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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73화 (73/190)
  • 73화

    멈춰!

    딱히 시스템창 색깔을 신경 써서 본 적이 없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긴 한데…….

    아리송한 표정으로 베카의 시스템창을 바라보고 있는 그때, 그 위에 또다시 빨간색 시스템창이 겹쳐졌다.

    [‘탑의 주인’이 “그런데 탕에 왜 은색 뱀이 함께 있는 거냐”고 묻습니다.]

    탕에 함께 있는 은색 뱀이라면…….

    나는 곁에 있는 해령을 흘깃 곁눈질했다.

    성좌의 부채 힘의 근원이 용이라고 했고 영계가 은색 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해령이 용이라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베카가 영계랑 해령을 착각한 건가?

    둘은 늘 붙어 있으니 베카가 혼동할 만도 했다.

    가만 보면 베카도 참 대단해. 은빛 용을 한순간에 은색 뱀으로 만들어버리다니.

    뭐, 탑에서만 지냈으니까 용을 뱀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지.

    아무래도 베카는 나와 해령이 함께 탕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곤란하네.

    베카도 같이 오고 싶다는 걸 겨우 달래놓고 온 건데…….

    ……그냥 대충 둘러대자!

    ‘해령은 잠깐 향료를 타러 온 거야.’

    베카가 상황을 알아버린 이상 더 큰 소란이 일어나기 전에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해령을 내보낼 생각이었는데,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삿된 꼬맹이가 누굴 보고 은색 뱀이라고 하는 거냐”며 이를 바드득 갑니다.]

    은색 뱀이라고 불린 것에 화가 난 건지 해령은 화르륵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진짜 은색 뱀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데?

    알고 보면 해령이 진짜 용인 거 아냐?

    [‘탑의 주인’이 짧게 실소를 터뜨립니다.]

    베카의 웃음은 해령에게 아주 좋은 촉진제가 됐다.

    불난 데 부채질한다는 게 이런 거지?

    베카가 의도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해령은 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계속 저렇게 타오르다가는 은색 뱀도 장어구이가 되어버리겠어.

    바싹 열이 오른 해령을 보니 일이 조용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수습하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는데 연이어 파란색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난 향료를 타러 탕에 들어온 게 아니다”라며 나와 거리를 좁혀오더니 붙어 앉습니다.]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건데?”

    몬스터라도 본 것처럼 내 얼굴을 밀어젖힐 땐 언제고…….

    어느새 한껏 가까워진 해령의 새하얀 얼굴을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내 시선이 따갑지도 않은지 태연한 표정의 그는 갑갑하다는 듯 바다색 도포의 옷고름을 기다란 손으로 쥐고는 매듭을 풀었다.

    왜 갑자기 앞섬을 풀어헤치고 난리야?

    옷고름이 풀어지면서 반듯하게 고정되어 있던 옷매무새가 흐트러졌다.

    벌어진 천 사이로 해령의 다부진 골격이 드러났다.

    여리여리한 외모라서 몸은 종이 인형일 줄 알았는데.

    언뜻 본 게 다인데도 해령은 의외로 근육질이었다.

    솔직히 근손실은 용납할 수 없다며 사시사철 웃통을 까고 파이팅 넘치게 팔 굽혀 펴기를 하는 박시우의 몸을 매일같이 봐와서 다른 남자의 몸을 봐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탕 안에 퍼진 진한 향기에 취하기라도 한 건지 해령이 의식되는 바람에 나는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 다른 내 반응을 눈치챈 듯 작게 웃던 해령의 입술이 내 귓가로 가까워졌다.

    “어지러워서.”

    나긋하게 탕을 울리는 목소리.

    온천의 열기 때문인지 해령의 따끈한 숨결이 귀를 스쳤다.

    온몸에 털이 오소소 돋는 걸 느낀 나는 손으로 귀를 감쌌다.

    아주 대놓고 날 놀리겠다는 거지?

    이렇게 보니까 능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베카가 해령을 뱀이라고 부른 이유가 이런 모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천하의 박수온이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학창시절 갖은 괴롭힘에도 불굴의 의지 하나만으로 이겨낸 내가 아니던가.

    “야, 너!”

    족욕이고 뭐고 해령에게 잔뜩 약이 올라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고는 작정하고 달려들려는 순간, 해령이 쓰러지듯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건 또 뭐지?

    “당장 못 일어나?”

    난 씩씩대며 먼지를 털어내듯이 해령이 기대어 있는 어깨를 움직였다.

    하지만 본드라도 붙인 것처럼 그는 꿋꿋이 내게 머리를 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지럽다니까. 누구 때문에 온천을 빨리 복구시키느라 무리했거든.”

    온천을 복구하느라 무리했다고?

    그러고 보니 어르신에게 온천은 해령의 몸이나 다름없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럼 분명히 다시 온천을 열 때도 해령의 힘이 들어갔을 텐데…….

    빨리 열수록 무리하게 되는 거였나?

    베카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어서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온천을 복구하는 걸 서둘렀을 때 해령의 안색이 창백했던 건가?

    어쩐지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기침을 하는 게 이상하다고 했어.

    “정말……이야? 왜 진작에 말하지 않은 거야?”

    난 어깨에 기대어 있는 해령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지럽다는 말이 그냥 한 말은 아닌 건지 눈을 감은 그의 앞머리가 젖어 있었다.

    식은땀에 머리카락이 젖을 정도로 몸이 안 좋은 거였어?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는 해령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 때문에 해령이 몸에 지장이 갈 정도로 무리했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마음이 쓰였다.

    따뜻하긴 하지만 열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손을 거둬들이려는데 해령이 내 손목을 감아쥐어 다시 제 이마로 가져갔다.

    “시원하다.”

    뺨이 붉게 상기된 채 눈을 감은 해령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이마에 맺힌 이슬이 해령의 뺨을 타고 내려와 구슬처럼 반짝거렸다.

    어딜, 은근슬쩍 다른 말로 돌리려고?

    누구든 홀릴 법한 미남계 작전이긴 했으나 내 포위망을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말 돌릴 생각 하지 마. 왜 그런 거야? 알았으면 무리시키지 않았을 텐데…….”

    “내가 원해서 한 일이다.”

    가지런히 내려가 있던 기다란 속눈썹이 위로 올라가자 그 아래로 선명한 바다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일부러 무리했다는 거야?”

    해령이 부지런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자기 몸을 괴롭히는 걸 즐기는 취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냐?”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이 읽힌 건지 해령이 내 속이 훤히 보인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 건드렸다.

    “네가 당장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길래.”

    해령은 내게 기댄 자세를 유지하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내가 베카 때문에 불안해하는 걸 알았구나.

    그래서 무리하면서까지 온천을 복구하는 걸 서둘렀다는 거지?

    해령이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해주는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못생긴 얼굴을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

    아놔, 아무도 나 말리지 마라.

    내 감동은 해령의 말에 쿠크X스처럼 처참히 부서져 진작에 가루가 되었다.

    그럼 그렇지.

    해령이 그 정도로 나한테 관심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야, 머리 치워.”

    고마운 마음은 오래전에 식어버린 나는 노골적으로 해령의 머리를 밀어버렸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의 작은 머리가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버틸 힘이 남아 있으면 아프다는 것도 거짓말 아니야?

    “싫다. 어쨌든 난 무리해서 피곤한 상태니까 어깨를 좀 빌려야겠다.”

    산 넘어 산이라고 해령은 머리를 치울 생각은 않고 배 째라는 식으로 나왔다.

    “누가 어깨 빌려준댔…….”

    해령과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 그때,

    경고등처럼 빨간색 창이 떠올랐다.

    [‘탑의 주인’이 약 항아리가 준 오렌지 주스를 먹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도로 뱉어냅니다.]

    “이제야 본 건가?”

    마치 베카가 이 광경을 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해령의 한쪽 입가가 반원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 뱀 같은 자식, 대체 어디까지 생각하고 움직인 거지?

    [‘탑의 주인’이 입에 묻은 주스를 닦아내고 “요망한 은색 뱀 녀석이 개수작을 부리고 있다”며 해령을 향해 “당장 탕에서 나오라”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해령의 큰 그림이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나는 어느새 베카와 뜻을 같이하게 됐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내 탕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게 뭐가 문제가 되냐”며 “꼬우면 네가 탕 주인하든가”라면서 거만하게 약을 올립니다.]

    [‘탑의 주인’이 “그 말 후회하지 않겠냐”며 붉은 스파크를 일으킵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탑의 주인’의 살기를 느끼고 “이러다 온천 날아가게 생겼다”며 보호 결계 부적을 꺼내듭니다.]

    둘의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건지 잠자코 있던 운수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고작 이런 일로 겨우 살려낸 온천을 다시 망가트릴 수 없지.

    [‘온천표 장미 향료(SSS)’효과로 마나가 500 회복됩니다. 마나 <10000/10000>]

    적절한 때에 마나도 MAX로 회복됐겠다,

    그 말은 이제 내가 이 탕에 있을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과 같았다.

    쉴 새 없이 오가는 붉은색과 푸른색의 시스템창의 연속에 나는 그대로 자리를 힘껏 박차고 일어나 탕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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