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상상도 못한 가운의 정체 ㄴㅇㄱ
특수 보상이 고작 이 구슬 두 개라고?
나는 베카를 안은 채로 조심스럽게 손에 쥔 것을 들여다보았다.
베카의 눈동자색과 같은 빨간색 구슬 두 개가 보였다.
설명을 봐야 알겠지만 겉보기에는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데…….
이게 특수 보상이라고?
“박수온.”
구슬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하자 다리를 부둥켜안고 있던 베카가 고개를 들며 나를 불렀다.
나는 황급히 손을 접은 뒤, 옷 주머니 안에 구슬을 넣어 감췄다.
아슬아슬했다. 하마터면 구슬을 들킬 뻔했어.
사실 구슬을 베카에게 보이는 건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판도라의 구슬을 베카가 알지 못할 때의 이야기였다.
이 구슬을 베카가 알고 있다면 그 이후로는 상황이 복잡해진다.
내가 베카의 히든 퀘스트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
어쨌든 베카를 대상으로 퀘스트를 수행해서 보상을 받는 거니까 잘못하면 괜한 적의를 살 수도 있고.
베카를 속이는 것 같아서 찜찜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자동 진행이 되어버린 히든 퀘스트를 내가 무슨 수로 막겠어?
게다가 돌발로 떠오르는 퀘스트를 거절하면 베카의 미움을 산다고 하니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히든 퀘스트를 마지막까지 완수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응?”
몸을 낮춰 앉아 베카의 눈높이를 맞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는 걸 반복하던 그가 용기를 내듯 조그마한 주먹을 힘껏 쥐었다.
“저녁에는 꼭 내가 달걀 프라이를 만들어주겠다. 아침에는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미처 준비는 못했지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무미건조한 말투.
그렇지만 내 대답을 기다리는 베카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러고 보니까 베카가 아침 식사를 만들어주겠다고 했었지.
오더에 한눈이 팔린 데다 술래잡기까지 하느라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
하지만 베카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내내 달걀 프라이를 만들어줄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역시 베카는 사랑이야.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베카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베카가 만들어주는 저녁이라니! 기대돼! 내가 돈가스 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달걀 요리거든. 다들 탐내지 마! 내가 다 먹어버려야지.”
달걀 요리를 좋아한다는 말에 안도한 건지 베카의 양쪽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해보겠다. 달걀 프라이.”
이내 베카는 꼭 완벽한 달걀 프라이를 만들어내고야 말겠다는 듯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베카, 탑에 찾아온 헌터들을 상대하러 갈 때보다 훨씬 전투적인 것 같은데?
“일찍이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꼬맹이. 결국에 저녁은 내가 만든 온천표 돈가스 정식이 될 테니까.”
어째 온천이 좀 평화롭다 싶었다.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야?”
고개를 돌리자 2층 창고 앞에서 내가 있는 편으로 걸어오는 해령이 보였다.
“네가 말도 안 되는 연기를 하고 있었을 때부터.”
그때부터라고?
그 말은 해령이 내 발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거잖아?
“연기?”
베카가 해령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안 돼, 베카! 듣지 마!
내가 일부러 잡혀줬다는 걸 사실을 알게 되면 베카가 크게 상심할 게 안 봐도 뻔했다.
“연기라니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네?”
“수온, 얼굴이 빨갛다.”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데 베카가 단풍잎 같은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여기서 얼굴이 빨개질 건 또 뭐람?
내 몸마저도 내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더워서 그래, 방금까지 베카한테 안 잡히려고 열심히 도망을 다녔거든. 어유, 더워라!”
난 얼굴에 손 부채질을 해가며 베카의 눈을 피해 소리 없이 웃고 있는 해령을 흘겨봤다.
“너무 무리한 게 아닌가? 나도 돕겠다.”
베카가 조막만한 손을 휘적거리며 내게 바람을 불어 넣어줬다.
여기가 내가 누울 자리인가?
박수온, 연기하길 잘했다.
“그래서 저녁은 어쩔 생각이지?”
흐뭇하게 웃으며 베카의 손부채질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데 어느샌가 바로 옆으로 다가온 해령이 내게 물어왔다.
“뭘 어째?”
“결정해야지. 이 꼬맹이의 달걀 프라인지 아니면 내 돈가스 정식인지.”
뭘 당연한 걸 물어?
“당연히 베카가 만들어주는 달걀 프라이를 먹을 생각인데?”
내게는 당연한 선택이 해령에게는 아니었던 건지 그가 일순간 충격받은 얼굴로 돌처럼 굳었다.
“어떻게 그런. 벌써 잊은 거냐? 저 녀석이 만든 돈가스가 괴물이 되어서 온천의 문을 부숴놓은 것을? 그런데도 저 꼬맹이가 만든 음식을 먹겠다고?”
그러고 보니 베카도 손재주가 좋지는 못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날 위한 정성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거잖아.
해령의 말이 틀린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거만하다 싶을 정도로 당당하게 굴던 베카의 양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왜 우리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래?
“그래. 먹을 거야!”
결정을 번복하지 않고 꿋꿋이 밀고 나가자 해령이 다시금 충격에 빠졌다.
“넌 달걀 프라이보다 돈가스가 좋다고 하지 않았나?”
“요리를 만드는 게 누구인지도 중요하지.”
마지막까지 쐐기를 박자 해령이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탑의 주인’이 성좌 ‘온천의 지배자’를 향해 승자의 미소를 짓습니다.]
“저 꼬맹이가…….”
해령이 분해하는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그러게 베카랑 사이좋게 지내면 좀 좋아?
“베카, 오늘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저녁을 먹기 전에 씻고 와야 할 것 같아. 괜찮다면 네 탕을 써도 될까?”
베카에게 잡히지 않겠다고 악을 쓰고 달린 탓에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하지만 온천에 탕은 다섯 개뿐이고 전부 지정된 손님이 있어서 탕을 사용하려면 미리 말해두는 게 좋았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번처럼 온천욕을 하는 중에 탕의 주인과 마주치는 참사가 또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얼마든지 편한 대로 써라. 그동안 나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겠다.”
다행히도 베카는 흔쾌히 탕을 쓰라고 말해줬다.
“고마워, 베카.”
탕으로 향하기 전, 나는 넋이 반쯤 빠져서 벽에 붙어 있는 해령을 향해 얄밉게 웃어줬다.
얼이 빠진 중에도 일그러지는 해령의 얼굴을 지켜보는 건 매우 통쾌했다.
멋진 복수를 마친 나는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베카가 쓰고 있는 손님탕으로 향했다.
* * *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뜨끈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자 오늘 하루 쌓인 피로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따로 향료를 타지 않았는데도 몸이 회복되는 기분이야.
“맞다, 구슬!”
몸이 한결 편해지니 베카의 히든 퀘스트에서 특수 보상으로 받았던 판도라의 구슬이 떠올랐다.
지금은 나 혼자뿐이니까 느긋하게 살펴볼까?
난 벗어둔 옷 주머니에서 구슬을 꺼내 들었다.
[판도라의 구슬(SSS)]
[베카의 또 다른 그림자가 만들어낸 구슬. 20개를 모으면 판도라의 상자(EX)를 열 수 있는 열쇠를 만들 수 있다.]
이걸 20개 모으면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를 만들 수 있다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 뭐가 좋은데?
여기저기를 살펴봤지만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정보 같은 건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도 EX급 상자인 걸 보면 뭔가 엄청난 게 들어가 있을 것 같긴 한데.
사우나 가운처럼 유용한 장비가 들어 있다던가?
혹시 너무 강력해서 세상에 나오면 위험한 물건이 들어 있어서 이름이 판도라의 상자인 거 아냐?
어느 쪽이든 기본 스탯이 열악한 나에게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귀한 물건인 것 같으니까 고이 모셔두자.
나는 두 개의 구슬을 조심스럽게 인벤토리창 안으로 옮겼다.
그나저나 이제 두 개밖에 못 모았는데 언제 20개를 모으지?
게다가 베카의 퀘스트 만족도가 높음일 때 두 개를 준다는 건 만족도가 낮으면 더 적게 주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됐다.
어쩐지 앞으로의 일이 막막해지네.
하긴 세상을 뒤집어놓을 만큼 강력한 보물을 쉽게 주지는 않겠지.
어느새 나는 판도라의 상자에 담긴 물건이 강력한 보물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뭐, 잊고 살다 보면 모이겠지! 지금은 쉬는 것만 생각하자.
온천수에 머리끝까지 몸을 담그고 나오는데 탕의 바깥쪽에 뭔가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저건 옷 같은데? 혹시 베카가 까먹고 두고 갔나?
챙겨줄 생각으로 헤엄을 쳐서 옷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어라? 이건 어제 베카가 입고 있던 온천 가운인데…….
베카가 두고 간 옷이 가운인 걸 확인했음에도 나는 더욱 큰 의문에 빠졌다.
그런데……
왜 성인용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