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XX
해령, 너 울어……?
막 이승으로 돌아온 탓인지 시야가 물을 먹은 것처럼 흐릿해서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해령의 맑은 바다색 눈동자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 꼭 눈물 같았다.
뭐지, 내 눈에 문제가 있는 건가?
아픈 과거를 나눌 정도로 가까워지긴 했지만, 해령이 내가 죽었다고 해서 서럽게 울 것 같지는 않았다.
무영이 이승을 떠난 순간을 이야기할 때도 슬픈 얼굴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보이진 않았잖아?
죽었다 살아나면서 꿈을 꾸는 건가?
새삼 느끼는 거지만 해령은 우는 얼굴도 참 잘났단 말이야?
호수처럼 맑고 청량한 외모로 울고 있으니 눈에서 나오는 게 새벽녘의 이슬처럼 보였다.
꿈이라는 건 알지만 너무 서럽게 우니까 마음이 쓰이잖아.
난 손을 뻗어 눈 밑이 발개진 채로 흐느끼는 해령의 열기 어린 뺨을 매만졌다.
“……박수온?”
축축하게 젖은 뺨이 내 손끝을 적셨을 때, 해령이 떨리는 손으로 자신에게 닿아 있는 내 손을 감아쥐며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의 손목에는 못 보던 족쇄 같은 것이 채워져 있었다.
어라?
꿈이라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생생한데?
게다가 점차 시야도 맑아져서 해령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거…… 꿈이 아니었나?”
혼란스러운 듯 혼잣말을 하고 있던 그때, 해령이 고개를 숙여 내게 다가왔다.
순식간에 훅 들어온 그의 숨결이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고개를 비스듬히 튼 해령이 내 얼굴에 귀를 가져다 댔다.
“다시 숨을 쉬고 있어…….”
해령이 내 생사를 확인하면서 놀라는 걸 보니까 확실히 꿈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숨을 쉰다는 걸 확인한 해령이 믿을 수 없어 하면서도 악몽이 끝난 걸 알아차린 듯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해령, 나 죽다 살아난 기념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묻지 마.”
생생한 내 목소리에 불길함을 직감한 듯 해령은 낮춘 몸을 일으킬 생각도 못하고 내게서 고개를 돌린 그대로 딱딱하게 답했다.
사실 해령의 대답이 뭐든 상관없었다.
“너 진짜 울어?”
난 어차피 물어볼 생각이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울긴 누가 울었다고.”
“안 우는 거면 얼굴 좀 보여주든가?”
내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얼굴을 보려 하자 해령이 내 어깨를 안아 자신의 품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
은근슬쩍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해령이 슬쩍 말을 돌렸다.
운 탓인지 그의 목소리가 반쯤 잠겨 있었다.
누가 봐도 운 거 맞잖아.
“의외네, 온천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내가 죽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굴더니.”
해령을 놀리는 데에 재미를 붙인 난 그의 가슴팍에 갇혀서도 계속해서 재잘댔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성질을 부릴 줄 알았는데 해령은 의외로 차분하게 답했다.
그때와 다르다는 건 베카가 그랬던 것처럼 해령에게도 내가 소중해졌다는 의미인가?
하긴 해령이 좀 툴툴거리긴 했어도 돈가스 도시락도 싸주고 내가 지쳐 있을 때마다 밥도 챙겨줬으니까.
제때 먹을 거 챙겨주는 건 솔직히 진짜 애정 없이는 힘든 거 아닌가?
솔직히 내 밥 챙겨 먹기도 귀찮은 게 현실이잖아.
날 생각해주는 해령의 마음에 감동하려는 그때.
“너한테 내 각인이 새겨져 있는 이상, 네가 죽으면 내가 곤란하니까.”
뒤이은 해령의 말에 훈훈했던 감상들이 유리처럼 와장창 깨졌다.
그럼 그렇지…….
힘을 박탈당한 데다가 애지중지하는 온천까지 폐쇄됐으니 눈물이 날 만큼 슬프셨겠지.
내가 대체 누구한테 뭘 기대한 거야?
차갑고 까칠한 철 수세미 성좌 같으니라고.
차라리 샤레니안의 애착 때수건이 더 부드럽겠다.
“그래그래, 잘 알았으니까 이제 좀 떨어져줄래? 갑갑하거든?”
급속도로 뾰루퉁해진 나는 단호하게 해령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뒤늦게 나를 부둥켜안고 있었다는 걸 인지한 건지 그는 화들짝 놀라며 내게서 물러났다.
“아이고……. 죽겠네.”
죽다 살아난 탓인지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뻐근했다.
“죽겠다니……. 숨쉬기가 힘든 건가?”
어깨 근육을 풀려고 가슴팍에 손을 얹은 것뿐인데 앓는 소리에 해령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부축하고 나섰다.
눈가가 붉게 상기되어 있는 탓인지 그의 눈길이 꼭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도 내 착각이겠지. 쳇.
“조금 근육통이 있을 뿐이야. 다른 덴 멀쩡하니까 부축할 필요는 없어.”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해령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때였다.
“킥!”
맞은편에서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눈을 돌린 그곳에는 볼 빨간 바나나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맞아. 나 던전에서 사냥하다가 죽었었지?
저승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내 몸이 어디에 있는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바나나의 서늘한 웃음을 마주하는 순간, 내 죽음의 순간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절로 몸이 경직되었다.
아무래도 죽음에 영향을 준 몬스터여서인지 두려움이 느껴졌다.
몬스터를 의식하자 던전 곳곳에 있는 볼 빨간 바나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포감에 몸이 돌처럼 굳어가는 그때.
“몬스터에게서 물러나라.”
한껏 예민해진 목소리의 해령이 보호하듯 나를 한 팔로 가리고 섰다.
내 죽음에 충격을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온천 그 자체인 성좌가 온천을 잃을 뻔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길 만도 했다.
[계약자 ‘박수온’의 부활로 계약이 복구됩니다.]
동시에 해령의 두 손목을 두르고 있던 두꺼운 옥으로 된 족쇄에 푸른 기운이 감돌더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족쇄는 이내 두동강이 나며 떨어져 나갔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성좌의 족쇄’에서 해방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성좌의 권리와 힘을 되찾습니다.]
족쇄에서 해방된 해령과 나의 주변으로 거대한 은빛 용의 형상이 휘감고 돌자 던전 안의 몬스터들이 진땀을 흘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몬스터들이 멀어지자 혼미했던 정신이 되돌아왔다.
겁낼 것 없어. 부채의 힘을 쓰면 바나나 몬스터를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일단 만약을 대비해서 사우나 가운부터 챙겨 입자.
다급하게 인벤토리 창에서 사우나 가운을 꺼내 여며 입는 그때였다.
[!!이벤트 발생!! 성좌 ‘온천의 지배자’의 특수 스탯의 급격한 증가로 ‘성좌의 부채(EX) ― 3단계 스킬 개방 친밀도 퀘스트’가 자동 진행 됩니다.]
[성좌의 부채(EX) ― 3단계 스킬 개방 친밀도 퀘스트 완료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성좌의 부채(EX) ― 3단계 스킬 개방 친밀도 퀘스트를 확인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시스템창이 파란 빛을 내며 떠올랐다.
친밀도 퀘스트면 우나가 흑화 했을 적에 손잡기, 손깍지 끼기, 심쿵 시키기 등 해령과의 스킨십을 유도했던 악질적인 퀘스트를 말했다.
그런데 3단계 스킬 개방 친밀도 퀘스트 완료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딱히 해령과 친밀해질 만한 행동을 한 게 없는데?
뭐, 퀘스트를 확인해보면 알겠지.
난 망설임 없이 수락 버튼을 눌렀다.
[3단계 스킬 개방 친밀도 퀘스트 ‘성좌 봉인 해제 시키기(1)’를 확인합니다.]
[3단계 스킬 개방 친밀도 퀘스트 ‘성좌 봉인 해제 시키기(1)’를 완료했습니다. 친밀도 1000을 획득합니다.]
[마지막 친밀도 퀘스트 ‘성좌 봉인 해제 시키기(2)’가 자동 진행 됩니다. 퀘스트를 확인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방금 뭐가 떴다가 사라진 것 같은데…….
다시 보고 싶었지만 이미 퀘스트가 완료된 후라 보이지 않았다.
뭐지? 이 똥 싸다 만 기분은?
찜찜해하는 것도 잠시 시스템창의 마지막 문구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음이 바로 마지막 퀘스트라고?
게다가 이번에도 퀘스트도 자동 진행이 된다고 하는 걸 보니 바로 완료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번에는 눈 크게 뜨고 무슨 퀘스트인지 보고 만다!
“눈에…… 문제가 생겼나?”
눈동자를 아래위로 움직이며 준비 운동을 하고 있는 나를 해령이 한껏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아니야. 나 지금 중요한 퀘스트 중이니까 방해하지 마.”
“보통 문제는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이제는 날 보호하듯이, 아예 내게 두 팔을 두른 채 어깨에 턱을 기댄 해령이 내 근처에 있는 몬스터들을 무서운 눈으로 지켜봤다.
그에게 위협을 느낀 듯 바나나들이 바들바들 떨며 짤막한 몸뚱이를 조금씩 뒤로 옮겼다.
“갑자기 샤레니안이 했던 말이 생각나네.”
“그 녀석이 뭐라고 했는데?”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이런…….”
험한 말을 쏟아낼 것 같은 해령을 뒤로하고 수락 버튼을 눌렀다.
적어도 욕하는 동안에는 훼방을 놓지 않겠지.
행여 한 글자라도 놓칠까 나는 눈을 부릅뜨고 시스템창을 바라봤다.
[3단계 스킬 개방 친밀도 퀘스트 ‘성좌 봉인 해제 시키기(2)’를 완료했습니다. 친밀도 2000을 획득합니다.]
이번에도 역시 시스템창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지만 퀘스트 내용만큼은 확실히 봤다.
그런데 어째 내용을 알기 전보다 찜찜해져버렸다.
난 조금 전에 봤던 퀘스트 내용을 조심스럽게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의 XX 1000달성 하기 (9999/1000)]
그래서 XX가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