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X됐다
[차가운 용의 기운이 몸에 깃듭니다. 3단계 스킬 ‘용의 포효(SSS)’가 개방됩니다.]
시스템창의 문구를 보는 순간, 시원한 바람 같은 것이 심장을 타고 들어와 온몸에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푸른색 파동에 기다란 은발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스탯 ‘마나’가 개방됩니다.]
[스킬 ‘용의 포효(SSS)’를 사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마나가 지급됩니다.]
[스킬 ‘용의 포효(SSS)’의 효과로 마나가 10000 상승합니다. <마나(10000/10000)>]
뭐지?
손끝에 전기가 이는 것처럼 저릿저릿해.
특수 스탯 XX의 정체를 알아내기도 전에 새로운 스킬이 개방됐다.
SS급도 아니고 SSS급 스킬이라고?
SS급 스킬도 태초의 바람 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SSS급 스킬이라니…….
나, 대단하잖아?
염라의 각인을 얻은 것에 이어 SSS급까지 얻다니. 짧은 시간에 헌터계에 한 획을 긋고도 남을 수확을 얻었다.
그것도 이렇게 쉽게 얻어도 되는 건가?
뭔가 불안한데…….
SSS급 스킬을 얻기까지 내가 한 일이라고는 퀘스트 보상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시스템이 나한테 순순히 스킬을 내어줄 리가 없다.
단언컨대 시스템이 내게 호의적으로 굴어서 결과가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지?
‘XX’는 또 뭐고…….
온천 지배자의 XX라고 했으니까 해령과 연관이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뭐가 있을까?
설마…… 욕?
나는 아직도 기억 한편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해령의 시스템창을 떠올렸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눈으로 험한 말(★☆★☆★☆★☆★☆★☆)을 쏟아냅니다.]
해령은 이미 험한 말로 시스템창의 필터링을 거친 전적이 있었다.
보통은 욕설을 썼을 때 X로 필터링 되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욕을 9999번이나 했을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던 나는 얼마 안 가서 다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뱉은 건 얼마 안 되지만 속으로 욕한 것까지 치면 9999번이 될 수 있을지도…….
취향을 타긴 해도 욕은 때로 친밀함을 표현하는 지표가 되기도 하니 완전히 아니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9999번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다른 걸 수도 있어. 다시 생각해보자.
온천에 들어온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이제야 퀘스트가 완료된 걸 보면 해령에게 없던 것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해령이 하지 않았던 특별한 행동을 했다든가?
순간 머릿속으로 날 바라보며 구슬프게 울던 해령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온천 지배자의 눈물인가?
아니야.
그렇다기에는 수치가 너무 높았다.
해령이 운 건 이번이 처음인걸.
나는 역으로 해령과 나 사이에서 높은 수치로 환산할 만한 걸 떠올려보기로 했다.
음……. 수치가 높을 만한 거라면 역시 분노인가?
해령은 종종 나를 못 마땅해하기도 했고.
이번에는 정말 온천까지 날려 먹을 뻔했으니 분노가 극에 달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분노 수치가 높으면 친밀도랑은 거리가 멀지.
친밀도에 가까운 쪽이라면 분노보다는 호감인데…….
나에 대한 해령의 호감 지수가 9999일 확률은…….
나는 슬쩍 고개를 움직여 내 어깨에 턱을 괴고 있는 해령을 돌아봤다.
그의 보석 같은 벽안에 의문이 가득한 내 모습이 비쳤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지?”
그 눈길이 부담스러운 건지 해령이 미간을 좁혔다.
하, 저게 어딜 봐서 호감 수치가 9999인 사람의 얼굴이야?
원래 호감도가 높으면 눈길 한 번에 설레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해령은 당장 싸우자고 해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됐어. 방금 네 표정만으로 충분히 답은 나왔거든.”
“그보다 너…….”
긴 한숨을 내쉬며 체념하려는데 해령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며 나를 유심히 살폈다.
“뭔가 달라졌나?”
그래! 특수 스탯 XX는 해령과 연관되어 있었지?
그렇다면 스탯의 변화도 해령이 제일 크게 느낄 게 분명했다.
“달라진 게 뭔지 알겠어?”
해령이라면 XX가 뭔지 알지도 몰라.
기대감을 안고 해령을 바라보자 그가 긴 손가락을 뻗어 나를 가리켰다.
“네게서 강한 용의 기운이 느껴져. 이전보다 내 힘에 가까워진.”
아…….
스킬을 획득하면서 몸에 깃들었다는 용의 기운을 느낀 거였나?
“3단계 스킬을 얻었거든. 이름이 용의 포효였나?”
해령에게 스킬 이름을 말하는 찰나였다.
심장에서부터 냉기가 차오르더니 숨결이 차가워졌다.
잠깐만, 설마…….
난 서늘한 기운이 머릿속을 스치는 걸 느끼며 시스템창으로 눈을 돌렸다.
[스킬 ‘용의 포효(SSS)’를 사용합니다.]
[스킬 ‘용의 포효(SSS)’로 마나가 10000 소모됩니다. <마나 : 0/10000>]
무슨 스킬 한 번 사용하는데 마나가 10000이나 소모돼?
게다가!
“스킬 이름을 말하면 바로 사용된다는 말은 없었잖아?”
난 스킬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상황은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열기가 차오르는 던전에서 숨을 불어내자 드라이아이스처럼 시원한 연기가 피어났다.
구름처럼 피어난 연기는 던전을 집어삼킬 듯한 커다란 용의 형상으로 변했고, 거대한 입을 쩍 벌리며 땅이 크게 흔들릴 정도로 울부짖었다.
동시에 용의 차가운 숨결에 던전과 함께 몬스터들이 통째로 얼어붙으며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보상인 발그레 바나나만이 남겨졌다.
[스킬 ‘용의 포효(SSS)’로 필드에 있는 모든 몬스터(S급 이하)가 즉사합니다. <쿨타임 : 3분 00초>]
[스킬 ‘용의 포효(SSS)’의 효과로 던전에 10초 동안 몬스터가 리젠 되지 않습니다.]
이게…… SSS급 스킬의 위력이구나!
바나나가 A급 몬스터이긴 했지만 적지 않은 수였는데 순식간에 날려버리다니…….
게다가 S급 몬스터에게까지 즉사가 적용되는 것 같고.
현재 1위 랭커인 박시우도 S급 몬스터를 즉사시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기량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던전 안에 해령하고 나뿐이어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뒤를 잇는 끔찍한 상상에 나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제는 무서워서 스킬 이름도 마음대로 말 못하겠네.”
이건 뭐 볼X모트도 아니고.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이름이 생겨버렸다.
“네가 마나를 다루는데 서툴러서 그렇다. 능숙해지면 네가 원할 때만 힘을 사용할 수 있다. 보아하니 적지 않은 수련이 필요해 보인다만…….”
투덜거리는 나를 보며 해령은 갈 길이 멀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가망 없다는 표정 짓지 말아줄래?
나도 갖고 싶어서 생긴 능력이 아니거든?
“그것보다 이 틈을 타서 발그레 바나나나 주워볼까?”
갑자기 죽는 바람에 주웠던 바나나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장소에 두 번은 오고 싶지 않으니까 주워두는 게 좋겠지.
해령의 충고를 들은 척도 하지 않은 나는 곳곳에 떨어진 발그레 바나나로 눈을 돌렸다.
그때 눈앞이 빙글빙글 돌며 어지러워졌다.
속이 울렁거려.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는 나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해령이 허리에 팔을 둘러 부축해 일으켰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용의 포효는 대량의 마나를 소모한다. 그러니 마나가 적은 사람이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몸에 무리가 가고 말지.”
어쩐지 최소한의 마나만 준다고 할 때부터 불안하다 했다.
정말 가지가지 하네.
무슨 스킬이 이렇게 까다로워?
시스템도 그래, 이왕이면 마나도 넉넉하게 넣어주면 좀 좋아?
PC방 사장님도 서비스 시간은 넣어주는데 가만 보면 소금보다 더 짜다니까.
“마나가 0일 때 용…… 아무튼 그걸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데?”
무심결에 스킬 이름을 뱉을 뻔했지만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입이 그런 불상사만은 막아주었다.
나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보통은 피를 토하면서 죽는다.”
오우, 나…… 방금 죽을 뻔했네?
이미 0에 도달한 마나를 보는 순간, 온몸에 털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 같았다.
“한 번 더 입에 올렸다가는 또 죽어서 베카가 저승을 쑥대밭으로 만들 뻔했…….”
맞다! 베카!
베카를 까맣게 잊고 있었잖아!
이제서야 베카가 떠올랐다.
분명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지옥귀를 상대하고 있을 텐데…….
이제까지 반응이 없었던 걸 보면 베카는 아직 내가 부활한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염라가 온천이 폐쇄되어서 다른 계약자들과 소통이 불과한 상태라고 했었지?
그래서 운수도 샤레니안도 조용했던 건가?
그렇지만 해령은 힘을 되찾은 것 같았는데?
온천은 왜 복구되지 않은 거지?
“해령, 혹시 지금도 온천이 폐쇄된 상태야?”
“아, 그러고 보니 온천을 복구시키는 걸 잊었군.”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 건지 알 리 없는 해령은 태평했다.
어쩌면 베카는 균열을 닫았는데도 내가 돌아오지 않아서 폭주하고 있을지도 몰라!
당장 베카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없으니까 다른 방법으로 연락을 취하는 수밖에 없어.
“해령, 온천을 복구시켜! 빨리!”
나는 곧장 해령의 옷깃을 붙들고 흔들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러다 베카가 또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면 그땐 다 죽는다고!”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몰라도 그 속이 시커먼 녀석이 무슨 일을 벌인 게 틀림없다는 건 알겠군. 그러게 영계가 삿된 녀석은 가까이하지 말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하지 않았느냐?”
새파랗게 질린 채 소리치는 내게로 해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잔소리를 쏟아부었다.
급해 죽겠는데 진짜!
“우리 베카는 삿된 존재가 아니거든? 다른 소리 말고 빨리 온천부터 복구시키라니까!”
“알았으니까, 일단 흥분을 가라앉혀라. 마나가 소진된 상태로 그렇게 열을 올리다가는 쓰러진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진정시킨 해령이 부채를 펼쳐 상하좌우로 움직였다.
그러자 희미하게 네모난 테두리가 생겨났다.
그건 꼭 온천의 문 같았다.
[폐쇄된 EX급 온천을 복구 중입니다. (23%)]
“뭐야! 바로 열리는 거 아니었어?”
“복구까지는 아주 조금 시간이 걸린다.”
속이 타들어가는 나와는 달리 해령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이었다.
“미치겠네!”
지금 베카의 상황을 알 수 있을 만한 게 없을까?
고민하는 그때, 익명 헌터 게시판이 떠올랐다.
거기라면 실시간으로 베카의 소식을 알 수 있을 거야!
답답한 마음에 곧장 익명 헌터 게시판으로 접속했다.
[HOT] <베카 보스몹 아니냐>
예상대로 게시판 상단에는 베카와 온천 사장에 관한 이야기들이 연달아 올라와 있었다.
난 빠르게 베카에 관련된 글을 눌렀다.
근데 왜 우리를 지키는 것 같지? 벼락 한 방에 지옥귀들 순삭.
* * *
└익명1 : 그러니까 헌터 협회 놈들보다 나은데?
└익명2 : 헌터 협회는 갓베카한테 월급을 반납해라!
└익명3 : 새삼스럽긴 한데 베카 클라스 레전드…….
└익명4 : 이 정도면 베카, 흑막 최종 보스가 아니라 영웅 아니냐?
└익명5 : ㅆㅇㅈ
글이 5분 전에 올라온 걸로 봐서 다행히도 아직까지 베카의 상태는 양호한 것처럼 보였다.
[폐쇄된 EX급 온천을 복구 중입니다. (53%)]
조금 있으면 온천도 복구될 것 같고…….
무사히 넘어가려나?
습관적으로 새로고침을 누르는 그때, 베카에 관한 새로운 게시글이 떠올랐다.
<현시각 베카 상황>
* * *
[사진]
게시글에 떠오른 사진을 보는 순간, 스크롤을 내리던 내 손이 굳은 듯이 멈췄다.
헌터 협회가 베카 공격함
……X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