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빠빠빨간색! 궁금해 허니!
“그대로 나가는 거 아니었어?”
질겁하면서 떨어져 나가길래 그길로 탕을 나갈 줄 알았더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람?
내가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채 영문을 모른다는 듯 해령을 바라보자, 바짓단이 젖지 않도록 마저 걷은 그가 나머지 발 하나까지 탕으로 집어넣었다.
“네가 또 졸아서 뒤로 넘어가버리면 곤란하니까 지켜볼 생각이다. 풀려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계약자가 죽어서 쇠고랑 차고 싶지 않거든.”
뭐, 온천탕의 바닥은 돌로 되어 있어서 머리를 부딪치면 위험할 수 있었다.
방금도 해령이 없었다면 내 머리는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쳤겠지…….
곰곰 생각해보니 해령이 왜 나를 지키고 섰는지 알 것 같긴 하다.
바로 직전에도 발그레 바나나를 욕심내다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쇠고랑 차게 만든 전과가 있었으니까.
거참, 할 말 없게 만드네.
[‘온천표 장미 향료(SSS)’효과로 마나가 500 회복됩니다. 마나 <3500/10000>]
나는 못 들은 척 발로 물장구를 치며 시스템창으로 눈을 돌렸다.
향료의 효과가 좋긴 한가 봐.
어느새 어지러운 것이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해두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온천수 위를 떠다니는 장미꽃잎에 한눈을 팔고 있던 나는 해령의 목소리에 다시금 눈을 돌렸다.
“하고 싶은 말? 그게 뭔데?”
해령의 낯빛이 평소와 다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보아하니 즐거운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염라에게 따로 물으니 네 사인은 열사병이라고 하더군.”
해령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내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살아 돌아온 게 어디냐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그는 무척 찜찜해 보였다.
“염라는 저승에 있지 않아? 어느 틈에 또 그런 걸 알아봤대?”
“온천의 성좌들끼리는 다 통하는 법이 있다.”
시스템창에서 염라와 해령이 내 사인에 대해 말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시스템창 말고도 성좌들끼리 따로 연락할 방법이 있다는 건가?
재판을 보느라 내 죽음도 모르고 있던 염라가 내가 만든 쑥 라테의 위력을 알고 있었던 걸 보면 완전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떻게 통하는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알려달라는 듯이 슬쩍 거리를 좁히며 다가가자 해령이 손을 펼쳐 내 얼굴을 있는 힘껏 밀쳤다.
때문에 내 얼굴은 눌린 찐빵처럼 뭉개어지고 말았다.
젠장,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군.
작전상 일보 후퇴하기로 한 난 마지못해서 해령의 손에서 벗어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중요한 이야기란 게 뭐길래 이렇게 무게를 잡아?”
“온천의 성좌들과 이야기해본 결과, 네가 열사병으로 죽기 전에 내 각인 외에도 운수와 샤레니안이 부적과 불사의 방패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대수롭지 않게 해령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다.
엥?
“그런데도 내가 왜 죽은 거야?”
SS급 던전 브레이크에서 흑화한 우나에게 달려들었을 때, 운수와 샤레니안은 같은 방법으로 나를 보호했다.
그때는 체력이 1도 달지 않았을 정도로 멀쩡했잖아?
“아무래도 성좌의 개입이 있었던 것 같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내 죽음에 성좌가 관련되어 있다고?
“그게 누군데?”
‘내가 아는 성좌라고는 온천에 있는 녀석들이 전부인데. 설마 염라, 너냐?’
죽음에 관여할 정도의 권한을 가졌다면 염라가 가장 유력했다.
샤레니안과 운수는 날 지키려고 했다고 했고 해령은 내게 각인을 상태니까.
[성좌 ‘저승의 염라’가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냐”며 “그대가 죽으면서 저승에 개구멍이 생길 뻔했는데 그런 일을 왜 벌이겠냐”며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습니다.]
그건 그래.
염라가 굳이 자기 무덤을 팔 필요는 없지.
‘그럼 내가 모르는 성좌가 날 죽게끔 손을 썼다는 거야?’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아마도 던전에서 온천 마스터키를 잠그고 바나나 몬스터를 흑화시킨 녀석인 것 같다”며 의심스러워합니다.]
그러고 보니 죽기 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분명 던전에 지호 말고 누군가가 있었어.
‘염라, 정확히 범인이 누군지는 아직 모르는 거야?’
순간 마스터키를 잠근 범인이 누군지 추적해보겠다던 염라가 떠올랐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안 그래도 범인을 찾아내려고 저승국에서 네 죽음을 담은 CCTV를 여러 번 돌려봤는데 사각지대에 숨은 건지 보이지 않았다”며 “아무래도 철저한 계획범죄인 것 같다”고 추측합니다.]
‘갑자기 왜 장르가 범죄 수사물로 가는 건데?’
내 인생은 온천 사장의 평화로운 나날 같은 힐링물로 가는 게 아니었나?
게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난 범인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이제 막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온 참인데, 아직 끝난 게 아니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성좌는 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죽게까지 만든 거지? 나 혹시 뭐 잘못했어? 이 정도로까지 괴롭힐 때에는 나도 뭔가 예상이 가는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세상에 성좌는 많고 그중에 미친 성좌도 많다”고 말합니다.]
……혹시 자기소개?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언젠가 운수가 했던 말이 떠올렸다.
본인은 계약자가 죽는 걸 즐길 정도로 미친X은 아니라고.
그 말이, 설마 사람이 죽는 걸 즐기는 미친 성좌도 있다는 말이었나?
‘지금 내가 그 미친 성좌의 표적이라는 말을 하는 거야?’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그냥 미친X의 소행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계획적”이라며 “뭔가 다른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애초에 범인은 우리와 비슷한 경지거나 그 이상의 성좌다”라며 “그게 아니면 수온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즘은 각성자만큼이나 널리고 널린 게 성좌인데 그것만으로 어떻게 범인을 찾아?’
[가이드 ‘영계’가 “모르는 소리!”라며 “온천 성좌님들의 위력은 성좌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라며 흥분합니다.]
‘진짜 손에 꼽을 정도라면 내가 왜 죽어?’
“상대도 손에 꼽히는 경지에 있는 성좌라는 거겠지.”
낮은 목소리로 답하는 해령은 뭔가 짐작이 가는 곳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 짚이는 데라도 있어?”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안다고 해도 계약자를 찾아내지 못하면 별수 없고.”
“계약자?”
해령에게 계약자에 대해 묻는 그때, 마침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성좌는 인간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못하는 게 규칙”이라며 “그대의 죽음에 성좌의 힘이 관여한 것을 보면 계약자가 있을 것”이라며 “주변에 짐작 가는 사람이 없냐”고 묻습니다.]
‘내 주변 사람이라고는 지호랑 박시우가 다인데?’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등에 칼을 맞고 피범벅이 된 얼굴로 “주인의 인간관계가 지금 내 몰골보다 처참하다”고 말합니다.]
그 정도냐?
‘너, 일단 살아 있는 건 맞지?’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이왕 걱정해주는 김에 더 해주라”라며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상태로 웃으며 좋아합니다.]
‘등에 칼 꽂고 웃지 말아줄래? 무섭거든.’
이런 샤레니안을 외면하듯 곧바로 염라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그대를 노리는 게 성좌가 아니라 인간일 수도 있다”며 “원한이나 미움을 산 사람이 없냐”고 묻습니다.]
‘그런 거라면 많지.’
어릴 때부터 S급 헌터 집안이라는 배경과 우리 남매의 눈에 띄는 외모로 인해 유명세 못지않은 질투와 시기가 나를 따라다녔다.
한창희처럼 질 나쁜 날파리들도 많이 꼬였고 괴롭히려는 동급생들도 있었지만, 나는 결코 가만히 당해주지 않았다.
전부 머리털이 뽑혀나가거나 백기를 들 때까지 달려들었지.
그걸 몇 번 반복하니 남은 학창시절 동안 웬만하면 내게 접근하는 애들은 없었고, 그렇게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중에 있을지도.’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전과 달리 짚이는 데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오래된 일들이라 기억도 잘 나질 않아 답답함만 더 커질 뿐이었다. 그때 붉은 시스템창 하나가 떠올랐다.
[‘탑의 주인’이 “그때는 탑에 있어서 상황을 알지 못했지만, 이제부터는 본인이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볼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킵니다.]
‘우쭈쭈, 우리 베카! 착하기도 하지. 베카도 있으니까 이제 누나는 하나도 안 무서워.’
솔직히 완전히 겁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베카 덕분에 불안했던 마음이 정말로 조금 가라앉긴 했다.
베카는 내가 죽었다고 저승까지 쫓아오기까지 했으니까 누구보다 믿을 만했다.
그런데…….
베카의 시스템창에 적힌 문구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이내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베카의 시스템창이 원래 빨간색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