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온천 사장의 자격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반가운 온천 로비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온천(EX)이 열립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와의 계약이 복구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와의 계약이 복구됩니다.]
온천이 곧 열린다는 문구와 함께 줄지어 온천 손님들과의 계약이 복구됐다.
그러자 막힌 물이 터져 나오듯이 시스템창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수온이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새로운 사장을 구했냐”며 해령을 타박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새로운 사장이 온천을 운영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며 “당장 계약을 해지해달라”면서 재수 없다는 듯이 소금을 뿌립니다.]
아우, 짜!
나는 면전으로 날아오는 바람에 입안으로 들어온 소금을 뱉어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불사의 전장에서 “이곳은 수온의 온천”이라며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온천에 다른 계약자를 들일 수 없으니 당장 나가라”며 불사의 검을 휘둘러 적들의 목을 사정없이 베어내며 위협합니다.]
성좌들은 내가 새로운 계약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보통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건 불가능하니까 당연한 반응이지.
그래도 성좌들에게 조금 감동했다.
나 아닌 누가 계약자라도 온천만 운영할 수 있으면 상관없다는 듯이 굴더니 이렇게 냅다 얼굴에다 소금을 뿌리고 검으로 위협하는 걸 보니까 꼭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닌 척해도 다들 내심 날 마음에 들어한 걸지도?
새삼 초반에 네 명의 성좌들을 대상으로 했던 호감도 퀘스트가 오류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이곳의 사장이 되려면 적어도 쑥 라테로 암살을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자신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물러나는 게 좋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쑥 라테 이야기가 나오는 건데?
누가 보면 진짜 내가 암살 시도라도 한 줄 알겠네!
샤레니안의 쑥 라테 언급은 모처럼 느낀 감동을 부수기에 충분했다.
‘계약 해지는 안 돼. 박수온 사전에 이용권 환불은 없는 거 알지?’
내 의미심장한 경고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성좌들의 시스템창에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뭐야? 다들 그새 어디로 갔어?
아니면 환불하려다 실패해서 상심이라도 했나?
띠링!
그때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이 자본주의에 찌든 마인드는 박수온이 확실한데……”라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끝을 흐립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불사의 전장 한가운데에서 내 목소리를 듣고 울컥합니다.]
성좌는 마음만 먹으면 계약자의 생활을 지켜볼 수 있다.
그런데 얼굴을 확인하는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에 찌든 것으로 내가 확실하다니?
확신하는 포인트가 이상하잖아.
뜻하지 않게 그간 성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샤레니안, 울컥했다는 게…… 설마 울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그것도 전장 한가운데에서?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주인이 진짜 돌아온…… 끄흡”이라며 울음을 참아 넘기려고 애씁니다.]
진짜 울잖아?
‘샤레니안, 너 울어?’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성좌 ‘불사의 살인귀’에게 “울지 마라”고 말하며 “본인은 누가 우는 걸 보면 따라서 운다”면서 함께 울먹거립니다.]
‘뭐야? 갑자기 다들 왜 울고 그래?’
언제는 온천만 멀쩡하면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 굴더니 사람 당황스럽게 안 하던 짓을 하고 말이야!
게다가 샤레니안은 그렇다 쳐도 운수까지 왜 저러는 건데?
피도 눈물도 없는 온천 성좌1 아니었어?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주인…… 끄윽! 죽은 줄 알고 끄윽!”하고 흐느끼며 핏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닦아냅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나는 너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샤레니안이 울어서 우는 것”이라며 울면서도 곁눈질로 나를 이리저리 살핍니다.]
‘그래, 나 때문에 우는 거 아니라고 쳐줄게.’
누가 봐도 내가 돌아와서 우는 것 같지만…….
성좌들이 울면서까지 나를 반겨주는 건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덩달아 코끝이 찡해졌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이제 주인이 타주는 쑥 라테도 군소리 없이 받아먹을 테니 죽지 마라”고 말합니다.]
그거 아주 위험한 약속인데…….
앞으로도 온천의 요리 퀘스트를 수행해나가야 하는 나에게는 무척 솔깃한 제안이었다.
‘약속한 거다?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야. 새끼손가락 걸어.’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시스템창을 향해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딴소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며 새끼손가락을 거는 시늉을 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 “저건 악마와의 계약”이라면서 심각해집니다.]
‘운수야, 너는 어때? 나는 수가 많을수록 좋아서.’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나를 샤레니안과 같은 취급 하지 마라”며 정색합니다.]
역시 샤레니안이라서 통했던 건가?
이성을 되찾은 운수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깝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내게로 운수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런데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이냐”며 의문스러워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염라한테 뇌물을 줘서 명부를 조작하기라도 한 거냐”며 “저승 비리 신고는 444-4444번”이라고 합니다.]
‘비리라니! 정당하게 돌아온 거거든?’
내가 살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그간의 일을 되새기고 보니 썰로 다 풀려면 날밤을 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난 빠르게 길게 설명하길 포기했다.
‘다 말하긴 길고. 요약하자면…… 저승에서 개같이 부활했달까?’
실제로 퀘스트 보상이 ‘개같이 부활’이었고.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알고 보니 박수온, 너도?”라며 죽지 않고 돌아온 것에 동질감을 느낍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건 맞지. 1회성이긴 하지만…….’
이상한 부분에서 샤레니안과 공감대가 생겨버렸다.
‘그런데 너 전장에서 딴 데 정신 팔면 저번처럼 칼 맞는…….’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한눈을 팔다 불사의 병사에게 칼을 맞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저럴 줄 알았지.’
샤레니안은 통 학습이 안 된다니까.
머지않아 온천에 피범벅이 된 샤레니안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또 새살이 솔솔이 필요할지도…….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살아 돌아왔으니 이제 이건 필요 없겠다”며 짚으로 된 인형을 만들다 말고 집어 던집니다.]
‘아니, 대체 그 인형은 뭐에다 쓰려고 만든 건데?’
짚으로 된 인형이라니, 듣기만 했는데도 꺼림칙했다.
보통 저런 건 누굴 저주하는데 쓰는 거 아니야?
다른 성좌면 몰라도 운수라면 그쪽도 충분히 가능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네가 돌아오지 않으면 영혼을 인형으로 소환하는 주술을 쓰려고 했다”며 인형 주변을 둘러싼 촛불을 하나씩 불어서 끕니다.]
‘영혼을 인형 속에 넣어서 뭘 어쩌려고?’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비록 외양은 짚인형이지만 영원히 우리들의 계약자이자 온천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설명합니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자신 있는 거야?
장르는 완전 공포 영화잖아!
‘내 의사는 어쩌고 멋대로 영혼을 인형에 가둬?’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냐, 박수온 사전에 환불은 없다고”라며 “그러면 일해야지”라고 말을 덧붙입니다.]
환불은 없다는 말이 이렇게 무섭게 돌아올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다.
살아 돌아왔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평생 짚인형으로 살 뻔했네.
가만 보면 운수가 제일 무서운 놈이라니까.
‘그런데 어째서 베카랑 한 계약은 복구되지 않는 거야?’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두 팔을 손으로 매만지던 나는 시스템창에 베카가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가이드 ‘영계’가 “온천이 폐쇄되었다가 열린 상태이기 때문에 온천 사장의 사적인 동의로 맺은 계약은 다른 절차를 밟아야 복구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동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역시 베카를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는 걸까?’
그래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베카가 있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비록 샤레니안의 애착 때수건을 대체할 만한 물건을 다시 구해야 하겠지만…….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헌터 협회한테 수모를 당하면서도 날 기다리고 있는 베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가이드 ‘영계’가 “불길한 것을 다시 온천에 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각인이 새겨진 이상 해령님께도 누가 될 테니 말하겠다”며 “온천 이용권 판매 데스크를 열면 복구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는 못마땅해합니다.]
‘알려줘서 고마워. 영계야.’
영계가 베카를 불길한 것이라고 여기는 게 걸리긴 했지만, 지금은 베카에게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는 게 먼저였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면 영계도 자연스럽게 베카가 생각처럼 나쁘지 않다는 걸 알아주겠지.
[‘온천 이용권 판매 데스크(EX)’가 열립니다.]
난 곧장 데스크를 열었다. 그러자 눈앞에 또 다른 창이 떠올랐다.
[‘온천 이용권 판매 데스크 온천 사장의 권한에 의한 이용자’ 목록이 복구됩니다.]
[‘탑의 주인’과의 계약이 복구됩니다.]
계약이 복구되는 걸 확인한 나는 곧장 베카를 향해 소리쳤다.
‘베카, 나 돌아왔어!’
[‘탑의 주인’이 내 목소리에 반응합니다.]
‘이제 돌아와. 내가 있는 온천으로!’
반가워하는 시스템창이 곧장 돌아올 줄 알았는데 왜인지 잠잠했다.
‘베카, 베카! 나 돌아왔다구!’
하지만 시스템창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베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이렇게 반응이 없을 리가 없는…….
걱정스러워하는 그때.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