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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70화 (70/190)

70화

좋은 꿈이었다

“어르신!”

반가운 얼굴에 내가 몸을 일으켜 세우자 어르신이 인자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내 손녀,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로만 알았다.”

어르신은 포근한 손길로 대견하다는 듯 내 머리를 쓸어줬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어르신에게서는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종잡을 수 없는 성좌들이 득실거리는 이 온천에 유일한 난로 같은 존재랄까?

“가지 않겠다.”

위기를 느낀 건지 베카가 두 팔로 내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까치발까지 동원해서 내게 찰싹 달라붙은 베카에게서 결코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역시 베카를 데려가는 수밖에 없나?

베카가 쓰고 있는 탕에 들어가는 수도 있지만 과연 해령이 순순히 따라줄지도 의문이었다.

향료가 해령의 손에 있는 이상, 설득하기 힘들 텐데…….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이마를 짚는데 어르신이 베카의 앞에 몸을 낮춰 앉았다.

“손녀와 함께하고 싶은 네 마음은 잘 알겠다만, 지금은 좋은 시기가 아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내 손녀의 몸 상태가 말이 아니거든. 빨리 몸을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으면 몸져누워도 이상할 게 없단다.”

어르신은 자신이 쓰고 있던 금테 안경을 베카에게 씌워줬다.

“자, 내 말을 믿기 어렵다면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아라.”

두 손으로 안경을 고쳐 쓴 베카가 나를 올려다봤다.

나를 바라보던 베카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이내 심각해졌다.

그러고 보니 저 금테 안경은 상대방의 몸 상태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

아무래도 베카가 내 마나 상태가 열악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지금 손녀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다. 함께 족욕을 즐기는 것은 다음에 해도 되지 않으냐? 너도 손녀가 아프길 원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르신이 잘 타이르며 묻자 베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놓아줬다.

“착하구나.”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것을 칭찬하듯 어르신이 베카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의외로 베카는 온순히 그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르신, 금쪽이를 잘 다루시는구나!’

그러고 보니 지난번 불에 타버린 돈가스가 온천을 난리통으로 만들어놨을 때, 베카에게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챙겨준 것도 어르신이라고 했었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약방 할아범의 대표적인 골칫덩이 금쪽이로 샤레니안이 있다”며 공감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어르신은 샤레니안도 곧잘 다루셨지.’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내가 좀 금쪽같긴 하다”며 쑥스러워합니다.]

골칫덩이는 못 들은 척하는 것 좀 봐?

난 한결같이 단순한 샤레니안의 시스템창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 봐도 육아(?) 난이도 극상인 샤레니안을 감당할 정도라면 어르신은 이미 검증된 실력자나 다름이 없었다.

어르신이라면 베카를 믿고 맡길 수 있겠어!

“얌전히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그러니까 아프지 마.”

금테 안경을 벗은 베카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사실 딱히 아프다거나 불편하지는 않는데 괜히 걱정을 끼친 건 아닌가 싶네.

“응, 온천의 향료가 효과가 좋다니까 빨리 회복해서 돌아올게.”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의 베카가 다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상처를 치료해야 하니까 약방으로 올라가도록 하자.”

어르신이 손을 내밀자 베카가 순순히 손을 맞잡았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2층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베카는 내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온천 가운과 갈아입을 옷, 그 외에 필요한 것들은 영계에게 탕으로 가져다 놓으라고 말해두겠다. 넌 먼저 온천탕으로 가 있도록 해.”

“알았어.”

해령은 그 말만 남기고 분주히 2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안내하도록 하지! 따라와라!”

필요한 물건들을 보자기에 짊어진 영계가 짧은 팔로 탕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나는 영계의 안내를 받으며 탕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아, 따뜻해!”

영계가 챙겨준 온천 가운을 입고 탕 안으로 들어온 나는 온천에 발을 담갔다.

발을 담갔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좋다. 이게 소확행이지!”

그러고 보니까 온천 사장이 되고 나서도 제대로 온천을 즐겨본 적이 없었다.

온천에 들어간 거라곤 저승탕에 들어간 게 전부였지.

이렇게 발만 담그기는 아쉬운데…….

이왕이면 몸을 전부 담그는 게 마나도 빨리 회복되지 않겠어?

온천의 맛을 본 나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가운을 벗어 던졌다.

뜨끈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평생 온천만 하면서 살고 싶다.

근심은 전부 내려둔 채, 젖은 머리를 넘기는 순간이었다.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탕으로 들어왔다.

“향료를 가져왔…….”

안개에 가려 있던 물색 눈동자와 내 시선이 맞물렸다.

툭.

해령의 손에 들려 있던 향료 주머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야뭐야?! 너 왜 갑자기 들어와?!”

나는 황급히 두 손으로 몸을 감싸며 물속으로 들어간 채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난 향료를 타주려고……!”

해령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는지 머리털을 곤두세우며 반사적으로 내게서 돌아섰다.

항료를 타주려고 왔다고?

난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향료 주머니로 눈을 돌렸다.

아직 온천수에 향료를 타기 전이었어?

내게 탕에 먼저 가 있으라던 해령이 2층으로 올라갔던 이유가 향료를 가지러 갔던 거였나 보다.

“그, 그럼 미리 말이라도 해주든가! 시스템창은 장식이야?”

그럼 적어도 벌거벗고 탕에 들어가 있지는 않았을 거 아냐!

“나는 네가 당연히 발만 담그고 있을 줄 알았지! 족욕을 한다고 해놓고 왜 탕에 들어가 있는 거냐?”

그건 온천에 발을 담그니까 너무 뜨끈하고 기분 좋아서 나도 모르게…….

잔뜩 뿔이 난 해령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가 탕에서 수중발레를 하든 덤블링을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좋아서 내 몸을 내가 온천에 담그겠다는데, 뭐!

해령이 아무리 내 성좌라고 해도 거기까지 간섭할 권리는 없었다.

난 당당하게 양어깨를 펼치며 해령에게 항의했다.

이 정도면 해령도 할 말이 없을 줄 알았는데,

“상관있다.”

망설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해령의 단호한 대답이었다.

“몸이 마나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바닥까지 소진해버린 지금의 네 몸 상태로 뜨거운 물에 전신을 담그고 있다가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없던 마나가 생기면 더 강해져야 하는 거 아니야?

어째 마나가 생기고 나서 더 조심해야 할 게 많아진 것 같았다.

“나 참, 겨우 온천을 하다가 쓰러진다고? 무슨 개복치도 아니고.”

나는 던전 브레이크에서 만난 장난감 오리 인형처럼 입을 쭉 내밀며 툴툴거렸다.

“강한 힘에는 항상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불만이 가득한 나와 달리 해령은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어쩐지 시스템이 내게 SSS급 스킬을 너무 쉽게 내어준다 했지.

확실히 용의 포효가 범접할 수 없는 스킬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만…….

“그럼…… 혹시 다시 부채의 SSS급 스킬과 마나를 반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루아침에 개복치 신세가 된 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해령을 향해 물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마나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 용의 포효는 온천 운영을 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내게는 조금 과한 감이 있었다.

지금까지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 중에서 베카가 만든 SS급이 최고 난이도였던 걸 고려한다면 더더욱 과하게 느껴졌다.

SS급까지는 태초의 바람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있을 것 같나?”

아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희망이라고는 1도 없는 해령의 대답이 돌아왔다,

개복치로 살지 않으려면 마나를 회복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건가?

온천 사장으로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일단 나 온천 사장은 맞는 거지?

“난 그저 조용히 온천이나 하면서 살고 싶었을 뿐인데…….”

갑작스러운 현실 자각에 긴 한숨을 내쉬자 해령이 내게 등을 진 채로 향로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어쨌든 네가 쓰러지는 일이 벌어지면 결국에는 내가 또 뒷처리를 해야 한다는 거지. 너도 다시 저승에서 염라를 만나고 싶지 않다면 서둘러 탕에서 나오는 게 좋을 거다.”

어우, 다시 저승에 간다니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저승에서 했던 갖은 고생을 떠올리니 몸이 절로 진저리를 쳤다.

기분 탓인지 조금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건 몰라도 컨디션이 좋은 상태가 아닌 건 분명했다.

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아직 볼 빨간 바나나 던전에서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던 터라 이번에는 해령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알았어. 나갈 테니까 딱 그대로 있어! 내가 허락하기 전에 돌아보면 너 죽고 나 사는 거야.”

나는 탕에 몸을 담근 채로 가운이 놓인 곳으로 다가서며 해령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쓸데없는 걱정이군. 어차피 관심도 없다.”

해령은 내게 등을 보인 채로 대놓고 콧방귀를 꼈다.

그것참 고마운 일이네.

예상한 반응이었던 터라 나는 안심하고 영계가 챙겨준 가운을 걸쳐 입었다.

[‘EX급 온천의 가운’의 효과로 가운이 닿은 부위의 물기가 사라집니다.]

이럴 수가!

가운을 입었을 뿐인데 몸이 보송해졌어!

물에 젖어서 안이 비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가운은 처음 내가 탕에 들어왔을 때처럼 마른 상태였다.

이 가운만 있으면 일일이 수건으로 몸을 닦을 필요도 없겠는데?

K-민족의 빨리빨리 피가 흐르는 나로서는 무척 흡족했다.

이거 특허 내면 무조건 돈방석이겠는데?

다만…… 얼마 안 가서 내가 온천 사장인 게 탄로 나겠지.

아주 잠깐이지만 좋은 꿈을 꿨다.

EX급 온천의 가운으로 떼돈을 버는…….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어디서 욕망에 찌든 자본주의의 냄새가 난다”며 코를 킁킁거립니다.]

대체 얼마나 후각이 좋길래 자본주의 냄새까지 맡는 거냐?

잘은 몰라도 운수의 촉이 귀신같다는 건 알겠다.

“다 됐어.”

욕망에 찌든 자본주의의 상상에서 깨어난 나는 온천에 발을 담근 채 해령을 향해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줬다.

“그럼 향료를 풀겠다.”

바로 향료를 풀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르게 해령은 성큼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내 무릎 위에 쟁반을 올려놓은 뒤 서두르듯 내게서 멀어졌다.

“이건…….”

쟁반에 놓인 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쑥 라테였다.

응? 갑자기 웬 쑥 라테지?

조용히 쑥 라테를 바라보자 잠자코 있던 해령이 입을 열었다.

“먹고 싶다면서, 쑥 라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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