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쉿!
돌발 퀘스트가 발생했다고?
알림창이 뜨기가 무섭게 퀘스트창이 연이어 떠올랐다.
[히든 퀘스트 ‘탑의 주인’ 길들이기(EX) (1)]
[베카에게 잡히지 않고 10분 동안 술래잡기하기]
[퀘스트 보상 : 500만 골드, 특수 보상 (베카의 만족도에 따라 차등 지급)]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주의 : 거절 시 베카에게 미움을 살 수 있음)]
갑자기 베카랑 술래잡기를 하라고?
그래도 500만 골드면 샤레니안 때문에 날려먹은 오더 보상을 복구할 수 있잖아?
그런데 이미 샤레니안과 실랑이를 벌이느라 체력이 반쯤 축이 난 상태인데…….
10분을 더 뛰어다닐 생각을 하니 아득해졌다.
그렇다고 고작 퀘스트 때문에 베카와 멀어지고 싶지는 않아!
거절 시 베카의 미움을 산다는 문장 하나 때문에 나는 빠르게 퀘스트를 수락했다.
[히든 퀘스트 ‘탑의 주인’ 길들이기(EX) (1)‘를 수락하셨습니다.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베카에게 잡히지 않고 10분 동안 술래잡기하기 (0분 3초/10분 00초)]
퀘스트 수락과 동시에 시스템창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술래잡기 퀘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성좌들과 베카는 계약자의 삶을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퀘스트를 완료하기 전까지는 계약자들이 나를 보지 못한다는 거니까 허무하게 위치가 들통날 일은 없겠어.
이 정도면 해볼 만할지도? 그 짤막한 다리가 빠르면 얼마나 빠르겠어?
토도도도…….
적당히 베카의 속도에 맞춰서 놀아주면 될 거라고 생각하며 뒤에서 들리는 부산스러운 발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아아악!”
발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괴성을 내지르며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박수온! 거기 서라!”
베카가 의지를 불태우며 날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팔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 * *
“헥헥…….”
난 정교하게 쌓인 상자들 사이에 몸을 숨긴 채 거친 숨을 고르며 퀘스트창을 올려다봤다.
[히든 퀘스트 ‘탑의 주인’ 길들이기(EX) (1)]
[베카에게 잡히지 않고 10분 동안 술래잡기하기 (7분 11초/10분 00초)]
7분간 쉬지 않고 베카에게 쫓겨다니다 보니 이미 몸은 녹초 상태가 되어 있었다.
베카, 도저히 어린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속도였어.
마치 폭주 기관차 같았달까?
괜히 최종 보스가 아닐지도. 확실히 범상치 않아.
베카의 팔이 조금만 길었다면 일찍이 잡히고 말았을지도 몰랐다.
어떻게 2층에 있는 창고로 들어와서 숨긴 했는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확실한 건 이제 더 뛸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난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끼며 상자들 사이에 주저앉았다.
[‘탑의 주인’이 “수온이 보이지 않는다”며 시무룩한 얼굴로 “수온이 어디에 있는지 아냐”고 묻습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난 알고 싶지 않다”며 남자 화장실의 첫 번째 칸 양변기에 몸을 웅크리고 앉습니다.]
샤레니안 녀석, 안 보인다고 했더니 남자 화장실에 숨어 있었구나?
와중에 시스템창으로 말하면 자신의 위치가 들통난다는 걸 모르는 점이 참 샤레니안다웠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다들 어린애도 아니고 술래잡기가 뭐라고 이렇게 열을 올리냐”며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냅니다.]
[‘탑의 주인’이 “제일 먼저 자신에게 수온의 위치를 알려주는 이에게 마탑의 팝콘 나무에서 나는 팝콘을 구해다주겠다”며 조건을 붙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성좌들인데 고작 팝콘에 움직일 리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 어떤 팝콘도 맛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마탑의 팝콘 나무에서 나는 팝콘을 준다고?”라며 귀가 솔깃해져서는 꼭두각시를 꺼내 듭니다.]
움직인다고? 그것도 운수가?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으이그, 저 팝콘광”이라며 지긋지긋하다는 눈길로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를 바라봅니다.]
어쩐지 틈만 나면 팝콘을 꺼내 먹는다고 했어.
팝콘을 좋아하는구나. 말하는 걸 보면 과자를 좋아할 것 같은 이미지는 아니었는데 의외로 운수는 아이 같은 면이 있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온천 곳곳에 꼭두각시를 풀면 수온을 찾는 건 식은 죽 먹기”라며 술래잡기에 열을 올립니다.]
방금 술래잡기에 열 올린다고 한심하게 바라봤던 성좌가 누구더라?
아무리 그래도 팝콘 때문에 내 위치를 판다니. 믿을 놈이라고는 없어.
그나저나 운수가 꼭두각시를 풀었다면 내 위치가 들통날 위험이 커졌다.
난 고개를 내밀어 창고의 미닫이문을 내다봤다.
미닫이문 위로 정체불명의 그림자들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숨을 죽이고 있는 그때.
[진화한 초록 괴물 쑥 라테(SS) : 꾸루루룩! 꾸루룩!]
잠잠하던 쑥 라테가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조용히 해! 이러다가는 들킨다고!”
[진화한 초록 괴물 쑥 라테(SS) : 꾸루루룩! 꾸루루루루룩! 꾸룩!]
내 만류에 쑥 라테는 더 목청을 높여 울기 시작했다.
그때 미닫이문 앞을 지나던 그림자 하나가 내가 있는 곳에서 멈춰 섰다.
쑥 라테의 울음소리를 들은 건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그림자를 지켜봤다.
언제 들켜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에 진땀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그림자가 기어코 창고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곧장 상자 뒤에 몸을 낮춰 웅크렸다.
창고를 서성이던 발이 다시 미닫이문을 열었다.
다시 밖으로 나갈 생각인 모양이야.
위기는 넘긴 건가?
안도하기가 무섭게 양동이가 펄떡거렸다.
[진화한 초록 괴물 쑥 라테(SS) : 꾸루루룩! 꾸루! 꾸루루룩!]
……망했다.
쑥 라테가 발광하는 소리를 들은 건지 발소리는 단숨에 내게로 가까워졌다.
이대로 베카한테 잡히는 건가?
퀘스트 실패를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여기에 숨어 있었던 건가? 정말 너도 열심히군.”
이건 베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눈을 뜨자 땀에 흠뻑 젖은 나를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해령이 보였다.
“너였구나.”
마음을 놓기가 무섭게 나는 해령을 경계했다.
“날 찾고 있는 것 같던데……. 너 설마, 내 위치를 베카에게 알려주려고?”
“유치한 놀음에는 관심 없다.”
“그럼 왜 날 찾은 건데?”
“그거, 태초의 바람으로 일찍이 처리해두지 않으면 온천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을지도 모른다. 지난번에 타버린 돈가스처럼 반은 괴물이 된 상태니까.”
해령이 내 손에 들린 쑥 라테 양동이를 가리켰다.
내가 만든 쑥 라테가 반은 괴물인 상태라고?
그래서 자꾸 이상한 소리를 냈던 건가?
다른 건 몰라도 온천에 피해를 주는 건 바라지 않았다.
창고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손바닥을 펼쳤다.
“부채.”
나는 곧장 쑥 라테가 든 양동이를 향해 바람을 일으켰다.
“태초의 바람!”
[진화한 초록 괴물 쑥 라테(SS) : 꾸루루룩! 꾸루꾸루룩! 꾸우우우!]
[성좌의 부채가 ‘태초의 바람’을 일으킵니다.]
[스킬 ‘태초의 바람’ 효과로 ‘진화한 초록 괴물 쑥 라테(SS)’가 추억에 잠깁니다.]
쑥 라테 양동이에서 쏟아져 나온 필름에서는 광기 어린 얼굴을 한 내가 쑥 라테를 만드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억을 되찾은 ‘진화한 초록 괴물 쑥 라테(SS)’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얼마 안 가서 쑥 라테는 평범한 쑥가루와 1리터의 우유로 돌아왔다.
“이제 됐지? 난 아직 더 숨어 있어야 하니까 빨리 나가!”
[베카에게 잡히지 않고 10분 동안 술래잡기하기 (8분 47초/10분 00초)]
남은 시간을 확인하며 해령을 쫓아내듯이 손짓한 나는 다시 상자 뒤에 몸을 숨겼다.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시든지.”
미련 없다는 듯 돌아선 해령의 걸음이 순간 멈췄다.
또 다른 발소리가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방금 누구와 대화를 한 거지? 안쪽에서 수온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베카의 목소리잖아?
아무래도 나와 해령이 대화하는 걸 들은 것 같았다.
“이제 겨우 5000살인데 벌써 귀가 안 좋은 건가? 이곳에는 나 혼자 있었다.”
웬일로 해령이 나를 숨겨주려고 나섰다.
나이스! 해령!
“내 귀가 잘못되었는지는 직접 확인해보면 알겠지.”
하지만 베카는 물러나지 않았다.
베카가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카에게 잡히지 않고 10분 동안 술래잡기하기 (9분 01초/10분 00초)]
아직 59초를 더 버텨야 하는데!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
머리를 싸매던 나는 곧장 벽면을 향해 돌아서며 소리 없이 읊조렸다.
‘개방’
* * *
‘봉쇄!’
열린 문으로 들어온 나는 곧장 저승으로 통하는 문을 닫았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서류를 읽고 있던 염라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번에도 염라의 집무실로 통한 건가?
“그대는…….”
“쉿!”
나는 입술 위에 검지를 얹으며 염라를 바라봤다.
괜히 염라가 말했다가 시스템창을 통해서 내 위치가 알려질지도 몰랐다.
그러자 염라가 얼떨결에 서류를 내려놓은 손을 제 입술 위로 가져갔다.
“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