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상상도 못한 재료의 정체
온천에서 맞이한 제대로 된 첫 잠자리는 생각보다 쓸쓸하지 않았다.
착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밤새 누군가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내 머리를 쓸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혹시 함께 잠자리에 든 베카가 날 위로해준 걸까?
잠시 추측해보기도 했지만 나는 이내 이를 부정했다.
아니, 베카는 아니야.
잠결이지만 내 머리카락을 헤집는 기다란 손가락의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베카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컸어.
나는 베카의 앙증맞은 손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역시 꿈이겠지?
그 기분 좋은 손길에 이끌려 크고 포근한 품을 파고 들었다.
잠시 굳어 있는 듯싶던 그의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나의 뒷머리를 감쌌다.
나를 위로하는 손길의 주인이 누구일지 무척 궁금했지만 구태여 눈을 뜨지는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이대로 있고 싶어.
그 얼굴을 확인하면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한순간의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조심스러운 손길은 너무 다정하고 달콤해서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어느샌가 손길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은 그때.
“네 이놈! 무엄하도다!”
머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영계의 고함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으, 머리 울려.
찌잉―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떴을 때 나는 푹신한 이불 위에 홀로 대자로 뻗어 누워 있었고, 몇 밤 묵었다고 익숙한 감이 있는 온천 방의 천장이 보였다.
분명 내가 잠든 방이 맞는데…….
왜 내 방에서 영계가 화를 내고 있는 거지?
“내 석연치 않아도 계약자의 얼굴을 봐서 성스러운 온천에 발을 들이는 것을 허락해주었거늘, 감히 나를 모욕하다니!”
“목소리를 낮춰라. 한입 거리.”
[‘탑의 주인’이 살기를 내뿜습니다. 표적 ‘영계’는 살기에 30초 노출될 경우 상태 이상으로 1분간 채팅이 금지됩니다.]
사태 파악을 하기 위해 비몽사몽 한 상태로 몸을 일으키자 방으로 들어오는 미닫이문 앞에서 베카와 영계가 대치하고 있는 게 보였다.
바로 어젯밤에 그 난리를 피웠는데 아침부터 또 싸움이라니.
벌써부터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영계는 누가 봐도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지만 베카는 등을 보이고 서 있어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저 둘을 말려야겠어.
베카가 저렇게 살기를 뿜어내는 걸 보니 언제 온천 지붕을 날려버릴지 몰랐다.
“베카, 무슨 일이야?”
마음이 급해진 나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베카에게 다가갔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탑의 주인’이 살기를 거두어들입니다. 표적 ‘영계’가 살기와 상태 이상에서 벗어납니다. (남은 시간 : 3분 00초)]
살기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3분간 입이 묶인 영계는 답답하다는 듯이 바닥에 누워 항의하듯 몸부림을 쳤다.
영계가 안쓰럽긴 했지만 지금은 베카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결국 깬 건가?”
당연히 화나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나를 돌아보는 베카의 얼굴에서는 화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히 감정이 없어 보이는 딱딱한 얼굴이었지만, 날 바라보는 눈빛에서만큼은 걱정스러움이 오롯이 느껴졌다.
설마 영계에게 목소리를 낮추라고 말한 이유가 내가 잠에서 깰까 봐 걱정한 거였나?
하여튼 꼬맹이 주제에 은근히 생각이 깊다니까.
“이게 다 저 한입 거리 때문…….”
고마워할 새도 없이 무섭게 서늘해진 베카가 매서운 눈초리로 영계를 쏘아봤다.
[‘탑의 주인’이 살기를 내뿜…….]
“아니야!”
나는 시스템창이 다 나타나기도 전에 베카의 조약돌 같은 두 손을 다급하게 감싸 쥐었다.
“시끄러워서 깬 게 아니라 마침 딱 개운하게 일어난 참이었어. 베카가 같이 있어준 덕분에 푹 잤거든.”
[……으려다 맙니다.]
휴, 다행히 위기는 넘겼나?
시스템창 문구를 확인하며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데,
“하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편안하게 자긴 했지. 나랑 함께 자서 그런 거였나?”
띠링!
[‘탑의 주인’의 행복감이 급속도로 상승합니다.]
또 하나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도통 웃는 일이 없던 베카가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게다가 양어깨가 올라갈 정도로 흐뭇해하고 있어!
귀여워!
베카의 귀여움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그때였다.
전보다 선명한 빨간색의 시스템창이 연이어 시야를 가득 메웠다.
[!!‘탑의 주인’의 조련사가 될 조건을 모두 충족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탑의 주인이면 베카잖아.
그런데 조련사라니!
베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나는 빛을 받은 유리구슬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베카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마치 당근 주기만을 기다리는 토끼처럼 얌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완 토끼……?
그렇다고 해도 내가 언제 조련사의 조건을 충족했다는 거야?
내가 한 거라고는 온천의 지붕을 지키기 위해서 베카를 달랜 것밖에 없는데?
뭐, 시스템창이 좀 수상쩍긴 해도 못 본 척 넘기면 그만이지!
퀘스트가 아닌 것이 어디냐며 대수롭지 않게 창을 보고 넘기려는 그때였다.
[!!조련사 자격을 충족하였으므로 히든 퀘스트 ‘탑의 주인 길들이기(EX)’가 열립니다. 퀘스트 진행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시스템창은 독심술도 가능한 거였냐?’
제일 바라지 않던 퀘스트창이 나타났다.
그것도 EX급 히든 퀘스트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거절 버튼이 있다는 거였다.
염라의 EX급 히든 퀘스트는 죽고 시작했지.
그리고 그 저승의 염라대왕도 상대하기 꺼리는 것이 베카였다.
그런 베카의 EX급 히든 퀘스트라니…….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게 분명해!
무조건 거절! 백번을 물어봐도 거절이다!
“왜 대답이 없는 거지?”
거절하기로 굳게 마음먹고 시스템창의 물음에 답하려는데 베카가 슬며시 내 옷소매를 잡으며 다가왔다.
맞아! 나 베카랑 대화 중이었지?
시스템창에 한눈이 팔려서 베카에게 답하는 걸 잊고 있었다.
“그럼! 어젯밤 내내 베카가 옆에 있어서 너무 든든하고 좋았어.”
“……그렇군.”
재촉할 때는 언제고, 막상 대답을 듣고 나니 베카는 조용히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이 틈에 퀘스트를 거절하는 거야!
모두의 시선이 내게서 멀어져 있는 때를 이용해 손을 뻗는데,
[특수 스탯 ‘탑의 주인’의 XX가 2000 상승합니다.]
익숙한 문자 ‘XX’가 보였다.
특수 스탯 XX가 상승?
해령 때도 비슷한 장면을 보았던 것 같은데…….
기억이 떠오른 순간, 등골로 서늘한 예감이 스쳤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누가 아니라고 해줘!
내 간절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위험을 알리는 경고등처럼 새빨간 시스템창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특수 스탯 ‘탑의 주인’의 XX가 기준치를 초과했으므로 퀘스트가 자동 진행 됩니다.]
……뭐가 자동 진행 돼?
[히든 퀘스트 ‘탑의 주인 길들이기(EX)’를 수락합니다.]
“악! 안 돼!”
대체 XX가 뭔데? 해령 때부터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나랑 원수라도 졌어?
“왜 그러지?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건가?”
안 그래도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목놓아 소리를 지르는 내 모습에 베카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나를 향해 심각하게 물어왔다.
베카가 보기에도 내 몰골이 문제가 있어 보인 모양이었다.
“자, 잠깐 머리 아플 일이 좀 있어서. 이제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베카.”
이성을 되찾은 난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며 놀란 베카를 다독였다.
어떻게든 평정심을 찾아보려는데 감히 그럴 수 없다는 듯 시스템창이 다시 떠올랐다.
[히든 퀘스트 ‘탑의 주인 길들이기(EX)’는 돌발 퀘스트입니다.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히든 퀘스트를 수행하세요.]
시스템의 노력도 참 가상했다.
매번 이렇게 창의적인 방법으로 뒤통수를 치고 말이야.
샤레니안이 왜 시스템창을 적으로 두지 말라고 했는지 이제는 조금 알겠어.
시스템창은 남을 괴롭히는 데에 진심인, 악질 중에서도 악질인 거야!
그게 아니고서는 죽다 살아난 사람에게 이렇게 지독하게 굴 수가 없었다.
어쨌든 당장 퀘스트를 수행해야 한다는 건 아니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눈앞에 있는 상황부터 정리하자.
“그런데 영계는 왜 화가 난 거야? 베카, 어제 싸우지 않기로 나랑 약속한 것 같은데.”
“싸우려고 한 게 아니다. 나는 네게 아침으로 달걀 프라이를 해주고 싶어서 한입 거리에게 재료를 달라고 말했을 뿐이다.”
내가 조곤조곤 타이르자 베카가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 와중에 한입 거리라고 부르는 건 포기하지 않네.
뭐, 영계도 베카를 종종 삿된 것이라 부르니까 피차일반인가?
“영계한테 뭘 달라고 했는데?”
“달걀.”
베카는 당당하게 영계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영계의 여의주가 있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