 진짜 맛있어! 우리 베카 이 정도 요리 솜씨면 나중에 커서 사랑받는 남편이 되겠는데?”

    내 옆자리에 앉아 긴장한 얼굴로 답을 기다리는 베카에게 폭풍 칭찬을 쏟아내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서 돌아앉았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꾸준히 요리를 연습해야겠군…….”

    어라? 맛있다고 하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담담하네?

    그때였다. 얼핏 보이는 베카의 포동포동한 볼이 복숭아처럼 발그레하게 부풀어 올라간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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