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76화 (76/190)
  • 76화

    비밀스러운 동침

    “베카, 너였구나?”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쥐고 있던 주먹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흰 우유처럼 뽀얗고 보송한 얼굴은 베카였다.

    그런데…… 베카라고 하기에는 그림자가 너무 크지 않았나?

    잠깐이긴 했지만 미닫이문에 비친 그림자는 장성한 성인 남성의 형체만큼이나 컸다.

    물론 그림자니까 조금 길게 보인 걸 수도 있지.

    근래에 일이 워낙 많았으니 피곤해서 잘못 봤을 수도 있고.

    “혹시 내가 놀라게 한 건가?”

    눈앞의 베카는 언제나 다람쥐처럼 작은 아이였다.

    얼굴을 빼꼼 내민 채 내 안색을 살피는 베카의 낯빛에 미안한 기색이 어렸다.

    “티 났어?”

    민망해진 나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내 물음에 베카는 작은 얼굴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털을 세운 작은 고슴도치 같았다.”

    털을 세운 고슴도치라.

    예민해져서 잔뜩 경계를 한 상태였으니까 베카에게는 고슴도치처럼 보였을 수도 있지.

    지난번에 해령을 보고 은색 뱀이라고 한 것에 이어서 이번엔 나를 고슴도치라고 표현한 걸 보면 베카는 동물을 참 좋아하나 보다.

    토마토에 고슴도치까지, 나 오늘만 해도 별명이 몇 개가 생긴 거야?

    “그런데 베카는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야?”

    “내가 여기 온 이유는.”

    혹시 뭔가 필요한 게 있나 싶어 물은 건데 도리어 베카는 쉽게 답하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그러더니 자기 머리보다 큰 베개를 품에 안고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내게로 눈을 돌렸다.

    “혼자 잠들기 무서울 것 같아서 왔다.”

    베카는 어르신하고 자기로 한 거 아니었나?

    “어르신은?”

    “할아범은 항아리가 되어버렸다.”

    아, 주무실 때는 항아리 상태로 잠드시는구나.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베카에게 온천은 아직 낯선 공간일 테니까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지.

    약방은 제대로 누울 공간도 마련되어 있지 않고.

    “그랬겠다. 미리 신경 써주지 못해서 미안해, 베카. 근데 나도 아직 온천에 익숙하지 않아서 여분의 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

    해령이나 영계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했지만 이미 자러 들어간 건지 어둠이 드리운 온천은 고요했다.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베카만 괜찮다면 누나랑 잘까? 같이 자면 베카도 하나도 무섭지 않을걸?”

    나 역시 흑막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혼자 자기 무서웠는데 잘된 일이었다.

    “내가 아니라 네가.”

    “응?”

    “뭐, 상관없나? 그럼 실례하겠다.”

    할 말이 더 남은 것처럼 보였지만 베카는 말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작은 발로 뽀작뽀작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여전히 솜털 같은 두 손으로 베개를 꼭 껴안은 채 말이다.

    귀여워.

    너무 귀여워서 움직이는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아.

    베개와 문에 가려 있어서 몰랐는데 베카는 남색 온천복을 입고 있었다.

    “그 옷 누가 준 거야?”

    “약 할아범이 갈아입으라고 줬다. 여분의 옷도 챙겨주고 오렌지 주스도 줬다.”

    어르신이 챙겨준 거였구나.

    피부가 흰 베카에게는 남색 온천복도 잘 어울렸다.

    게다가 유아용 기장이 딱 맞아서 더 귀여워!

    그 시간이 즐거웠던 건지 걸음을 멈추고 서서 어르신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던 베카의 표정이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주스를 다 마시진 못했지만…….”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온천을 나가버리겠다고 했을 때 베카는 오렌지 주스를 먹고 있었지.

    아마도 내 말에 충격을 받아서 주스를 마시다 만 것 같았다.

    내가 온천을 나가는 게 먹을 것도 마다할 정도의 일이었다는 건가?

    숨 쉬는 것만큼이나 먹는 걸 중요시하는 내게 베카의 행동은 큰 감동을 안겨다 줬다.

    역시 내가 너무 매몰차게 굴었나?

    “미안하다.”

    마음이 약해지려는 찰나에 베카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내게 사과를 해왔다.

    “은색 뱀과 다툰 것 말이다. 그게 너를 화나게 할 줄은 몰랐다.”

    베카가 사과를 할 줄은 몰랐다.

    비록 여전히 해령을 은색 뱀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평소에도 의젓한 편이었지만 외형만 보면 베카는 사과보다는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더 어울렸다.

    하지만 베카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웠다.

    먼저 사과도 할 줄 알고 대견해!

    자식이 바르게 자라는 걸 보면서 기뻐하는 부모의 마음이란 게 이런 걸까?

    나는 어느새 엄마의 마음이 되어 베카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은색 뱀과 싸우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그러니까 온천을 떠나지 마.”

    베카가 식빵 같은 손으로 내 옷깃을 쥐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베카에게는 내 말이 무섭게 들렸을 수도 있단 걸 떠올렸다.

    그 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져서 나는 베카를 품에 덥썩 안았다.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베카가 방금 한 약속만 잘 지켜준다면 나도 온천을 나간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너무 세게 말해서 미안해.”

    계속해서 가슴을 졸이고 있었던 건지 베카의 심장이 크고 빠르게 뛰었다.

    나는 그런 베카를 달래듯 손으로 등을 다독여줬다.

    심장박동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천천히 달래줄 생각이었다.

    진정이 되었는지 내 품을 벗어난 베카의 볼이 발그레해져 있었다.

    볼이 빨간 게 꼭 복숭아 같네.

    “베카, 피곤하지? 이제 누울까?”

    베카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진짜 기계였다면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은 움직임이었다.

    우리 베카, 몸이 제대로 안 움직일 정도면 많이 피곤했나 보네.

    그럴 만도 하지. 날 대신해서 지옥귀도 상대하고, 헌터 협회의 공격까지 참아내느라 애를 썼을 테니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니 벌써 1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어린이들은 벌써 잠들었어야 할 시간인데.

    지금이라도 얼른 자게 해주자.

    그런데 막상 베카를 재우려고 보니 내어줄 여분의 이부자리랑 이불이 없었다.

    다행히 베개는 베카가 챙겨온 것 같으니까 문제없나?

    “베카는 여기서 자자.”

    나는 이부자리의 한쪽으로 몸을 옮겨서 베카가 누울 자리를 마련했다.

    베카는 작으니까 이부자리 하나만 있어도 넉넉하지!

    여기 누우라며 손으로 이불 위를 톡톡 두드리자 베카가 그대로 얼어붙은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설마 몸이 굳어버린 거야?

    물론 너무 피곤하면 어린이들은 그럴 수도 있지.

    “베카, 그럼 내가 안아서 눕혀줄까?”

    아예 들어 옮겨줄 생각으로 두 팔을 활짝 펼쳐 보이자 베카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가서 눕겠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는데…….

    어쩐지 훌쩍 커버린 자식을 본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자, 그럼 이리 와.”

    대답 대신 마른침을 삼킨 베카가 내 곁에 베개를 놓고 바르게 앉았다.

    베카는 생각보다 더 낯선 환경을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얼른 누워야 잠을 자지. 난 벌써 누웠어.”

    나는 긴장된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어서 베카보다 먼저 벌러덩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베카도 어서 꿈나라로 가야지?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자야 되는 거야.”

    “……차라리 어린이였으면 좋았겠군.”

    작게 뭐라고 혼잣말을 하던 베카가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나는 바깥쪽을 보고 누운 베카에게 이불을 덮어줬다.

    “오늘 날 찾으러 와줘서 고마워. 잘 자, 베카.”

    베카에게 굿 나잇 인사를 전하고 나자 참았던 잠이 쏟아졌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나도 꽤나 개고생을 했지.

    온천까지 하고 나와서인지 몸이 마시멜로가 된 기분이야.

    베카가 잠드는 걸 보고 잘 생각이었지만 베개에 머리를 대자 눈꺼풀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지면서 피로에 젖은 몸이 녹아내렸다.

    베카만큼이나 귀엽게 뒷목을 조금 덮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그게 내가 잠들기 전에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 * *

    “살려줘…….”

    악몽을 꾸는 듯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수온이 누군가의 품을 파고 들어갔다.

    “이럴 줄 알았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이 몸을 떠는 수온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녀를 품고도 남을 만큼 널따란 품, 가운 아래로도 근육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조각상 같은 몸.

    ‘약 할아범에게서 가운을 받아두길 잘했군.’

    그건 더는 어린아이의 품이 아니었다.

    창으로 커다란 보름달이 드리웠다.

    새어 들어온 달빛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날카로운 이목구비.

    초승달을 쏟아놓은 듯한 흑색의 곱슬머리.

    어미의 품을 파고드는 새끼 고양이처럼 안겨오는 수온을 곤란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적안의 남자는 베카였다.

    장성한 모습의 그가 큰 손으로 아이를 달래듯 등을 두드려주자 수온은 안심한 듯 이내 평온함을 되찾았다.

    “더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수온을 바라보는 베카의 눈빛은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애틋했다.

    얼마 안 가 무심함으로 일관하던 그의 입가가 잔잔한 미소를 그려냈다.

    “이제는 너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되어버렸으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