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금단 현상
[성물 ‘저승의 눈(EX)’의 사용 권한이 나에게 완전히 귀속됩니다.]
[비흡연자에게는 성물 ‘저승의 담뱃대(EX)’의 사용이 제한됩니다.]
[스킬 ‘저승의 명부(EX)’를 획득합니다.]
진짜 염라의 각인이 발현됐잖아?
염라가 흑발이어서인지 해령 때처럼 은발이 되거나 머리색이 바뀌진 않았지만 붉은 눈동자며 사뭇 엄숙하고 고고한 분위기가 누구와 똑 닮아 있었다.
사자가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말한 건 각인 때문이었구나.
나는 자연스럽게 지금의 나와 닮아 있는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판사석에 앉아 있던 그가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왔다.
“염라, 혹시 나한테 각인 새겼어?”
사실 이 각인이 염라의 뜻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난 히든 퀘스트 최종 보상이라는 명목으로 각인을 받은 거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염라가 의도해서 각인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운수에게 들은 바로 각인은 성좌에게 계약자를 지킬 수밖에 없는 족쇄 같은 것이라 했다.
즉, 계약자는 원할 때마다 성좌의 힘을 빌려 쓸 수 있으니 대환영이었지만 성좌에게는 좋을 게 없다는 거지.
해령만 해도 내게 각인해놓고 당장 무르자고 난리를 부렸잖아.
만약에 염라가 각인에 대해 추궁해 물으면 뭐라고 설명하지?
히든 퀘스트에 대해서 솔직히 말해야 할까?
“그렇다.”
내 예상과 달리 염라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내게 각인을 새긴 것을 수긍했다.
진짜? 진짜로 염라가 각인을 새겼다고?
“어느 틈에? 어떻게?”
각인을 새기려면 해령처럼 입맞춤한다든가…….
뭔가 특별한 액션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재판부터 균열을 막는 것까지 너무나 많은 일이 있던 터라 나는 염라가 각인을 새긴 시점을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다.
“네게 목걸이를 넘겨줬을 때. 이렇게.”
염라는 눈 깜짝할 새 힘줄이 선 손으로 내 손등을 쥐며 그때를 재현하듯 입을 맞춰왔다.
손등에 입술이 닿은 짧은 순간, 내게로 고정된 염라의 붉은 눈동자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아, 그때였나?
저승의 눈을 넘겨받을 때 염라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춘 것이 떠올랐다.
그건 단순히 목걸이의 권한을 넘겨주려고 한 행동인 줄 알았는데…….
무엇보다 그때는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 하기도 전이잖아.
보상이 이럴 거라곤 염라도 짐작하지 못했을 거고…….
그 말은 히든 퀘스트 최종 보상 때문에 염라가 내게 각인한 건 아니라는 말이 됐다.
그럼 왜 각인한 거냐고?
어째 답을 듣기 전보다 염라의 속내를 알기 어려워졌다.
“다시 해보라고는 안 했는데…….”
심란한 와중에 연이은 염라의 손등 키스로 인해 저승인들의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이편이 떠올리기 쉬울 테니까.”
무안할 법도 한데 염라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뭐, 확실히 효과는 좋았지.
각인 시점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알아들었으니까.
“그럼 좀 놔줄래?”
나는 염라의 손에 잡힌 내 손을 그의 눈앞으로 들어 보였다.
오히려 내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염라가 부자연스럽게 손길을 거둬들였다.
지금 염라가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것 같은데?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편이긴 했지만 내 눈에는 염라의 당혹스러움이 분명히 보였다.
“솔직하게 방금 당황했지?”
보기 드문 구경거리에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염라를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작게 웃었다.
한결같은 평온함을 유지하던 그의 미간이 작게 일그러졌다.
“실없는 소리. 그저 손이 허전했을 뿐이다. 보통은 담뱃대를 늘 손에 쥐고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재판장에 들어올 때만 해도 염라는 담뱃대를 들고 있었지?
온천탕 안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그 정도면 거의 담뱃대랑 한 몸인 거 아냐? 완전 꼴초.’
“다 들린다.”
내 속마음을 들은 염라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아, 들렸어? 혼자만 생각한다는 게…….”
“이상하군. 꼭 들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바라보는 염라는 이미 내 의도를 읽은 것 같았다.
눈치가 빠르네.
샤레니안이었으면 몰랐을 텐데…….
“내 정체를 알고도 겁 없이 구는 계약자에게 각인을 준 게 잘한 일인가 싶군. 앞으로는 또 얼마나 무모하게 굴지…….”
염라는 벌써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내 속마음을 듣는 게 처음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그래도 오늘은 이쯤 해둘까?
일이 많은 그가 내심 안쓰러웠던 터라 나는 더 놀리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늘 담뱃대가 자리하고 있던 염라의 손으로 눈길을 돌렸다.
“없어서 허전할 정도면 담뱃대를 들고 있으면 되잖아.”
염라 정도면 금단 현상이 어마어마할 텐데?
온천에도 담뱃대를 챙겨갈 정도니까.
나는 유난히 허전해 보이는 염라의 손으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잃어버렸다.”
한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염라가 얼버무리듯이 답했다.
“잘됐네! 냄새도 독하고 몸에 좋지도 않은 건데 이참에 끊어버려! 아니지…… 성좌니까 딱히 상관없으려나?”
“그러고 보니 네겐 그 향이 독하게 느껴진다고 했었지…….”
혼잣말처럼 뭔가를 읊조리던 염라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응? 뭐라고?”
“됐다. 그대가 알 필요 없는 말이다.”
내 되물음에 염라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반응이 까칠한 걸 보니 금단 현상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그것보다 넌 알고 있었던 거네? 내가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염라의 각인이 내게 있다는 건, 내가 죽었을 시에 그도 페널티를 받는다는 말이 됐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위기에 놓였을 때는 염라가 대신 타격을 받았을 테고.
“말하지 않았나? 그대가 죽을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러고 보니 내가 이승에서 입구 컷 당하기 직전에 염라가 그런 말을 했었지.
이제야 염라가 확신에 차 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그런 건 미리 말해주면 어디 덧나나?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그대는 아직도 한참은 모른다. 그대가 계약한 상대가 어떤 존재들인지에 대해서.”
염라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염라의 말대로 난 성좌들에 대해서도, 베카에 대해서도 아는 부분이 많지 않았다.
“베카만 해도 그대가 죽게 두지 않았겠지. 그대를 살리려고 저승까지 뚫고 들어오려 했으니까.”
그것도 맞아.
정작 나는 베카가 나를 그 정도로 아끼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지만…….
하지만 보통은 모르는 게 맞잖아?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을 맞대고 산 가족끼리도 다 알기 어려운 건데.
중요한 건 내가 베카를 포함한 성좌들과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그들에 대해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거였다.
“그건 문제 될 게 없지. 모르면 차차 알아가면 되는 거니까. 이제 너희들은 내가 죽을 때까지 함께 지내게 될 텐데 서두를 건 없잖아, 그렇지 않아?”
난 잘 지내보자는 뜻에서 염라를 향해 씩씩하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라…….”
‘함께’라는 단어에 염라는 낯을 가렸다.
그 모습이 마치 세상을 쭉 혼자 살아온 사람처럼 고독해 보이기도 했다.
“내키지 않으면 어쩔 수 없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못 이긴 내가 장난스럽게 손을 거둬들이려는 그때였다.
염라의 커다란 손이 달아나는 내 손을 붙들어 에워쌌다.
“그대는 성격이 너무 급해.”
악수하자는 뜻이었는데 졸지에 염라에게 손이 잡힌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뭐, 뜻은 통하는 거니까 딱히 상관없나?
그럼 이제 더 가까워지기로 한 거니까 툭 터놓고 물어볼까?
“염라, 나한테 각인한 이유가 뭐야? 솔직히 그냥 죽게 둬도 상관없었잖아.”
“그대여야만 하니까.”
염라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나를 바라보며 주저 없이 답했다.
그 눈빛이 너무 확고해서 할 말을 잃고 있는데 그가 차분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온천 주인 말이다. 무영의 말대로 해령은 어지간히 까다로운 게 아니니까 분명 마음에 드는 계약자를 다시 찾는 건 어려울 게 뻔하다.”
그럼 그렇지.
결국에는 온천이 운영되는 게 중요했던 거구나?
예상은 했지만 어쩐지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무영님은 어디 계셔? 돌아온 뒤로 통 안 보이시는데.”
온천 이야기가 나오니 해령이 떠올랐다.
“무영은 증언을 하고 곧장 돌아갔다.”
그럴 수가!
비록 해령이 온천을 다시 열긴 했지만, 아직도 무영을 생각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는데…….
무영이 돌아가버렸다니 왠지 맥이 빠졌다.
무영은 해령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없었나?
증언을 들어보면 무영도 해령이 자신을 그리워한다는 걸 모르는 것 같지 않았는데 말이야.
[성좌 ‘온천의 지배자’와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의문을 품고 있던 그때, 이승에서 해령을 불렀을 때 봤던 시스템 문구가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내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해령이 성좌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온천도 폐쇄된 상태라고 했었지?
해령이 페널티를 받았다는 생각에 어쩐지 마음이 급해졌다.
정나미라고는 없을 것 같은 까칠한 얼굴로 뭐든 혼자 척척 해내다가도 오랜 벗을 잃어버린 것에 금세 가슴이 먹먹해지는 표정을 짓는 해령이 떠올랐으니까.
물론 나와 함께한 시간은 짧았으니까 해령이 그런 표정을 짓지는 않겠지만…….
대신 나 때문에 해령이 좋지 못한 기억을 다시 상기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난 이제 이승으로 돌아가야겠어. 어디로 가면 돼?”
난 이승으로 가는 문을 찾기 위해 재판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이제는 너도 저승의 눈이 있으니 혼자서도 이승과 저승을 오갈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내가 네 육신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도록 하지.”
염라가 나를 떠나보내기 위해 판결봉을 집어 들었다.
이승으로 보낼 때마다 망치를 드는 거…… 나만 이상해 보여?
맞는다고 아프진 않겠지만, 뭔가 꺼림칙했다.
“망자여, 이제 이곳을 떠나는 건가? 크릉…….”
내가 떠날 조짐을 보이자 저승사자가 울먹이며 내게로 다가왔다.
그동안 정이 들었는지 헤어지는 게 아쉬운 것 같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이승으로 돌아가더라도 꼭 온천에 초대해서 돈가스를 대접할 테니까.”
“그게 가능한가? 크릉!”
“제 성좌가 염라대왕이신데 뭘 못할까요?”
내 성좌가 염라라는 말에 반신반의하던 사자도 눈물을 훔치고 환하게 웃으며 내게 두툼한 손을 흔들면서 인사했다.
“그럼 또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망자여. 크릉! 부디 이승에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라!”
“사자 님도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사자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전하고 염라를 돌아보자 그가 판결봉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동시에 환한 빛이 내 시야를 덮쳤다.
[이승으로 ‘개같이 부활(1회)’합니다.]
시스템창과 함께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얼굴로 축축한 액체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박수온……. 제발 눈을 떠.”
구슬픈 목소리에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이는 건, 고개를 숙인 채 애처로이 눈물을 떨구고 있는 해령의 처연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