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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85화 (85/190)

85화

프로의 자세

나를 온천 사장으로 추천한 게 샤레니안이라고?

아니, 대체 어떻게? 그보다 왜?

급하게 온천 사장 자리를 채우려던 영계의 눈에 들어서 우연히 각성한 게 아니었어?

다시 생각해보니까 처음 각인했을 때 영계가 샤레니안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 같기도 했다.

각성한 것에 한눈이 팔려서 흘려 넘기긴 했지만 말이야.

그런데 샤레니안은 어떻게 날 알고 있었던 거지?

“그렇지만 내가 가진 기억은 확실하지 않고, 제대로 샤레니안을 알게 된 건 온천에 오고 난 이후인데?”

“넌 몰라도 샤레니안은 오래전부터 널 눈여겨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모든 성좌들이 각성자를 고를 때 그러하듯이.”

그렇지! 나는 볼 수 없어도 성좌인 샤레니안은 나를 볼 수 있었겠구나.

의문이 풀리는 듯싶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또 다른 의문이 피어났다.

그 말은 샤레니안이 나태하기 그지없는 내 백수 생활을 모조리 지켜봤다는 건가?

“오래전부터 내 생활을 지켜봤다면 날 온천 사장으로 추천한 게 더 이해가 가질 않는데…….”

밤늦게까지 X플릭스를 보다가 해가 지는 오후가 되어서야 기상해 이불 속에서 기어 나와 즉석식품으로 끼니를 때우고, 잘 씻지도 않아서 머리가 떡이 진 채로 지냈던 예전 나의 모습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걸 보고 어떻게 날 계약자로 점찍을 수 있지?

성좌 중에서도 샤레니안의 몸이 유독 좋은 걸 보면 딱 근손실 나는 걸 싫어하는 타입 같은데, 그러면 나랑은 상극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부분이 그의 마음에 들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희미하게나마 네 기억에도 샤레니안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해령의 물음에 나는 애매하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기억이 너무도 불확실해서 그 상대가 진짜 샤레니안이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성좌들은 종종 눈에 드는 계약자가 있으면 잠시 인간의 모습으로 만나러 가기도 한다.”

성좌들이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다고?

해령의 말에 의하면 그렇게 하면 각성하기 전의 인간의 눈에도 성좌가 보일 수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샤레니안이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때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널 온천 사장으로 추천한 걸지도.”

내가 샤레니안의 상처를 치료해주면서 눈물을 흘린 걸로 보아 그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흥부가 다리를 고쳐줘서 은혜 갚은 까치 같은 거랄까?

그럴듯한 이야기긴 하지만 여전히 뭔가 찜찜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샤레니안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기억이라면 나한테도 강하게 남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불현듯 스쳐 지나간 샤레니안과의 기억은 꼭 누군가 내 머릿속 기억의 일부를 억지로 지운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네 기억력이 나쁜 걸 수도 있지.”

해령은 어려울 것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답했다.

어째서 그렇게 단정 짓는 건데?

분하긴 했지만 공부나 암기에는 딱히 소질도 흥미도 없는 나였기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뭐, 어때?

요즘 시대에 꼭 공부를 잘해야만 성공하는 건 아니잖아?

시험 성적은 안 좋았어도 난 월 고정 매출 1억이 넘는 온천 사장이 됐는걸.

나는 대놓고 귀를 후비적거리며 해령의 말을 못 들은 척 한 귀로 흘려들었다.

“뭐, 샤레니안한테 가서 물어보면 알겠지.”

“그래도 희미한 옛 기억에 눈물을 흘릴 정도면 이쪽에서도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던 거 아닌가?”

“응? 방금 나한테 뭐라고 하지 않았어?”

딴청을 피우다 보니 해령의 다음 말까지 훌쩍 날려버렸다.

“됐다. 딱히 네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기껏 되물었더니 해령은 전보다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또 뭐에 심기가 뒤틀린 거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됐어! 여기까지!

머리 아픈 일에는 관심을 끄는 게 상책이었다.

[오더 내용 : 쑥 라테 한 잔 (오더 제한 시간 : 00:35:58초)]

그 와중에도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오더를 완수하는 거라고!

“그럼 이야기 끝난 거지? 난 쑥 라테 만들러 간다!”

서둘러 부엌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해령이 나의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해령, 나 지금 진짜 급하거든? 35분 안에 샤레니안한테 쑥 라테를 가져다주지 못하면 오더가 취소된다고.”

“그만둬라. 어떤 이유로든 내 각인 상대를 울린 자다. 한 번 울렸는데 또 울리지 않는다는 법이 있나?”

날 바라보는 해령의 눈에서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얽혀들었다.

어떤 감정들인지 모두 읽을 수는 없지만, 그가 날 걱정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고작 내가 울까 봐 해령이 걱정을 한다고?

나는 혹시 예전 내 암살 쑥 라테를 먹은 후유증이 아직 그에게 남아 있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미심쩍은 눈으로 해령을 바라보던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해령, 나한테 오더를 완료하는 건 매우, 매우 중요한 문제야. 내가 오더 보상 못 받으면 책임이라도 질 거야?”

“책임지지.”

“네가 어떻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쇠로 된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3번 오더가 들어왔습니다. (……자세히 보기)]

이 와중에 3번 오더가 들어온다고?

대체 누구한테?

본능적으로 내 시선은 맞은편에 선 해령에게로 향했다.

설마…… 너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오더에는 오더로.”

해령이 눈을 가늘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나야 오더가 하나 더 늘면 좋은 일이지만 어쩐지 그의 미소가 수상쩍게 느껴졌다.

일단 뭔지 보기나 하자는 생각으로 자세히 보기 버튼을 눌렀다.

[3번 오더 의뢰자 정보: 온천의 지배자/오더 장소 : 복도]

[오더 내용 : 병약한 성좌에게 쉴 곳과 무릎을 빌려주기 (30분)]

[3번 오더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거절 시 사유를 작성하세요. 단, 사유가 타당하지 않은 경우 자동 수락 됩니다.)]

뭐? 병약한 성좌에게 쉴 곳과 무릎을 빌려줘?

“야, 네가 어딜 봐서 병약한데?”

“아, 아직 회복이 덜 된 건지 갑자기 현기증이…….”

캐묻기가 무섭게 해령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크게 휘청거렸다.

이건 누가 봐도 연기잖아!

얼떨결에 부축을 해주긴 했는데 가까이에서 본 해령의 낯빛은 실제로 좋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까 입술도 조금 파래진 것 같고…….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던 건가?

그러고 보니 오늘도 내내 보이질 않다가 갑자기 나타났지.

어쩌면 해령은 진짜 몸이 안 좋은 걸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지. 아픈 걸 알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 내 방으로 가자.”

나는 해령을 부축한 채 턱 끝으로 내 방이 있는 편을 가리켰다.

뭐, 3번 오더도 수락해서 해령을 방에 잠시 눕혀두고 그사이 쑥 라테를 만들어서 불사의 탕에 가져다준 뒤에 잽싸게 돌아오면 되지!

그렇게 하면 오더도 두 배! 오더 보상도 두 배! 말 그대로 일석이조였다.

오랜만에 큰 그림을 그리며 기세 좋게 오더를 수락했는데……!

[3번 오더가 수락되었습니다. (오더 제한 시간 : 지금 이 순간)]

[※주의 : 수락한 시점으로부터 오더 수행이 지속되지 않거나 주문한 시간을 채우지 못할 시 실패.]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주문한 시간만큼 오더를 수행해야 한다는 건 해령에게 무릎을 빌려준 채로 30분을 보내야 한다는 거잖아?

그렇게 되면 중간에 불사의 탕에 쑥 라테를 배달하겠다는 나의 계획이 물거품이 된다.

“네 방으로 가면 되는 건가?”

“너……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해령은 어느샌가 반듯이 서서 제 발로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당했다! 그것도 제대로!

해령에게 속은 것에 머리를 싸매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데 불현듯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굳이 해령의 오더를 따를 필요는 없지?

실패하면 그만이잖아?

오더를 넣을 수 있는 게 해령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지! 됐다, 이거야!

“언제까지 거기 있을 생각이지?”

“나 이 오더 안…….”

나를 부르는 해령에게 오더를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려는데 미처 읽지 못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오더 완료 시 보상 : 근무 태만 면제권 (7일), 500만 골드, 특수 보상(오더 의뢰자의 만족도에 따라 차등 지급)]

근무 태만 7일 면제권에 500만 골드라고?

나 참,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코웃음을 치던 나는 당당하게 해령이 있는 방문 앞으로 다가가 서서 그를 똑바로 마주 봤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자본주의 미소를 장착한 프로 온천 사장의 모습으로.

* * *

해령은 내 무릎을 베고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오더 진행 현황 : 병약한 성좌에게 쉴 곳과 무릎을 빌려주기 (25분 30초/30분)]

25분 동안이나 같은 자세로 있었더니 죽을 맛이었다.

두고 봐라, 언젠가 이날의 복수를 하고 만다!

이를 바드득 갈다가 나는 무심코 해령을 내려다보았다.

몸이 안 좋긴 했나 보네.

이렇게 푹 자는 건 처음 봐.

햇살을 맞으며 곤히 잠든 새하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볕이 비친 그의 뺨이 유리처럼 빛났다.

방금 그건 뭐지?

꼭 비늘 같은…….

그 순간이었다.

목 뒤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뜨거워진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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