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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79화 (79/190)
  • 79화

    그거 먹는 거 아니야!

    베카는 영계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놀랍게도 베카는 잡아먹으려던 것이 아니라 미안하단 말을 하기 위해 영계를 얼굴 가까이 데려온 것이었다.

    아니, 무슨 사과를 그렇게 살벌한 얼굴로 해?

    평소에도 베카는 영계를 한입 거리라고 부르며 종종 입맛을 다시기도 했기에 나의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뭐…… 뭐라고 했느냐?”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닌 듯 베카의 손에 뒷덜미를 잡힌 영계가 당혹스러움에 말을 더듬었다.

    “네게 소중한 알로 달걀 프라이를 해 먹으려고 했던 걸 사과한다고 말했다.”

    알이 아니라 여의주라니까!

    여전히 여의주를 알이라 생각하는 것 같긴 하지만 베카는 차분한 목소리로 거듭해서 영계에게 미안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래도 이 정도면 베카도 많이 노력한 거지.

    베카는 탑에서 쭉 혼자 지냈고 무엇보다 최종 보스라 사과 같은 건 해볼 일이 없었을 테니까.

    분명 이게 난생 첫 사과겠지.

    잘하고 있어! 베카!

    나는 첫걸음마를 떼는 아이를 응원하듯 떨리는 마음으로 베카를 지켜봤다.

    “사과를 하려고 했던 거였나?”

    얼떨떨해하는 영계를 향해 베카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을 알게 된 영계는 선명하게 이빨 자국이 난 베카의 손으로 슬며시 눈을 돌렸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자국이 난 곳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난 또 살기를 뿜으면서 겁박하니까 날 먹으려는 줄 알고. 내 오해였다. 나도 손을 문 건 사과하지.”

    영계도 베카를 문 게 미안한 모양이야.

    쑥스러운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두고 있던 영계가 베카를 향해 짤막하고 둥근 팔을 쓱 내밀며 말했다.

    “날 찾아오면 상처에 약을 발라주도록 하지. 약 항아리의 약은 효능이 좋으니까 아플 새도 없이 나을 것이다.”

    뭐야?

    베카를 향해 힘껏 뻗은 저 앙증맞고 뽀작한 팔은?

    화해의 악수 같은 거야?

    내가 영계의 작고 보송한 손에 꽂혀 있을 때, 제게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베카가 검지를 뻗어 영계에게로 가져갔다.

    “이 정도 상처는 딱히 아무렇지도 않다.”

    다정함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목소리와 달리 베카는 저보다 작은 영계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올렸다.

    베카가 화해의 악수를 하는 데 성공했어!

    악수를 나누는 영계와 베카는 수줍어하면서도 한동안 서로의 손을 잡은 상태를 유지했다.

    ‘잘못을 반성하고 악수를 하면서 화해하는 영계와 베카라니, 사랑스러워!’

    영계와 베카라면 껌뻑 죽는 내게는 손에 꼽을 정도로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성스러운 용과 악의 정점에 있는 마탑 보스가 함께하는 화합의 장이라니, 결코 섞일 수 없는 상극들의 만남”이라며 보고도 믿기 어려워합니다.]

    ‘감동을 깨지 말아줄래? 내 눈에는 그냥 귀여운 생명체들의 성장 스토리일 뿐이거든.’

    평소의 운수라면 둘을 감싸는 내 말에 재깍 반박해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이제는 반박하기도 지친 건가 생각하던 찰나, 운수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널 보면 볼수록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뜬금없기는.’

    평소에는 독심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 속을 읽어내면서 갑자기 내가 알기 어렵다니.

    운수가 종종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평소와 묘하게 달랐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러니까 더 재밌게 느껴지는 거겠지”라며 “덕분에 삶이 권태롭지 않아졌다”고 말합니다.]

    이 성좌 놈은 내가 장난감인 줄 아나?

    다르긴 뭐가 달라?

    누가 운수 아니랄까 봐 남의 인생을 유희로 취급한다고 생각하는 중에 무언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그건 운수의 시스템창이었다.

    운수의 시스템창, 희미하긴 하지만 노란빛을 띠고 있어.

    이상하다. 베카랑 해령의 시스템창 색은 확실하게 선명했는데.

    염라의 시스템창도 베카나 해령만큼 진하진 않았지만 더 채도가 높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운수가 제일 색이 옅은 것 같은데.

    어쩌면 시스템창의 색이나 농도에 따라 숨겨진 메시지가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뭘 숨기고 있는 건데?

    그 물음에 머릿속이 급속도로 복잡해졌다.

    일단 지금은 머리 굴리는 건 그만두자.

    머리에서 김이 새어 나오는 기분이야.

    그냥 단순하게 성좌들을 상징하는 색 같은 거겠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복잡한 생각을 떨쳐낸 나는 영계와 베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만하면 충분히 마음이 통한 것 같은데 이제 이건 좀 놓아주는 게 어떠냐?”

    영계가 저를 붙잡고 있는 손을 흘깃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아직 영계는 베카의 손에 뒷덜미를 붙들린 상태였다.

    “실례했다.”

    눈빛에 한결 살벌한 기운이 가신 베카는 순순히 영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쩌면 눈을 무섭게 떴던 건 사과하겠다는 다짐의 표현이었을지도.

    하여간 베카도 참 감정 표현에 서툴다니까.

    “치료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라. 그리고…….”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영계는 흐트러진 털을 정리하다 말고 말끝을 흐리며 베카를 올려다봤다.

    “그동안 삿된 것이라 불러서 미안했다.”

    그 말을 끝으로 영계는 달아나듯 짧은 보폭으로 부산스럽게 움직여 복도를 빠져나갔다.

    저 말을 하는 게 어색했던 모양이네. 귀여워라!

    약간의 소란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영계랑 베카 사이에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야.

    “우리 베카, 잘못한 걸 인정하고 사과하다니 대단해! 멋지다!”

    나는 멋지게 첫 사과를 해낸 베카에게 다가가 힘껏 머리를 쓸어줬다.

    내 손길에 크로와상 같은 베카의 곱슬머리가 헝클어졌다.

    하지만 베카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것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칭찬을 들은 게 쑥스러운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우긴 했지만.

    제 머리를 쓰다듬는 내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베카, 나 너한테 궁금한 게 생겼어. 그걸 물어봐도 될까?”

    머리카락을 쓸던 손을 멈추자 베카가 나를 올려다봤다.

    베카도 내 물음이 궁금한 눈치였다.

    “베카한테 소중한 게 뭔지 궁금해서. 그걸 알면 나도 실수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사실 뒷말은 핑계고 베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궁금했다.

    구해다 줄 수 있는 거면 내가 베카에게 선물해주고 싶기도 하고.

    나도 베카에게 도움받은 것도 있으니까.

    내 물음에 베카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러다가 얼굴에 구멍 나겠네.

    “대답하기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 그냥 한번 물어본 거니까.”

    불편하게 만든 건가 싶어 웃어넘기려는데 베카가 내게서 눈길을 거둬들였다.

    “……나는 답했다.”

    답했다고? 언제 답했는데?

    내 귀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베카가 날 쳐다본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미안한데 베카, 내가 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말해줄 수 없을까?”

    “기회는 한 번뿐이다.”

    이번만큼은 베카도 단호했다.

    진짜 궁금한데!

    “그럼 나는 아침 재료를 얻으러 약 항아리에게 다녀오겠다.”

    내 간절한 눈빛을 외면한 베카는 휑하니 약방으로 나가버렸다.

    잠깐, 그보다 아침을 베카한테 맡겨도 되는 걸까?

    지난번에 돈가스를 만든다고 나서서 온천 문짝을 날려 먹었었잖아.

    어르신, 제발 요리에 야심을 품은 금쪽이를 말려주세요!

    내 바람이 어르신에게 닿기를 바라며 고개를 돌린 곳에는 어디서 머리를 쥐어뜯기고 온 듯한 처참한 몰골의 내가 거울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일단 나부터 좀 씻자.

    내 얼굴을 고개를 돌려 외면한 나는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세면도구를 챙겨 걸음을 옮겼다.

    * * *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나는 최신식 드라이기로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통 한옥 같은 데 이래 봬도 없는 게 없단 말이야.

    현대식 인테리어로 된 비싸 보이는 화장실도 그렇고.

    꼭 한옥풍의 고급 호텔에 온 것 같달까?

    그래서인지,

    새삼 내가 이곳의 사장이라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그럴 만도 하지.

    온천 사장으로 각성하긴 했지만 지금껏 제대로 일한 적이 없었다.

    사실상 온천 일이라고는 온천수를 찾아낸 거랑 쑥 라테를 몇 번 만든 것이 전부였으니까.

    명색이 온천 사장인데 손님을 대접하긴 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미루고 있던 걱정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지금 내가 만들 수 있는 거라고는 약 몇 가지랑 슬라임 맛이 나는 암살 쑥 라테밖에 없는데.

    이러다 다시 근무 태만에 걸리는 건 아니려나?

    지난번 근무 태만 페널티 때문에 고생을 한 것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나보다 샤레니안의 장이 고생한 거지만.

    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

    꺼림칙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려던 그때였다.

    땡―

    쇠로 된 맑은 종 소리와 함께 나무판 같은 것이 눈앞에 떠올랐다.

    [온천 손님의 첫 오더가 들어왔습니다.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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