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각인했으니까
어째서 베카가 쓰고 있는 탕에 성인용 가운이 떨어져 있는 거지?
자신이 쓰는 탕이 개별로 정해져 있을 정도로 예민한 온천의 성좌들이 베카의 탕을 사용했을 리도 없고.
혹시 베카가 가운 사이즈를 착각해서 잘못 가져왔나?
가운 디자인이 똑같으니까 성인용인지 어린이용인지 혼동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게 있었다.
가운은 꼭 누군가 입고 온천욕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온천에는 네 명의 성좌 외에 내 허락을 받지 않은 손님은 들어올 수 없다.
그 말은 즉, 가운을 사용한 건 베카일 수밖에 없다는 건데…….
그 조그마한 몸으로 성인용 가운을 입었을 리도 없고. 아니면 펼쳐보다가 실수로 탕에 빠트렸나?
탕에 걸터앉아서 마시멜로처럼 짤막한 팔로 가운을 펼쳐 들었다면 아랫부분은 젖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하지만 이 가운은 윗부분까지 다 젖어 있단 말이지.
마치 몸 전체를 탕에 담근 것처럼…….
아니야, 어쩌면 가운을 잘못 챙겨온 게 짜증 나서 탕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르잖아?
해령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 성격을 가진 베카니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젠가 해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베카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은 5000년을 넘게 살았다는…….
사실 햇수로 따져본다면 나보다 수천 년을 더 살았으니 베카가 훨씬 어른이었다.
사람의 나이로 치자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몇 대를 거쳐도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베카의 나이를 어림잡는 건 관뒀다.
어떻게 계산해도 무조건 할아버지라는 거잖아?
하지만 할아버지 베카는 나로서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무리야! 당장 베카가 성인이라고만 해도 상상이 안 되는걸…….
심란해진 나는 가운을 내려놓고 탕 안에서 몸을 웅크려 앉았다.
‘영계야,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는데 물어봐도 될까?’
[가이드 ‘영계’가 빨랫줄에 널린 수건을 걷다가 말고 “어차피 묻지 말라고 해도 물을 거 아니냐”며 해탈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건 맞지.
이제 영계도 나라는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 된 것 같았다.
‘넌 몇 살이야?’
영계는 베카보다 훨씬 작으니까 나이도 더 어리겠지? 그래도 용이니까 한 100살은 되려나?
[가이드 ‘영계’가 “정확히 16345살”이라고 합니다.]
‘뭐? 며, 몇 살이라고?’
시스템창을 통해 똑똑히 보고 있는데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영계가 16345살이라니……. 그럴 리 없어!
이건 시스템창에 오류가 난 게 분명했다.
나는 재차 영계에게 되물었다.
[가이드 ‘영계’가 귀찮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세 번은 말하지 않을 테니 이번엔 제대로 들어라”라며 “16345살”이라고 강조합니다.]
말도 안 돼! 영계가 진짜 16345살이라고?
시스템창에 떠오른 숫자는 변함이 없었다.
‘저 조그마한 솜뭉치가 16000살이 넘는다니……!’
난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영계가 있는 세계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모양이었다.
영계가 16345살이라면 베카가 5000살이어도 이상할 게 없다.
베카의 실제 나이와 성인용 가운에 대한 의구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확실해졌어. 저 가운은 베카가 입었던 것이 분명해. 베카가 치울 것 같지는 않으니까 내가 나갈 때 가져가서 세탁해둬야겠어.
의문이 해결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이드 ‘영계’가 “솜뭉치라니, 다른 성좌님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경지이긴 하지만 자신은 엄연한 용”이라며 발끈합니다.]
‘아, 혼자 생각한 건데 거기까지 들렸어?’
[가이드 ‘영계’가 “아주 잘 들렸다”며 토라집니다.]
귀엽기는, 영계는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영계가 토라졌다는 알림창을 보며 숨죽여 웃던 나는 문득 또 다른 의문에 빠졌다.
‘그런데 말이야……. 영계가 16000살이 넘으면 다른 성좌들은 도대체 몇 살이라는 거야?’
운수는 만나보기 전이지만, 나머지 성좌들은 전부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잖아?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남자 화장실 첫 번째 칸 양변기에 앉아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소리칩니다.]
‘너 아직도 남자 화장실에 숨어 있어?’
술래잡기가 끝난 지가 언제인데 샤레니안은 아직도 남자 화장실 첫 번째 칸에 숨어 있는 모양이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네가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알고 있는 거냐”며 “혹시 지금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거냐”고 말하면서 양변기 위에 서서 슬그머니 주변을 살핍니다.]
놀라워, 대체 샤레니안의 엉뚱함은 어디까지인 거지?
새삼스럽게 그의 뇌가 근육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던 해령에게 다시 한 번 공감하게 됐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여기서 네가 있는 곳을 모르는 이는 없다”며 한심해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그걸 왜 이제 말해주냐”며 뒤늦게 시스템창에 자신의 위치가 뜬다는 것을 깨닫고 변기에 털썩 주저앉아 절망적인 표정을 짓습니다.]
이제라도 깨달은 게 차라리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그 커다란 덩치로 종일 남자 화장실에서 몸을 웅크린 채 불안에 떨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샤레니안에게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샤레니안, 쑥 라테는 버린 지 오래니까 그만 숨어 있어도 돼.’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그게 정말이냐”며 “말은 그렇게 해놓고 또 남자 화장실 앞에서 쑥 라테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냐”고 의심합니다.]
양동이 쑥 라테 사건으로 나에 대한 샤레니안의 불신이 커진 것 같았다.
‘정 못 믿겠으면 해령한테 물어보든가? 내가 쑥 라테를 없애는 걸 봤거든.’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수온의 말이 맞다”며 “쑥 라테가 괴물이 되기 직전이어서 태초의 바람으로 돌려놓았다”고 증언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괴물을 먹을 뻔했다는 사실을 알고 사색이 됩니다.]
‘쑥 라테가 괴물이 될 뻔했다는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박수온표 쑥 라테의 위험성을 알려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다들, 솔직히 내 쑥 라테가 해령이 말하는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다. 인정?’
순간 시끄럽던 알림창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와, 솔직히 빈말이라도 한 명은 답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온천 사장으로 각성하고 나서 이렇게까지 성좌들의 시스템 창이 조용한 건 처음 봤다.
‘됐다, 됐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쑥 라테를 연구해서 최강의 맛을 내고 만다. 그때 만들어달라고 매달리지나 말아!’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쑥 라테를 연구하는 동안 온천이 성하기만 했으면 좋겠다”며 근심에 빠집니다.]
하긴 오늘만 해도 쑥 라테가 몬스터로 변할 뻔한 걸 보면 확실히 내 손이 심각한 똥손이긴 해.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면 지호한테 요리 노하우를 배워와야겠어.
그리고 완전히 달라진 나의 요리 솜씨에 모두들 굴복하게 해주겠다. 이 콧대 높은 성좌 놈들 같으니라고!
열을 올리다 보니 금세 배가 고파졌다.
이제 몸도 풀린 것 같고 이쯤이면 베카도 저녁 준비를 마쳤겠지?
나는 베카가 준비한 저녁 식사를 기대하며 탕에서 빠져나왔다.
* * *
나는 온천 사장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내며 탕 입구로 걸어 나왔다.
그때 누군가 내 머리에 수건을 덮어주며 말했다.
“머리카락을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감기에 걸린다고 해도.”
이 까칠한 목소리며 말투는 보나 마나 해령이었다.
고개를 들자 그가 탕 입구의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누구 기다려?”
“그래.”
“누굴 기다리는 건데?”
내가 주변의 탕들을 살피자 해령이 내게 성큼 다가와 섰다.
“여기.”
무심하게 아래로 내려앉은 사파이어색 눈동자가 올곧게 나를 향했다.
“때마침 나왔네.”
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거였어?
왜 이렇게 뚫어지게 바라봐? 괜히 사람 민망해지게.
“왜? 할 말이 있으면 시스템창으로 해도 됐을 텐데.”
“은밀히 물어야 할 것이라서.”
은밀히? 해령하고 내 사이에 은밀하게 말할 게 뭐가 있지?
히든 퀘스트도 그렇고 특수 보상도 그렇고 숨기고 있는 게 많다 보니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혹시 낌새라도 눈치챘나?
“어디로 사라졌던 거지?”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데 해령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응?”
“창고에서 말이다,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나? 잠깐이긴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각인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 술래잡기했을 때 내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묻는 거구나.
아마도 저승에 있을 때는 해령 역시 내게 새겨둔 각인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나 저승에 있었거든.”
“저승에 있었다니? 어떻게…….”
날 향한 해령의 눈빛이 걱정으로 물드는 순간, 또 다른 이의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가능하지.”
귓가에서 염라의 동굴 같은 저음이 울렸다.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날카로운 적안으로 해령을 직시한 채 자신이 각인을 새긴 손을 감아쥐는 염라가 보였다.
“내가 각인했으니까.”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염라의 붉은 입술이 각인을 새긴 손등에 살며시 맞닿았다.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