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회원님, 가만히 계시면
체손실 옵니다
뭐야? 갑자기 왜 정색까지 하고 그래?
평소에는 내 일에 하나도 관심 없는 것처럼 굴더니……. 괜히 긴장되게.
해령의 인상이 한 번도 날카롭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매서운 그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누가 울렸다고 했다가는 상대가 성좌라고 해도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잖아?
새삼스럽게 해령이 그만큼 대단한 힘을 가진 성좌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래도 도저히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령이 나를 이렇게 싸고돌 성격이 아닌데…….
이 와중에도 추궁하는 듯한 해령의 눈빛이 느껴졌다.
“아, 그래. 울었다! 울었어! 그래서 뭐? 누가 울린 것도 아니고 그냥 나 혼자 감상에 젖어서 운 거야.”
해령의 따가운 눈총에 못 이긴 나는 무심결에 진실을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해령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누가 울렸냐가 아닌 내가 울었다는 사실인 것 같았다.
내가 울었다는 게 확실해지자 그의 낯빛이 전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계속 하품한 거라고 발뺌할걸 그랬어.
왠지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불사의 탕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으니까 샤레니안이겠군. 널 울린 놈.”
해령이 화를 억누르기라도 하듯이 어금니를 깨문 채 내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내 말을 하나도 허투루 듣지 않은 해령의 표정이 곧 차가워졌다.
어떤 면에서는 해령이 운수보다 예리하다니까…….
샤레니안은 날 울린 게 아니라 울 때 같이 있었을 뿐인데, 곤란하네.
하지만 희미하게 스쳐 지나간 기억 속의 상대가 샤레니안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은 분명했다.
그래서 해령에게 시원하게 아니라고 답할 수 없었다.
몰래 뭘 먹다 걸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날 바라보던 해령이 이제 됐다는 듯 상체를 다시 세웠다. 그리곤 날 지나쳐 뚜벅뚜벅 걸어갔다.
내가 침묵을 유지한 게 그에게는 긍정의 신호로 여겨진 것 같았다.
“어딜 가려고?”
좋지 못한 예감을 느낀 나는 반사적으로 해령의 옷깃을 붙들어 잡았다.
그제야 앞만 보던 그의 고개가 움직여 내 쪽을 돌아봤다.
“샤레니안을 만나고 와야겠다.”
“갑자기 샤레니안을 왜 만나?”
당혹스러워하는 내게 해령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그걸 몰라서 묻나? 널 울렸다면서.”
아니, 그러니까 내가 샤레니안 때문에 운 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겁도 없이…….”
금방이라도 범람할 듯 넘실거리는 분노를 삼키듯 해령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온천에 들어와서 해령이 이토록 화가 난 걸 본 적이 있었던가?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해령이 까칠하긴 했어도 화를 낸다기보다는 틱틱거리는 정도에서 보통은 끝이 났으니까.
어쨌든 지금 해령을 말리지 않으면 온천에서 또 개싸움이 날 게 뻔해.
지금은 온천 사장으로서 내가 중재하고 나서야 할 시점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럴 때에…….
샤레니안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쑥 라테를 만들어서 가져다줘야 하는데…….
성격 같아서는 해령에게 용의 포효라도 날려 기절이라도 시키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빡빡한 마나 사정을 생각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혹시 모르니까 오더부터 수락해두자!
내가 수락하면 샤레니안도 취소는 못할 거 아니야?
기발한 생각을 해낸 나 자신을 칭찬하며 재빠르게 2번 오더를 수락했다.
[2번 오더가 수락되었습니다. (오더 제한 시간 : 00:59:58초)]
[※제한 시간을 초과하면 오더가 자동 취소 됩니다.]
아…….
제한 시간이 걸린 오더도 있는 거였어?
첫 오더에는 제한 시간 같은 거 없길래 당연히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오더 내용은 쑥 라테만 만들면 되기 때문에 온천표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렇담 만드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지.
문제는 해령의 화를 가라앉히는 건데…….
쑥 라테를 만드는 시간과 가져가는 것까지 계산해서 넉넉하게 20분 전까지는 끝을 봐야 했다.
“그런데 말이야. 해령, 내가 운 건데 왜 네가 화를 내는 걸까?”
“그건……!”
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묻자 해령의 바른 눈썹이 순간 사선으로 올라갔다.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그건?”
주객이 전도되자 나는 노골적으로 해령을 추문하기 시작했다.
“……가, 각인 때문이다.”
한 발 한 발 거리를 좁혀가며 압박해가자 진땀을 빼던 해령이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각인이 왜 나와?
각인에 나를 울리면 페널티를 받는다는 조항이라도 있나?
“각인이 왜?”
온천을 복구할 때 해령이 무리를 했던 것이 떠올라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나는 다소 심각하게 물었다.
“내가 각인한 널 울린다는 건 날 우습게 본다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아무래도 괜히 걱정했나 보다.
고작 본인의 명예에 흠이 간다는 게 이유였어? 어쩐지 나를 지나치게 위하는 것 같아서 이상하다 했지.
어떻게 보면 참 해령다운 구실이었다.
“그러니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그럼 충분히 설명한 것 같으니 나는 가던 길을 가도록 하지.”
예상대로 해령은 어떻게든 샤레니안을 손봐줄 생각인 것 같았다.
샤레니안도 만만치 않은 상대이니까 큰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혹여라도 이 일로 둘 사이가 나빠지기라도 한다면…….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성좌 ‘온천의 지배자’에게 죽빵을 맞고 “그간의 정을 봐서 참으려고 했는데 더는 안 되겠다, 우리 헤어져!”라며 울분을 토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원하는 바다”라며 “애착 때수건부터 향료 취향까지 너랑 맞는 게 하나도 없다”고 맞섭니다.]
[상처받은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좋은 온천이었다”며 입을 틀어막은 채 가련하게 눈물을 훔치면서 온천을 뛰쳐나갑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EX급 온천 성좌 모임에서 탈퇴합니다.]
‘안 돼애애애!’
샤레니안과 해령의 다툼을 시뮬레이션해보며 들여다본 처참한 결말에 나는 사색이 됐다.
손님이 다섯뿐인 온천의 사장에서 단골이 한 명 사라진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란 타격이었다.
이미 고정 수익인 온천 이용권 판매에서도 5분의 1인 3,000만 골드나 손실이 났고, 샤레니안 몫만큼의 오더량이 준다는 말도 됐다.
게다가 체력이 바닥 수준인 나에게 샤레니안의 특수 보상이 없다는 건 그야말로 체(력)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거면 몰라도 체손실은 못 참지!
어떻게 해서든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뭔가 없나?
분노해서 날뛰는 은색 뱀을 말릴 만한 그럴듯한 구실이…….
고심하던 중에 왼편 상단에 떠 있는 샤레니안의 오더창이 보였다.
[2번 오더 의뢰자 정보: 불사의 살인귀/오더 장소 : 불사의 탕]
[오더 내용 : 쑥 라테 한 잔]
그래, 저거다!
빠른 속도로 걸어가 해령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두 팔을 펼치자 나아갈 길을 잃어버린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날 바라봤다.
“아직도 더 할 말이 남았나?”
불만스럽게 묻는 해령에게 나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내가 할게!”
“뭐?”
“내가 한다고! 그 복수!”
“네가 무슨 수로 불사신을 상대한다는 거지?”
자신 있게 외쳤건만 해령은 내가 못 미더운 눈치였다.
주변에 듣는 귀가 없는지 살핀 나는 작당 모의를 하듯 그를 향해 은밀하게 속삭였다.
“암살 쑥 라테.”
이 한마디를 끝으로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이자 소름이 돋은 것처럼 해령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잔인한 짓을…….”
방금만 해도 샤레니안을 죽일 것처럼 달려들 기세더니 왜 암살 쑥 라테를 먹인다니까 오히려 안쓰러워하는 건데?
“이미 맛을 한 번 보았으니 입에도 대지 않으려고 할 거다.”
샤레니안이 쑥 라테를 시킨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을 보니 해령은 성좌들과의 대화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샤레니안이 쑥 라테 한 잔을 만들어달라고 오더를 넣어서 만들러 가는 참이었거든.”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성좌 ‘불사의 살인귀’에게 “전부터 의심스러웠던 건데 네 머리는 장신구냐”고 진지하게 묻습니다.]
역시나 해령은 듣고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 : ???]
샤레니안은 가만히 있다가 얻어맞았네.
그래도 해령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았다.
“그리고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게 있어. 내가 울 때 샤레니안이 옆에 있었던 건 맞지만 울리거나 한 건 아니야. 그냥 샤레니안을 치료해주고 있는데 낯선 기억이 떠올랐어.”
나는 혹시라도 나중에 다시 같은 일로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해령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듬성듬성 조각 난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왠지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나더라고. 꼭 이 온천에 들어오기 전부터 샤레니안을 알고 지냈던 것처럼.”
“당연히 그렇겠지.”
내 이야기를 들으면 해령도 의문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그는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널 2대 온천 사장으로 추천한 게 샤레니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