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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63화 (63/190)
  • 63화

    집행

    “얼을 빼고 있다가는 죽는다.”

    공간을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며 단단한 팔이 나를 넓은 품에 가뒀다.

    은빛 무늬가 새겨진 검은 비단옷을 입은 누군가의 날렵한 턱선에 눈이 도달했을 때, 염라가 커다란 손으로 목걸이를 쥔 내 손을 감아쥐어 지옥귀들을 향해 들었다.

    “집행.”

    염라의 말 한마디에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바로 앞의 땅이 두 쪽으로 갈라지며 지옥귀들이 시뻘건 용암으로 떨어졌다.

    “캬아아악!”

    동시에 아래에서 솟구쳐 오른 거대한 쇠사슬에 속박된 지옥귀들은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용암 속으로 속절없이 끌려 들어갔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지옥귀의 행렬은 용암이 굵은 쇠사슬로 뒤덮이면서 완전히 폐쇄됐다.

    이게 염라가 가진 힘이라는 건가?

    그의 말 한마디에 땅이 갈라지고 삽시간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지옥귀들이 용암 아래로 사라졌다.

    말 그대로 지옥이 열리는 걸 본 것 같았어.

    내 성좌라고 생각해서 가깝게 지내다 보니 망각하고 있었다.

    그가 저승의 최고 권력자, 염라대왕이라는 사실을.

    공포의 대상인 귀신도 저승사자도 전부 염라의 발밑에 있다고 생각하니 서늘한 기운이 맴돌며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가자.”

    “이미 저승인데 날 어디로 데리고 가려고?”

    염라의 무심한 눈길이 내게로 닿았다.

    핏기라고는 없는 새하얀 얼굴을 올려다보던 나는 흠칫 놀라며 그에게서 벗어났다.

    “더는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설명할 시간도 없다는 듯 염라는 곧바로 나를 덥석 안아 들었다.

    “최소한 어딜 가는지는 알려주고 데려가야……!”

    난 염라에게 들린 채로 발버둥을 쳤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 문자들이 염라와 나를 덮쳐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그때,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영웅이 귀환했다. 크릉! 크릉!”

    귀를 닦고 다시 들어도 이건 저승사자의 목소리였다.

    슬며시 눈을 뜨니 재판장 한가운데에서 커다란 송곳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으며 환호하는 저승사자의 큼직한 얼굴이 보였다.

    재판장으로 돌아온 거였구나. 괜히 놀랐네.

    “미리 말해주면 좋았잖아? 사람 불안하게…….”

    안심한 난 염라의 목에 두 팔을 두른 채로 바짝 다가가서 추궁하듯이 속삭였다.

    “불안할 게 뭐 있지?”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던 염라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핏빛의 눈동자가 장미의 꽃잎처럼 내게로 내려앉았다.

    “내가 그대를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서?”

    조용히 올라간 불그스름한 입술이 매력적인 곡선을 그렸다.

    “날 대책도 없이 하늘 한가운데에 떨어뜨려놓기도 했는데 뭔들 못할까?”

    베카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추락사했을 거라고!

    원망스러운 눈길로 염라를 흘겨보던 나는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 날 좀 내려줬으면 하는데.”

    성격 같아서는 재판장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염라의 품속에서 벗어났을 텐데, 그의 신장이 너무 큰 탓에 억지로 벗어나려 했다가 바닥으로 엉덩방아를 찧기라도 하면 꼬리뼈를 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지금 임시방편으로 만든 그릇에 들어와 있는데 여기서 다쳤다가 본체에까지 타격이라도 가면 어떡해?

    늙어서도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게 내 또 다른 목표였다.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

    솔직히 무병장수는 만인의 꿈이잖아?

    “아무래도 나는 그대에게 신임받지 못하고 있나 보군.”

    걱정과 달리 염라는 의외로 순순히 나를 품에서 내려줬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무심한 눈빛이었지만, 어쩐지 그의 낯빛에서 서운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노코멘트 할게.”

    나는 은근슬쩍 답을 회피했다.

    내 답변이 판결에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지 않았다.

    믿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완전히 신임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염라는 내가 지옥귀와 싸우고 있을 때 도움을 주기는커녕 재판하기에 바빴으니까.

    “망자여, 크릉! 다친 곳은 없는가? 크르릉!”

    내가 염라에게서 멀어지자 저승사자가 한달음에 내게 달려와 몸 이곳저곳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네, 완전 멀쩡해요!”

    당당하게 팔을 걷어붙이니 다행이라는 듯 저승사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내뱉자 위로 송곳처럼 솟아올라 있던 사자의 푸슬푸슬한 꼬리가 풀썩 아래로 내려갔다.

    “무시무시한 지옥귀를 상대로 무사하게 돌아오다니 기쁘고 훌륭하다, 망자여!”

    “판관님들도 다 보고 계시는데 뭘 또 그렇게까지! 그래도 제가 좀 대단하긴 했죠?”

    사자의 칭찬에 쑥스럽다는 듯이 손을 내젓던 나는 판관들을 향해 빙긋이 웃어 보였다.

    이번에는 흑호랑이에 이어 흑두루미도 내 공로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나를 애써 외면한 그들은 자신들끼리 무언가를 토론하다가 머지않아 염라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멀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판관들의 반응을 보면 내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은 틀림없었다.

    그래! 이래야 내가 고생한 보람이 있지!

    “크릉! 온천의 돈가스 도시락 맛만큼이나 대단했다!”

    돈가스 도시락을 먹으며 감격하는 사자의 표정을 실시간으로 본 나로서는 그것이 대찬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게 엄지를 척 들어 올려 보이던 사자가 황급히 앞발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주변을 살폈다.

    “혹시 누가 들은 건 아니겠지? 크르릉! 저승사자가 뇌물을 받은 게 알려지면 저승에서 떳떳하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된다! 크릉!”

    “사자님 입으로 자백하지만 않으면 알려질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크릉! 이럴 수가! 또 말해버렸잖아?”

    사자가 앞발로 뺨을 감싸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이걸 청렴하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기에는 뇌물을 받긴 했고…….

    “일단 그 입부터 다무세요.”

    난 사자의 입을 틀어막으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그의 자백을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잠깐만, 그런데 말이야…….

    “다들 내가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는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쿠루…….”

    내 물음에 사자가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내 손을 가리켰다.

    아, 맞다.

    내가 입을 막고 있었지.

    “자, 이제 말해봐요.”

    나는 사자의 입을 봉하고 있던 손을 거둬들였다.

    “당연히 알지! 크릉! 망자의 활약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절 지켜보고 있었다고요? 대체 어떻게……?”

    “저걸로 말이다! 크릉!”

    사자가 못 본 사이 더 두툼해진 것 같은 손으로 진실의 거울을 가리켰다.

    언뜻 보니 지금도 진실의 거울에서는 내가 잔잔한 바람으로 지옥귀들을 날려버리고 저승의 눈으로 균열을 닫는 장면이 반복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옥국 녀석들, 아주 몹쓸 놈들인 줄 알았는데…….

    내가 오해할 뻔했네. 이번 편집은 아주 칭찬해!

    “염라대왕님, 그리고 판관님들! 크릉! 이제는 판결이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생사재판은 이승에 있는 육체가 상할 위험이 있는 만큼 빠른 결단이 중요하니 최종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크릉!”

    자신감에 찬 저승사자가 염라와 판관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재판을 지켜보고 있던 배심원들도 호응하듯 환호를 보냈다.

    솔직히 배심원들이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내 편에 서줄 줄은 몰랐는데…….

    좀 당혹스럽긴 했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어깨가 올라갔다.

    좋아! 이 기세로 승소까지 가보자고!

    “그러지.”

    손바닥을 펼쳐 들어 소란을 잠재운 염라가 판사석에 자리했다.

    자연스럽게 판관들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들 망자 박수온이 세운 공은 진실의 거울을 통해 보았을 터, 이에 긴말을 덧붙이지 않고 판관들과 만장일치로 박수온의 승소를 결정하는 바이다.”

    엄숙한 표정의 염라가 판결봉을 두드리자 저승사자가 크게 기뻐하며 나를 안아 들고 흔들었다.

    “크르릉! 승소를 축하한다! 박수온 망자!”

    억!

    “숨 막혀요!”

    사자의 악력에 종이 인형처럼 휘둘리고 있는 그때,

    띠링!

    반가운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재판에서 승소합니다.]

    [저승에서 살아남기]

    [재판에서 승소하기 (1/1)]

    [성공 보상 : 개같이 부활 / 패소 시 : 사망]

    [퀘스트 성공 보상으로 ‘개같이 부활’을 획득합니다. 부활 기회(1회)를 획득합니다.]

    드디어 부활이다!

    격한 기쁨에 환호하는 그 순간, 또 한 번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히든 퀘스트(EX) ― 염라’를 클리어 합니다.]

    다행히 히든 퀘스트도 여기서 끝인 모양이었다.

    하긴 죽고 되살아나기까지 했는데 뭘 더 시키는 건 무리지.

    이제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히든 퀘스트(EX) ― 염라’의 최종 보상을 획득합니다.]

    최종 보상이 따로 있었어?

    기대감과 함께 곧바로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최종 보상 ‘염라의 각인(EX)’이 발현됩니다.]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염라의 각인이 발현된다고?

    애초에 염라가 나에게 각인한 적이 없잖아?

    “박수온 망자! 그런데 눈동자가 왜 빨갛게 변했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건가? 크릉…….”

    “제 눈동자가 빨갛게 변했다고요?”

    “그렇다. 크릉…….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중압감 어디서 많이 느껴본 것 같은데……. 크릉.”

    뭔가 달라진 것을 느낀 듯 날 놓아준 사자가 턱을 매만지며 골똘히 바라보았다.

    몇 차례 위기가 있긴 했지만 베카가 도와준 덕분에 다치진 않았는데…….

    뭔가 비춰볼 게 없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진실의 거울을 발견했다.

    판결을 마친 상태라 그런지 진실의 거울은 평범한 거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거다!

    난 빠르게 진실의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온천 사장’이 성좌 ‘저승의 염라’의 각인이 발현된 걸 자각합니다.]

    그곳에는 염라와 똑같은 붉은 눈동자의 내가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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