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금쪽같은 내 XX
돌풍이 일며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언뜻 듣기에는 무미건조하게 들리는 음성, 그렇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베카가 날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바람처럼 나타난 베카가 팔을 뻗어 나를 있는 힘껏 감싸 안았다.
내게 전해질 정도로 베카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힘차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니 내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왠지 안심이 돼.
“베카! 무사해서 다행이야.”
반가운 마음에 몸을 낮춰 베카를 안자 그가 내 품에 얼굴은 묻은 채 다소 뭉개진 발음으로 속삭였다.
“조금만 늦었다면 저승에 쳐들어갔을 거다.”
무서운 말과 달리 나를 붙들고 있는 베카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베카가 떨고 있다는 건 그만큼 나를 많이 걱정했다는 거겠지?
베카는 웬만한 일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저승에 균열이 났을 때도, 지옥귀를 상대할 때도 그는 일관성 있게 담담했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베카의 작은 변화가 내게는 더 크게 와닿았다.
“늦어서 미안해, 베카.”
급히 달려온 탓일까, 검은 곱슬머리가 흐트러진 그대로 베카는 나를 올려다봤다.
진한 홍색의 커다란 눈동자가 나를 향해 울멍거리고 있었다.
어떡해……? 꼭 어미를 잃은 아기 고양이 같잖아?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나는 베카의 머리카락을 쓸어줬다.
“베카, 그런데 뺨에 상처가…….”
뽀얗던 베카의 볼에 빗금처럼 깊게 패인 상처가 자리하고 있었다.
순간 베카가 헌터 협회에게 공격당하고 있다던 댓글이 떠올랐다.
이건 그때 생긴 상처일까?
“별것 아니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베카가 손으로 상처를 가렸다.
“별것 아니긴!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만큼 강하면서 왜 맞고 있었어?”
“내 보호막에는 공격을 반사하는 효과가 있다. 너랑 약속했으니까. 인간들을 다치게 하지 않기로.”
그랬구나…….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공격을 막지 않고 전부 받아낸 거야.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 베카. 그리고 다치게 해서…….”
“상관없다. 네가 지금 여기에 있으니까. 난 그거면 됐다.”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베카가 올곧게 나를 바라봤다.
분명해!
베카는 천사야.
이 모습을 영계랑 해령이 봤다면 결코 삿되거나 불길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을 텐데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도 그대로 두면 상처가 덧나게 돼.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상처에 바를 약을 만들어 올 테니까.”
천사 같은 베카에게 홀딱 빠져 있던 나는 약방으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건 안 돼.”
그때,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이 까칠하고 단호한 목소리는…….
고개를 돌리자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있는 해령의 잘 다듬어진 이목구비가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새 그의 널따란 품에 들어와 있었다.
산뜻한 풀냄새…….
해령은 몸에서도 좋은 향이 났다.
힐링하는 장소인 온천의 지배자라 그런가?
해령의 체향은 꼭 아로마 테라피를 받는 것처럼 치유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볼일이 남았다고 하지 않았나?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네.
“볼일은?”
“끝났다.”
해령이 슬쩍 시선을 피하자 귀에 달린 보석이 온천의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하지만 그조차도 그의 빛나는 외모를 가리지는 못했다.
덕분에 내 눈은 손쉽게 해령의 의심스러운 행동을 포착할 수 있었다.
찔리는 게 있으면 먼저 눈을 피하는 저 버릇.
뭔가 수상한데?
“볼일이 뭐였길래 이렇게 빨리 와?”
“네가 그것까지 알 필요 없다.”
몇 번 캐물은 것도 아닌데 해령의 고개가 나를 외면하듯 조금씩 돌아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새파랗게 질려 있던 안색에 혈색이 도는 게 전보다 상태가 좋아진 것 같았다.
어디 아픈 거 아니면 됐지.
“그럼 너도 내가 약 만드는 데까지 간섭할 필요 없어.”
단호하게 해령에게서 돌아서는데 그가 내 뒷덜미를 덥석 붙잡았다.
“야, 내가 네 새끼 강아지인 줄 알아? 왜 뒷덜미를 붙잡아 올리고 난리야?”
난 해령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항의했다.
“그런 거나 다름없지. 제멋대로 날뛰는 데다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사라져가지고 걱정이나 시키고 말이야.”
진짜로 애기 취급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야?
당연히 해령이 핑계를 댈 줄 알았는데 내 계산 착오였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해령이 누군가를 걱정하다니 별일”이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청춘이구만”이라며 사춘기 소녀처럼 쑥스러워합니다.]
“헛소리하지 마라. 원래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사라지면 걱정은 하는 법이다.”
연이어 올라오는 성좌들의 호응에 해령이 단호하게 대응했다.
“난 네가 키우는 강아지 같은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당장 놔!”
“안 된다고 했다.”
놓으라고 했더니 해령은 오히려 나를 잡아당겨 제 편으로 끌었다.
오호라, 이렇게 나오시겠다?
나는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해령을 향해 따지듯 물었다.
“왜 안 된다는 건데?”
기선을 제압할 생각으로 거리를 좁히며 물었건만 해령은 전처럼 눈을 피하는 것 없이 내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마나가 바닥난 상태에서 약을 만드는 건 위험하다.”
걱정인지 경고인지 모를 감정을 담은 눈동자가 나로 빈틈없이 채워졌다.
“체력까지 소모되면 쓰러질 수 있으니까 일단은 온천탕에서 족욕이라도 해.”
별다른 이유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해령은 나름 타당한 이유를 대가며 나를 말렸다.
“너 지금 마나 0이잖아. 내 말이 틀렸나?”
마나가 0인 건 또 어떻게 알았대?
나는 정확하게 내 상태를 파악한 해령에게 달리 반박할 말이 없어졌다.
“그럼, 족욕을 하면 뭐가 나아져?”
“내가 온천에 마나를 회복하는 향료를 넣어줄 테니까 그 물에 족욕을 하면 상태가 조금은 나아질 거다.”
세상에 마나를 회복하는 향료도 있었어?
어째 이 온천은 알면 알수록 미지의 영역처럼 느껴졌다.
“마나가 회복되면 그땐 약 만들 수 있는 거지?”
내 물음에 해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 몸으로는 약을 만들 수 없으니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알겠어. 안 그래도 피곤한 참인데 잘됐네.”
“바로 온천을 준비하도록 하지.”
해령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고사리 같은 손이 나를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베카가 여전히 보석처럼 예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앙증맞은 볼을 움직였다.
“나도 데려가.”
귀여워!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심장을 움켜잡으며 쓰러졌다.
우리 지호도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같이 유치원에 갈 수 없게 됐을 때 이런 표정을 지었었는데…….
“나도 누나랑 같이 학교 갈래! 유치원 싫어!”
지호가 나랑 떨어지지 않겠다고 어찌나 떼를 써댔는지 당시 부모님이 엄청 애를 먹었었다.
“시우 형만 누나랑 같이 가고! 나는 누나랑 못 놀게 하고! 엄마, 아빠 나빠!”
한참의 실랑이 끝에 결국에는 다녀와서 놀아주겠다고 새끼손가락까지 걸어가며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지호는 눈물을 훔치며 유치원에 갔었지.
그런 이유로 나는 초등학교 등교 첫날부터 지각을 했고, 그 때문에 더 주목을 받게 됐다.
그 무렵에는 이미 S급 헌터였던 박시우의 동생이라는 것까지 알려지면서 반 친구들부터 선생님들까지 나를 대하는 걸 어려워했다.
그나마 내게 호의를 보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목적이 있었고, 결국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혼자가 됐다.
뭐, 어차피 지금의 나에게는 다 지난 과거일 뿐이지만…….
그냥 베카를 볼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난단 말이지.
혼자 학교 계단에 앉아서 무리 지어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던 어린 날의 나를 떠올리던 나는 베카의 눈높이에 맞춰 앉았다.
“베카도 따라가고 싶어?”
“응.”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베카가 내 옷깃을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풍잎처럼 작은 손으로 날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꼭 붙들고 있는 걸 보니까 쉽게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곳이면 고민 없이 베카를 데려갔겠지만, 이번만큼은 어려웠다.
베카는 엄연히 남자아이인데, 함께 온천에 들어간다는 건 아무래도 곤란하지.
어렵게 내 옷깃을 쥔 손을 떼어놓으려는데 베카가 뺨을 쥐며 울상을 지었다.
“상처가 아픈 것 같다. 같이 족욕을 하면 나을 것 같은데.”
베카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나오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쩐지 상처가 깊어 보인다 싶었는데 이제껏 아픈 걸 참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해령의 말대로라면 향료에 회복 효과도 있는 것 같으니 베카의 상처가 낫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뭐, 온천에 발만 담그는 거니까 딱히 상관없잖아.
“그럴까? 그럼 같이…….”
“설마 그 녀석과 함께 온천에 들어가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베카에게 같이 온천에 들어가자고 하려는 그때, 해령이 경악하며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족욕만 하는 건데 뭐 어때? 베카도 많이 다친 모양이야. 상처도 낫고 좋잖아.”
“그건 불가능하다. 어차피 족욕이기 때문에 뺨의 상처는 낫지도 않을 거고.”
“그럼 난 어떻게 몸 전체가 낫는다는 건데? 나도 발만 담그는데?”
자기가 말하고도 황당하다고 생각한 건지 해령은 민망해하는 기색이었지만, 뜻을 굽힐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유를 댈 정도로 해령은 베카를 본인의 탕에 들이는 게 내키지 않는 건가?
평소와 달리 막무가내로 나오는 해령에게 당혹스러워하고 있던 중 잠잠하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족욕만 해서 괜찮은 거면 나도 같이 온천에 들어가도 되겠냐”며 “나도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면서 피를 철철 흘립니다.]
‘너는 온천에 올 게 아니라 응급실에 가야 할 수준이라고!’
샤레니안이 불사의 몸이니 망정이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일찍이 염라를 만났을 게 분명했다.
“어쨌든 안 된다. 난 내 탕에 삿된 것을 들일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그럼 다른 탕을 쓰면 되잖아!”
온천에는 해령의 개인 탕을 제외하고도 네 개의 탕이 더 있었다.
나머지는 세 성좌와 베카가 임의로 쓰고 있었다.
“온천 사장이라고 해서 다른 손님의 탕을 허락 없이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 지난번에도 저승탕에 함부로 들어가서 사달이 나지 않았느냐?”
저승탕에서의 사달이라면…….
내가 염라에게 갖은 민폐를 끼쳤던 그날을 말하는 거겠지.
저승탕에서의 부끄러운 흑역사가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해령에게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 베카는 어떻게 하지?
“걱정하지 마라. 그 아이의 상처는 내가 데려가서 치료해주도록 할 테니.”
고민하는 찰나에 2층에서 백발의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
바로 약 항아리 어르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