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잡았다
온천 손님의 첫 오더가 들어왔다고?
어떻게 이렇게 딱 맞춰서 일이 들어올 수 있지?
이 정도면 누가 내 속을 읽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건 어쩌면 시스템창의 짓일지도 몰라.
전에 억지로 쑥 라테를 먹이려고 해서 원한을 산 뒤로 틈만 나면 나를 골탕 먹이려고 했으니까 가능성은 충분했다.
약이 오르긴 했어도 막상 온천 사장이 되고 나서 처음 맡아보는 일이라 그런지 심장이 벌렁거렸다.
하지만 당장 오더를 받기에는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어.
오더를 실패하면 지난번처럼 환불 같은 페널티가 따를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냥 못 본 척 넘어가면 안 되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지나치려는데…….
[!!주의!! 적절한 사유 없이 오더를 수행하지 않으면 근무 태만으로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나무판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됐다.
이건 빼박 시스템 놈들의 소행이다.
사악한 시스템 놈들……!
고작 쑥 라테 한 번 먹이려고 했다고 사람을 이 정도로 못살게 굴어?
하지만 시스템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이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마땅한 힘이 없었다.
시스템 앞에서 약자인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무판을 마주 보고 섰다.
그래! 까짓거 못할 게 뭐 있어?
마실 거 달라고 하면 암살 쑥 라테 한 잔 말아서 따악 가져다주면 되는 거 아니겠어?
한 번 매운맛을 보면 성좌들이 알아서 피할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너무 좋은 생각이다! 빨리 확인하고 해치워버리자!
의지를 굳힌 난 주먹을 쥐며 나무판을 바라봤다.
[온천 손님의 첫 오더가 들어왔습니다. (……자세히 보기)]
그런데 오더는 어떻게 보는 거지?
다시 살펴보니 알림 메시지 옆에 자세히 보기 버튼이 있었다.
저 버튼을 누르면 오더 내용을 알 수 있는 건가?
난 망설일 것 없이 버튼을 눌렀다.
[1번 오더 의뢰자 정보: 불사의 살인귀/오더 장소 : 불사의 탕]
[오더 내용 : 새살이 솔솔(1개)과 주인의 손길]
[1번 오더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거절 시 사유를 작성하세요. 단, 사유가 타당하지 않은 경우 자동 수락 됩니다.)]
첫 오더 의뢰자는 샤레니안이었다.
오더 장소가 불사의 탕이라는 걸 보니 샤레니안은 아직 온천에 머무는 중인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야. 새살이 솔솔은 그렇다 쳐도 주인의 손길은 뭔데?’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설마 그 약속을 벌써 잊은 거냐”며 탑에서 불사검을 던졌을 때 뺨에 생긴 상처를 매만지며 아련한 눈빛을 보냅니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까 그때, 샤레니안의 상처도 치료해주기로 했었지.
샤레니안에게 쑥 라테를 만들어주기로 했을 때도 겸사겸사 약도 발라주겠다고 했었는데, 당시에 해령이 만들어준 돈가스에 눈이 멀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 상처는 일찍이 나았어야 하는……”이라고 말하다 누군가의 손에 입이 틀어막힌 채로 사라집니다.]
‘운수야? 무슨 일이야?’
갑자기 사라진 운수를 불렀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흑막 성좌가 운수를 납치한 건가?’
설마설마하며 불안해하고 있는 그때, 샤레니안의 검은빛이 도는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운수는 걱정하지 말라”며 “본인과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던 것뿐”이라면서 어색하게 웃습니다.]
술래잡기를 어떻게 하면 입이 틀어막힌 채로 사라지는 건데?
‘뭘 숨기고 있는 거냐? 샤레니안. 좋은 말로 할 때 부는 게 좋을걸.’
수 틀어지면 새살이 솔솔이 아니라 쑥 라테를 확 가져가버리려니까.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내가 주인한테 숨길 게 뭐가 있겠냐”면서 “그저 상처를 치료하고 싶었을 뿐”이라며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귀를 축 늘어트립니다.]
하긴 샤레니안이 뭘 숨기거나 할 성격은 아니지.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건 오더를 넣기 전부터 샤레니안과 했던 약속이었으니까…….
‘알겠어. 그럼 약을 만들어서 불사의 탕으로 가면 되는 거지?’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그렇다”며 다급히 불사의 탕으로 들어갑니다.]
이미 불사의 탕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니었나?
찝찝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운수가 갑자기 사라진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지만 내가 이 오더를 받아들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나는 오더 내용이 새겨진 나무판의 가장 아래에 적힌 진한 글씨로 눈을 돌렸다.
[오더 완료 시 보상 : 근무 태만 면제권 (7일), 특수 보상(오더 의뢰자의 만족도에 따라 차등 지급)]
오더를 완료했을 때 받을 수 있는 보상!
여기 적힌 내용대로라면 샤레니안에게 새살이 솔솔만 가져다주기만 해도 근무 태만 7일 면제권을 얻을 수가 있었다.
수습하기 곤란한 퀘스트가 생겼을 때 면제권을 쓰면 7일 동안은 근무 태만 페널티 때문에 온천 이용권을 환불할 일은 없어진다는 거지!
기한이 정해져 있는 게 아쉽긴 하지만 언감생심 이게 어디야. 급한 불 정도는 끌 수 있었다.
그럼 새살이 솔솔을 만들러 가볼까?
오랜만에 어르신도 뵐 생각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2층으로 올라가는데 약방에서 작은 생명체가 걸어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짤막하고 둥근 참외 같은 몸뚱어리에 윤기가 흐르는 보송한 털의 소유자! 영계였다.
“영계야, 약방에서 나오는 길이야?”
“그렇다. 삿된…… 아니, 곱슬머리에게 줄 약을 만들어 오는 참이다.”
영계의 손에는 새살이 솔솔로 보이는 약이 들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영계가 베카의 상처를 치료해주기로 했었지.
그런데…….
나는 비엔나소시지처럼 짧은 영계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조그만 손으로 약을 만드는 게 가능한가?
까치발을 하고 팔을 힘껏 뻗는다고 해도 키가 약 항아리까지 닿지 않아서 재료를 넣기도 힘들 것 같은데…….
“그 기분 나쁜 눈빛은 무엇이냐?”
아…… 느껴졌나?
눈치가 빠른 것도 해령과 닮았다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그 약을 받으면 베카가 좋아할 것 같아서.”
“큼큼! 그런가?”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베카가 좋아할 것 같다는 이야기에 영계의 ㅅ자 모양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영계는 베카가 마음에 든 걸지도?
영계랑 베카가 친구가 되다니! 나는 이 우정 찬성일세!
“그대도 약을 만들러 가는 건가?”
숨을 죽인 채 흐뭇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영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응, 새살이 솔솔이 필요해져서.”
“그럼 이걸 가져가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계가 자신의 품에 들고 있던 약통 중 하나를 내게 건넸다.
“나한테 주는 거야?”
“그래. 혹시나 몰라서 새살이 솔솔을 두 통 만들어뒀다.”
영계가 약통을 든 앙증맞은 손을 날 향해 뻗은 채 흔들었다.
자기 얼굴의 반만 한 약통이 짤막한 손에 걸쳐 있는 것이 위태로워 보여서 얼떨결에 약을 건네받았다.
이건 영계한테 받는 첫 선물?
그렇게 생각하니 평범한 새살이 솔솔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고마워. 영계야.”
가슴이 뭉클해진 나는 영계가 준 약통을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 쥐었다.
“흥, 딱히 곱슬머리와 화해하는 걸 도와줘서 주는 건 아니다.”
누가 뭐래? 그렇게 말하니까 꼭 그것 때문에 주는 것 같은데?
영계는 쑥스러운지 계속해서 툴툴대며 말을 이어갔다.
“네가 회복되지도 않은 몸으로 약을 만들다가 골골거리기라도 하면 해령 님이 무리하시니까. 그게 걱정되어서 주는 것이니 착각하지 마라.”
해령이 나 때문에 무리를 한다고?
“그럼 이 몸은 바빠서 이만.”
뭐라 묻기도 전에 영계는 작은 다리를 뽈뽈 움직여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해령이 무리했다는 건 온천을 복구시킨 걸 말하는 건가?
영계의 말을 듣고 보니 오늘 해령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긴 했다.
혹시 아직도 몸이 아픈 건 아니겠지?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주인을 기다리다가 목도 빠질 예정이니까 새살이 솔솔을 넉넉하게 챙겨 오라”며 넋을 놓고 탕 입구만 바라봅니다.]
‘간다, 가!’
하여간 다른 생각할 틈을 안 준다니까.
일단 영계한테 약을 얻은 덕분에 이제 발라주기만 하면 끝이니까 빨리 끝내자.
곧장 성좌들의 탕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간 나는 불사의 탕이라는 팻말이 붙은 입구로 발을 옮겼다.
안으로 깊이 들어가자 하얀 연기가 구름처럼 뭉게뭉게 둘러싸인 탕의 풍경이 보였다.
잠깐만, 그런데 마루 위에 널브러져 있는 저건…….
탕 맞은편에는 온천을 바라보며 휴식을 할 수 있는 마루가 널찍이 깔려 있었는데 그곳에 뭔가 쓰러져 있었다.
저 익숙한 형체는 분명…….
“샤레니안!”
놀란 나는 곧장 마루로 달려가 몸을 낮추고 앉아 샤레니안의 상태를 살폈다.
힘없이 눈을 감은 샤레니안에게 정신 차려보라며 흔들어대던 그때, 해령의 섬섬옥수와 달리 커다랗고 꽤나 거친 손이 내 팔목을 세차게 끌어당겼다.
날 가득 담은 샤레니안의 밤하늘같이 검은 눈동자 아래, 별처럼 찍힌 눈물점이 내 눈길을 붙들었다. 이내 그의 입매가 매력적인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잡았다, 박수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