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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74화 (74/190)

74화

욕쟁이 토마토

“둘이 계속 싸우면 나 온천 사장이고 뭐고 확 나가버린다?”

나는 해령과 베카에게 크게 엄포를 놓고는 탕을 빠져나왔다.

[‘탑의 주인’이 내가 온천을 떠나버린다는 말에 오렌지 주스 잔을 떨어뜨리며 절망에 빠집니다.]

[‘탑의 주인’의 입에 묻은 주스를 약 항아리가 손수 닦아줍니다.]

이게 주스 잔을 떨어뜨릴 정도로 충격을 받을 일이었나?

그냥 겁을 줘서 싸움을 말릴 생각이었는데 베카가 이렇게나 타격을 받을 줄은 몰랐다.

하긴 온천이 없으면 베카와 나의 계약관계도 끊기는 거니까.

베카에게는 충격적이었을지도 몰라.

의도하지 않게 베카에게 상처를 준 게 아닌가 잠깐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마음이 약해지면 안 돼.

지금은 어르신이 돌봐주고 계시기도 하니까.

우리 아기 금쪽이, 잘 달래주실 거라고 믿어요! 어르신!

해령과 베카가 온천에서 함께 지내는 이상 싸우는 일이 생겨서 좋을 게 없었다.

다른 성좌들에게도 피해가 되고 말이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건지 운수가 온천에 쳐놓은 보호 결계가 보였다.

미래를 점치는 운수가 결계를 칠 정도면 실제로 둘의 싸움으로 온천이 날아갈 가능성도 낮지 않다는 말이 됐다.

이건 주변에 피해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 이참에 확실히 경고해서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 편이 좋겠어.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합니다.]

의외로 이번 건은 해령에게도 효과가 좋았다.

해령도 내가 온천을 나가겠다고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으니까.

베카랑 같은 이유는 아닌 것 같지만 입을 막는 데는 성공했으니까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난 분명히 말했어!’

마지막으로 내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해서 밝힌 난 잠잠해진 둘을 뒤로하고 2층의 내가 묵고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온천 주인이 온천을 비우고 어딜 나간다는 거냐”며 “계약 파기 시 죽음이라는 조항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오호라? 이걸로 협박을 하시겠다?

누가 겁먹을 줄 알고?

‘누가 계약 파기한대? 온천에서 나가버린다고 했지! 그러면 안 된다는 조항 있어?’

다시 한 번 시스템창에 침묵이 흘렀다.

‘누구 할 말 있는 사람?’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영계와 온천의 성좌들에게 온천 비상 대책 회의를 소집합니다.]

[‘탑의 주인’이 조용히 동참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조항을 딱 하나만 추가하자”며 협상을 시도합니다.]

[‘탑의 주인’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아련한 눈빛을 보냅니다.]

이럴 때 보면 또 둘이 쿵짝은 잘 맞다니까.

조금 전까지 온천을 통째로 날려버릴 것처럼 싸웠다고는 믿기지 않는 단합력이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잘 지내면 좀 좋아?

앞으로는 그렇게 되자는 의미에서 베카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응, 안 해.’

단호한 대답에 좌절에 빠진 해령과 베카의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렸다.

누굴 바보로 아나?

내 발목을 잡는 조항을 걸 게 뻔한데 거절하는 게 당연하지.

해령에게 크게 한 방을 먹인 것에 통쾌하게 웃으며 나는 방 안을 돌아봤다.

방의 한편에 잘 관리된 이부자리가 보였다.

누군지 몰라도 내가 없는 동안 방을 관리해준 것 같았다.

나중에 영계에게 한 번 물어봐야지.

내가 없을 때 온천의 자잘한 관리는 영계가 하는 것 같았으니까.

영계가 정리해준 거라면 고맙다는 의미에서 부드러워 보이는 털을 쓰다듬어주자!

인사를 가장해서 사심을 채울 생각에 즐거워하던 난 지체할 것 없이 푹신한 이불에 대자로 뻗어 누웠다.

이불에 머리를 대니 오늘 있었던 일이 영화의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 정말 정신없는 하루였네.

박시우랑 같이 지옥귀를 상대하고, 베카의 도움을 받아서 균열도 막고, 생사재판에서 승소하고…….

도저히 하루 안에 다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저승에서 있었던 일을 아득하게 떠올리던 나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나…….

EX급 히든 퀘스트를 완료해서 염라의 각인도 얻었지!

살아난 뒤에도 사건의 연속이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해령의 각인은 지금 내 몸을 지키는 전부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큰 역할을 해주고 있다.

거기다 E급 헌터인 내가 몬스터를 상대할 때도 꼭 필요하고.

온천 사장의 소임을 다하려면 없어서는 안 될 정도지.

나는 온천 사장이 되고 나서 수행해온 퀘스트들을 되짚어봤다.

뭔가 많이 하긴 했는데 할 줄 아는 거라곤 약 몇 가지를 만드는 것밖에 없는 거 실화인가?

쑥 라테도 그렇고 바나나 우유도 그렇고, 생각보다 온천 사장의 길은 내게 가혹하고도 험난하게 느껴졌다.

아예 약이나 향료를 만드는 걸로 방향을 트는 것도 방법이긴 한데…….

온천 사장의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으면 근무 태만에 걸려버리는 게 문제였다.

환불할 바에는 차라리 성좌들에게 쑥 라테를 먹이자.

어차피 나만 안 먹으면 돼!

그럼 이제 여유롭게 염라의 각인을 살펴볼까?

나는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고쳐 누웠다.

염라의 각인에는 해령의 각인처럼 내가 온천 사장으로 살아가는 데 유용하게 쓰일 부분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염라의 각인은 어떻게 쓰는 거지?

해령의 각인은 부채를 불러내기만 하면 발동이 됐는데, 염라의 각인을 발현하는 법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염라의 각인이니까 저승에 가야만 써지는 거 아니야?

저승의 눈은 저승으로 가는 문을 여닫는 용도라고 했으니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서 ‘열려라! 참깨!’라고 외치면 저승의 문이 열리면서 각인이 발동한다든가?

하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

[성물 ‘저승의 눈’ 1단계 스킬 ‘저승의 문 개방’이 열립니다.]

[성물 ‘저승의 눈(EX)’이 저승의 문을 개방합니다.]

저승의 균열을 닫았을 때처럼 왼손에 눈의 형상이 나타나더니 감았던 눈을 떴다.

그 안으로 붉은색 눈동자가 드러나자 이부자리 바로 옆에 저승으로 통하는 포털이 열렸다.

그리고 포털이 열리는 순간,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저건 염라잖아?

염라는 서랍장이 천장 끝까지 빽빽하게 채워진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들고 있었다.

이거 진짜 되는 거였어?

심장을 파고드는 것 같은 날카로운 적안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또다시 황천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황급히 저승의 눈을 포털 쪽으로 들이밀었다.

“닫혀라, 참깨.”

“‘닫혀라, 참깨’가 아니라 ‘봉쇄’다.”

듣고 있었냐?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는데 서류를 내려놓은 염라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1단계 스킬 ‘저승의 문 개방’은 개방이라고 외쳐야만 열려야 하는 거 아냐?

대체 열려라! 참깨가 왜 통한 건데?

성물 이거 순 자기 멋대로 아니야?

속으로 이불킥을 수백 번은 하고 있는데 염라의 따가운 눈빛이 느껴졌다.

하지만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린 나는 차마 그 시선을 받아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봉쇄.”

파도처럼 수치심이 밀려온 나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주문을 외웠다.

[성물 ‘저승의 눈(EX)’ 1단계 스킬 ‘봉쇄’가 개방됩니다.]

[성물 ‘저승의 눈(EX)’이 저승의 문을 봉쇄합니다.]

균열을 닫았을 때처럼 눈이 감기는 형상과 함께 염라의 집무실과 이어진 포털이 닫혔다.

하필 염라 맞은편에서 문이 열릴 게 뭐람?

이건 성물의 장난이 분명했다.

원망스러운 눈으로 왼손에 감겨 있는 저승의 눈을 흘겨보던 나는 탁상에 있는 거울로 눈을 돌렸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염라와 같은 적안을 하고 있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서류를 보려다 말고 “방금 건 웃기려고 한 거냐”며 진지하게 묻습니다.]

설마 내가 웃기려고 저승의 문까지 열었을까?

‘네가 적적할까 봐 시험 삼아 문 열어보는 김에 한 번 들여다봤지.’

최대한 자연스럽게 넘어가보자.

진짜 내가 의도한 행동인 것처럼!

[성좌 ‘저승의 염라’가 “난 또 얼굴이 너무 빨개서 토마토가 온 줄 알았다”며 조용히 입가를 올려 웃습니다.]

시스템창을 보는 순간 직감이 왔다.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넘기긴 틀린 것 같다는.

내 쪽팔림이 거기까지 전해진 거구나.

어쩐지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뜨겁다 했다.

‘그래, 마음껏 웃어라. 다음번에 온천에 오면 내가 직접 만든 쑥 라테를 대접해줄 테니까.’

분명 온천의 다른 성좌들이었다면 벌벌 떨게 만들 수 있는 수준의 협박이었는데…….

[성좌 ‘저승의 염라’가 “기대하겠다”며 “다음에 올 때는 쑥 라테와 함께 토마토도 들고 오라”고 합니다.]

어쭈, 이것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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