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에라 모르겠다
이건 말 그대로 큰일이었다.
난 급격하게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염려하는 건 베카가 아니었다.
잘못하면 병원에 실려 가는 정도가 아니라 여럿 송장 치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헌터 협회 쪽이.
부모님 때 일을 생각하면 당해도 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베카가 사람을 해치는 건 원하지 않았다.
모두가 베카를 삿되거나 두려운 존재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베카는 그저 오랫동안 탑에 갇혀 살아서 모든 것에 서툰 것뿐이지 사악한 존재는 아니야.
오늘만 해도 베카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나를 대신해서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탑의 최종 보스였다면 사람들이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
그 약속을 베카가 지켜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내가 보험 삼아 약속에 건 조건이었다.
내가 균열을 닫은 이후에도 이승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는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다는.
베카는 내가 죽었다는 걸 알았을 때 저승에 구멍을 내서라도 쫓아오려고 했다.
균열을 닫기 위해서 잠시 돌아왔을 때도 베카는 나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독이 바짝 올라 있었지.
도시 한복판의 하늘에 붉은 벼락을 내리꽂기도 했고…….
온천이 닫혀 있는 지금, 베카는 내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알 길이 없었다.
그 말은 즉, 베카가 온천이 다시 열릴 때까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건데…….
[폐쇄된 EX급 온천을 복구 중입니다. (76%)]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나는 시스템창에 떠오른 숫자를 초조하게 지켜봤다.
수치가 올라갈수록 투명했던 문이 점차 선명해지고 있는 게 보였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줘. 베카.
입술이 바짝 말라가는 것을 느끼며 다시 보고 있던 게시글로 눈을 돌렸다.
찬찬히 댓글을 읽어나가는 그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익명1 :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냐? 헌터 협회가 공격하는데도 베카는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익명2 : 내 말이. 벼락 한 번이면 헌터 협회 발릴 것 같은데. ㅎㄷㄷ
└익명3 : 베카 묶여서 겁나 맞고만 있는데?
베카가 공격받고도 가만히 있다고?
실시간으로 달리는 댓글 상황으로 봐서는 베카가 헌터 협회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반격하지 않고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익명4 : 베카가 공격을 못하는 이유라도 있나?
└익명5 : 그런 게 있을 리가. 잔인하고 감정을 못 느끼는 악명 높은 마탑의 주인인데?
└익명6 : ㅇㅈ. 오늘 46층 열망 레이드 팟 죽기 직전까지 뚜드려 맞다가 도망쳐 나왔다던데?
└익명4 : 그런데 베카가 왜 패지도 않고 당하고만 있는 거임?
왜냐면 베카는 나랑 한 약속을 지키고 있는 거야.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는 베카가 홧김에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이렇게나 노력해주고 있었는데…….
나도 완전히 베카를 믿지는 못했던 거야.
그걸 깨닫는 순간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하고 차오르며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보 베카, 공격을 피할 수도 있잖아. 왜 맞고 있는 거야?”
“그 녀석이 걱정되는 건가?”
안타까운 마음에 혼잣말하는 나를 조용히 지켜보던 해령이 내게 나지막이 물어왔다.
나는 대답 대신 그를 돌아봤다.
눈을 맞추었을 뿐인데 해령의 눈동자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어쩔 수 없군.”
별다른 말을 한 것도 아닌데 해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부채를 펼쳐 들었다.
그러자 푸른 용의 기운이 그를 휘감고 돌며 작은 바람이 일으켰다.
해령은 복구 중인 온천의 문에 바람을 전하듯 부채를 부쳤다.
그의 힘을 흡수하기라도 하듯이 투명했던 문이 선명해졌다.
[폐쇄된 EX급 온천을 복구 중입니다. (100%)]
동시에 복구 수치도 단번에 치솟아 올랐다.
[EX급 온천의 복구가 완료됩니다.]
[EX급 온천으로 온천 마스터키(EX)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온천 사장인 네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시 온천이 열린다. 그렇게 되면 손님들과의 계약도 다시 이어질 테고…….”
차분히 설명을 이어가던 해령이 기침을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어쩐지 그의 안색이 파리해 보였다.
“혹시 너도 몸이 안 좋은 거야? 내가 죽어버려서 타격을 받았다든가…….”
방금만 해도 이렇게까지 혈색이 없어 보이진 않았는데.
걱정스러운 눈빛을 받아내던 해령의 한쪽 눈썹이 일그러졌다.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네 성좌는 고작 그런 일로 타격을 입을 만큼 약하지 않다.”
옷소매를 쥔 손을 등 뒤로 감추며 거만하게 뒷짐을 진 해령이 나를 향해 실소를 터뜨렸다.
‘예예, 그러시겠죠.’
입이 살아 있는 걸 보면 멀쩡한 것 같네.
“그러게,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어.”
문으로 다가서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해령을 돌아봤다.
“넌 안 가?”
“난 아직 이곳에 볼일이 남았다. 그러니 먼저 온천으로 돌아가. 걱정하고 있잖아. 그 삿된 것을.”
“베카는 삿된 게 아니라니까!”
거세게 반박해봤지만 해령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베카가 걱정되는 건 맞지만, 왠지 해령을 두고 떠나려니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우는 얼굴을 처음 봐서 그런가?
묘하게 신경이 쓰이네.
해령이 쑥 라테를 먹고 배탈이 난 걸 숨긴 전적이 있는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 더 해령을 살폈지만, 방금처럼 기침을 한다던가 아픈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늘따라 유난히 더 핏기가 없어 보이는 것 같긴 한데……. 내 착각인가?
하긴……. 해령은 원래가 피부가 하얀 편이기도 했고 염라는 더 창백하니까.
피부색으로 봤을 때는 염라가 더 아파 보이긴 해.
지금 해령이 아픈 상태라면 염라는 일찍이 병상에 드러누워야 했을 혈색이었다.
나름 일리가 있는 추측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던 난 해령을 똑바로 바라봤다.
“빨리 돌아와.”
내 말에 딴청을 피우고 있던 해령이 나를 돌아봤다.
평소의 나를 잘 아는 그는 얼핏 보아도 내 말에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네가 만든 쑥 라테 먹고 싶으니까! 빨리 오라고…….”
민망함에 생각나는 대로 이유를 덧붙였다.
그러자 해령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부려먹는군.”
“싫어도 할 수밖에 없을걸? 안 그러면 온천에 모든 식구들이 네가 날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누가 서럽게 울었다는 거냐?”
툴툴거리던 해령이 당당하게 협박을 하는 내게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그럼 아니야?”
“……서러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열을 올린 탓인지 답하는 해령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울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네?
끝까지 그런 적 없다고 우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인정이 빨라서 조금 놀랐다.
뭐, 해령이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좀 솔직해져볼까?
“미안해.”
눈물을 흘리는 해령을 봤을 때, 그가 진심으로 나를 잃은 것에 슬퍼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말을 꺼내는 게 낯간지러워서 그냥 넘어갈까 생각도 했지만, 전하고 싶었다.
“살아 돌아오긴 했지만 어쨌든 걱정을 끼쳤으니까.”
고맙고 미안한 것과 동시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이 감정을, 조금이라도.
그런데 막상 말하고 나니까 생각한 것 이상으로 민망했다.
속마음을 전하는 데에 면역이 없는 난 차마 해령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다급하게 온천으로 가는 문의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온천 마스터키(EX)’를 사용합니다.]
[히든 필드 ‘온천(EX)’으로 이동합니다.]
* * *
수온이 문안으로 사라진 뒤에도 해령은 한참이나 같은 곳을 바라봤다.
“정말 제멋대로군.”
못 당해내겠다는 듯이 해령은 커다란 손으로 몽환적인 은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수온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항상 예고도 없이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멋대로 죽어서 속을 뒤집어놓더니 방금은 또…….’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는 쑥스러웠는지 달아나버리는 수온의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떠올린 해령은 마음이 뭉근해지는 것을 느끼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 자꾸 휘둘리고 마는 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정신을 차리고 보면 항상 수온의 말에 따르고 있었다.
‘각인에 아직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나?’
이 모든 게 수온에게 새긴 각인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던 해령이 연이어 거친 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해령님, 괜찮으십니까?”
이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영계가 온천 문을 박차고 나와 재빨리 해령에게 달려왔다.
자리에 주저앉은 해령의 옷소매가 붉은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제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대체 뭐가 급하다고 무리해서 온천을 복구하신 겁니까? 건강한 몸으로도 족히 3일은 걸리는 일을! 힘을 되찾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불안정한 상태로 몇 분 만에……!”
영계가 해령의 핏자국을 보고 소스라치며 놀라더니 잔소리를 늘어놨다.
EX급 온천은 오로지 해령의 힘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러니 복구를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기력이 소진됐다.
성좌의 족쇄를 끊어내는 데도 적지 않은 마나를 사용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온천을 복구시키는 건 몸에 적지 않은 무리를 줄 거라는 것은 해령도 일찍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해령은 두 눈이 촉촉이 젖은 채 베카를 걱정하는 수온을 떠올렸다.
“머리가 울리니 그 정도만 해라.”
많이 놀란 건지 울먹이는 영계를 위로하듯 해령은 작은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이럴 줄 알고 약 항아리에게서 약을 받아왔으니 일단 드시고 잠시 안정을 취하십시오.”
영계가 준 약을 단번에 들이켠 해령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약은 잘 먹었다.”
“또 어디에 가십니까? 약을 드신 후에 바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잠시라도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니까요!”
“빨리 돌아와.”
영계의 만류에도 해령의 머릿속에는 수온이 남기고 간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난 어째서 박수온의 말을 일일이 신경 쓰고 있는 거지?
“역시…… 각인 때문인가?”
풀리지 않는 의문에 궁리하면서도 어느새 해령의 발은 홀린 듯이 온천으로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