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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71화 (71/190)
  • 71화

    안 잡아먹는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 오기 전에 그런 말을 했었지.

    “네가 만든 쑥 라테 먹고 싶으니까! 빨리 오라고…….”

    해령에게 걱정되니까 빨리 오라고 해놓고 민망한 마음에 쑥 라테로 둘러댔던 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돈가스 도시락을 챙겨준 것도 그렇고 마나를 회복하는 향료를 챙겨주는 것도 그렇고.

    매번 관심 없는 척 굴면서 엄청 섬세하다니까.

    “잘 마실게.”

    난 해령이 만들어준 쑥 라테가 담긴 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따끈한 김이 살갗에 와닿자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몸이 약해져서 마음도 약해진 걸까?

    솔직히 좀 감동했다.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해령이 솜씨는 여전했다.

    산뜻하면서 달콤한 쑥 라테의 풍미가 입안을 감돌았다.

    역시 맛있어!

    이 맛있는 걸 먹으면서 온천이라니…….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즐거워진 나는 발로 물장구를 치며 쉬지 않고 쑥 라테를 홀짝거렸다.

    조금씩 아껴서 먹을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쑥 라테 한 잔을 홀랑 비워버렸다.

    [‘온천표 쑥 라테’를 한 잔 마셨습니다. 산뜻한 쑥의 기운으로 체력이 5 증가합니다. 체력 (45/50)]

    한 잔이면 그래도 용량이 꽤 되는 것 같은데 아직도 체력이 50에 머물다니…….

    매번 열악한 체력을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진짜 샤레니안한테 체력 단련이라도 부탁해야 하나?

    사우나 가운을 늘 입고 있을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그럴 수도 없고.

    체력이 높으면 사우나 가운 없이도 맘 편히 다닐 텐데…….

    솔직히 이번 죽음만 해도 그랬다.

    체력이 높았다면 열사병 따위에 죽을 일은 없었을 거다.

    진짜로 샤레니안에게 체력 단련 수업 좀 해달라고 해봐?

    지난번에 체력이 물음표로 표시되는 것 보니까 시스템창도 가늠하기 어려운 정도인 것 같던데.

    솔직히 두 팔로 안간힘을 쓰고도 불사검을 드는 데 실패한 적이 있는 나로서는 그것을 나뭇가지 들 듯 가뿐히 들어 올리는 샤레니안의 힘이나 체력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다만 자신처럼 단련시켜주겠다며 검도 잡아본 적 없는 초보를 불사의 전장으로 데려갈 생각을 하는 무모함 때문에 다른 면으로 신용이 가지 않았다.

    체력을 올리기 전에 전장에서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차라리 해령에게 매번 쑥 라테를 해달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계산을 한번 해보았다.

    한 잔에 체력이 5씩 오르니까 10잔이면 체력이 50이고…….

    그러니까 10잔을 먹어야 체력이 100이라는 거네.

    쑥 라테가 단 편은 아니었지만, 먹는 것으로 체력을 올리려고 했다가는 당뇨병이 먼저 생길 것 같았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일단은 몸부터 회복하고 천천히 생각하는 거야.

    온천을 하는 지금만큼은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기로 했다.

    나는 깨끗이 비운 잔을 쟁반에 내려놓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어디선가 달콤한 꽃향기가 났다.

    이건 장미 향인 것 같은데…….

    온천과 돈가스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게 바로 좋은 향이었다.

    좋은 향을 맡으면 힐링이 된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온천 사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아로마 향초나 보디워시를 사 모으면서 즐거움을 느끼고는 했다.

    향료라고 해서 향이 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취향을 저격할 줄이야.

    그중에서도 장미 향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향이었다.

    코끝으로 향이 나는 곳을 따라가보니 물속에 향료로 보이는 꽃잎을 풀고 있는 해령이 보였다.

    살랑이는 은발에 푸른색 눈동자는 장밋빛과는 거리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르게 붉은색 꽃잎과 해령은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우러졌다.

    누가 보면 화보 찍는 줄 알겠네.

    이 장면이 진짜 광고였다면 아마 저 향료는 순식간에 완판이 났을 거다.

    게다가 향기도 이렇게 좋을 수가.

    난 깊게 숨을 들이켜며 향을 느꼈다.

    온천에 진한 장미 향이 퍼지면서 꼭 꽃밭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온천수에 ‘온천표 장미 향료(SSS)’가 더해집니다.]

    [‘온천표 장미 향료(SSS)’효과로 1분마다 마나가 500씩 회복됩니다.]

    향료를 섞은 물에 발만 담그고 있어도 마나가 회복되다니…….

    역시 믿고 보는 온천표!

    뭐든 온천표가 붙으면 상상을 뛰어넘었다.

    나중에 향료 만드는 법도 물어봐야지!

    물론 내 똥손으로 제대로 된 향료를 만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몸이 노곤할 때 향기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될 것 같았다.

    그런 김에 마나도 회복하고 말이야.

    나는 고개를 들어 온천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통유리 너머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벽에는 유리로 된 창이 있었는데 그 틈으로 시원한 밤공기가 흘러들어와 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달빛과 신선한 밤바람을 맞으며 온천을 하는 기분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젖은 머리는 수건으로 닦아 말리는 게 좋겠군. 밤공기가 서늘해서 감기에 걸릴 수 있다.”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밤공기를 만끽하고 있는데 일을 마친 해령이 내게 다가와 가지런히 접힌 수건을 건넸다.

    내 몸이 안 좋은 상태인 건 알겠는데, 날 너무 병약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내가 아무리 체력이 안 좋아도 그렇지 고작 이 정도 바람에 감기가 걸리지는 않는다고!

    이건 나의 하찮은 체력에 대한 자존심의 문제였다.

    “됐어! 바람도 시원하고 딱 좋은데 뭘! 이대로 있으면 머리도 알아서 마를 거야.”

    난 수건을 해령에게로 다시 밀어내며 젖은 머리를 닦는 걸 거부했다.

    “쯧,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군.”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던 해령이 내게로 손을 뻗었다.

    동시에 포근하고 부드러운 수건의 감촉과 그의 기다란 손가락의 움직임이 살갗으로 느껴졌다.

    어느새 해령은 내 뒤에 자리하고 앉아 내 젖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내고 있던 것이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이상하게도 몸이 뻣뻣해졌다.

    ‘내가 갑자기 왜 이러지?’

    “안 잡아먹는다.”

    등 뒤에서 해령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미심쩍어하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쳇, 눈치챘나?

    “긴장 풀어도 된다고. 수건에 독 같은 건 안 발랐으니까.”

    “누가 긴장을 했다고…….”

    나는 부자연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아마 누가 봐도 속마음을 들켰다는 것이 티가 났을 것이다.

    해령이 뒤에서 낮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니면 말고.”

    왠지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평소의 행실이나 말투만 봐서는 해령이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어놔도 이상할 게 없다고!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머리카락을 다루는 해령의 손길은 생각보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해령은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하는 것 같아.

    내 똥손하고는 완전히 다르게.

    새삼스럽게도 해령의 금손은 슬픈 현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거 너무 포근한데……?

    꼭 갓 빨래를 마친 보송한 이불 속에 드러누워 있는 기분이야.

    생사를 넘나들던 고비에, 머리카락을 만지는 해령의 따뜻한 손길이 더해지니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온천표 장미 향료(SSS)’효과로 마나가 500 회복됩니다. 마나 <2500/10000>]

    족욕한 지 꽤 된 것 같은데 이제 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거지?

    그 말은 앞으로 15분은 더 버텨야 한다는 건데…….

    나 너무 졸려…….

    잠들면 안 되니까 정신을 차려야…….

    내 의지와 달리 피곤을 감당해내지 못한 몸이 녹아내리듯 무너졌다.

    눈을 감는 순간, 순간적으로 고개가 뒤로 넘어가는 느낌에 눈을 번쩍 뜨자 내 머리를 받친 채 내 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해령의 선명한 이목구비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어라?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지?

    눈을 맞추는 순간, 잔잔한 호수 같던 해령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나는 잠이 어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별이 빛나는 새벽하늘 같아.

    가까이에서 본 해령의 눈동자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을 눈에 담아둔 것 같았달까?

    ……예쁘다.

    난 별과 달이 빛나는 밤하늘만큼이나 어스름이 진 새벽하늘을 좋아했다.

    세상에 나 혼자만 깨어 있는 것 같은 고요함 속에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비워지고 새벽의 푸른색처럼 맑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해령의 눈동자를 새벽하늘을 감상하듯이 빤히 바라봤다.

    “무겁다.”

    해령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내 얼굴에 머리카락을 말리던 수건을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날 지탱하고 있던 손으로 나를 밀어서 스스로 앉게 만들더니 달아나듯이 내 뒤에서 사라졌다.

    너 지금 나 쳐냈어?

    황당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누가 보면 해령이 귀신이라도 본 줄?

    아무리 성좌의 미의 기준이 남다르다고 해도 사람 얼굴을 보고 질겁해서 달아날 것까지는 없잖아.

    나는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쓴 채로 해령의 인기척이 느껴지는 쪽을 돌아봤다.

    수건 아래로 해령이 나와 멀지 않은 곳에서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으응? 너 거기서 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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