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때수건의 의미
내가 베카에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내가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주변에서 붉은 벼락이 쏟아지며 검은 재가 날렸다.
그 반동으로 바람이 일며 긴 머리카락이 눈을 가렸고, 다시 시야가 트였을 때 베카는 이제까지는 보지 못했던 낯선 표정과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난 이성을 잃었다. 내 세상이 통째로 무너져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으니까.”
베카가 유달리 내게만 살갑다는 건 일찍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세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건 처음이었다.
베카는 내 생각보다 더 나를 아끼고 있었구나.
내 새끼, 장하다!
처음에는 나를 경계하기에 바빴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컸지?
감동에 젖어 베카를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
베카가 이렇게나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그 예쁜 마음에 상처를 내고 싶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게 어떤 기분인지 난 누구보다 잘 아니까.
“꼭 돌아올게. 그때까지 이곳을 부탁해. 베카, 너도 다치지 말고.”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베카를 향해 약속과 당부를 전했다.
“기다리겠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
베카는 나를 믿는다는 듯이 작게 웃어 보였다.
“응!”
이제 내가 꼭 살아서 돌아가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균열을 닫고 만다!
“검둥아! 균열로 가자!”
“크와아아앙!”
내 외침에 드래곤이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더니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힘차게 날아올랐다.
* * *
베카는 지옥귀를 상대하면서도 루카를 타고 사라지는 수온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봤다.
그런데 그녀가 올라간 방향에서 얇은 천 조각 같은 것이 날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온이 떨어뜨린 건가?’
수온이 잃어버린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베카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기다란 물체를 잡아챘다.
‘이 까칠한 촉감과 선명한 색감은 낯설지가 않은데…….’
베카가 손에 들린 천 조각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이건…….”
길쭉한 천 조각의 정체는 수온이 얼굴에 두르고 있던 샤레니안의 애착 때수건이었다.
그것이 샤레니안의 최애 목욕템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는 베카는 탑에서 수온을 처음 만났던 감상에 젖었다.
그때만 해도 감정 없이 욕심과 집착에 눈이 먼 베카를 수온이 때수건으로 속박해 혼쭐을 내줬었다.
‘수온을 만나기 전만 해도 강한 힘으로 모든 걸 가질 수 있을 거라 여겼고, 그게 당연한 진리라고 생각했는데…….’
“벗어나려고 해봤어? 스스로 이 성 밖으로 나가려고 해본 적은 있냐고!”
하지만 수온에게 애정이 담긴 꿀밤을 맞고 꾸지람을 들으면서 베카는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내게 무서운 일을 당했으니 겁에 질려 달아날 줄 알았는데.’
수온은 오히려 베카의 미숙한 부분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며 먼저 손을 내밀어줬다.
“박지호! 방어막이 부서지고 있어! 헌터 협회는 아직도 소식이 없어?”
베카가 회상에 잠겨 있는데, 보호막의 중심에서 시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우의 말대로 지호의 보호막에 커다란 금이 가 있었다.
“네, 방금 연락해봤는데 지금 출발했다고만 하는데요?”
“헌터 협회가 무슨 중국집이냐? 됐어! 너희들이라도 붙어!”
“예!”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보호막을 유지하기 위해 지호의 뒤로 시우가 붙어서 힘을 보탰고, 뒤이어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돌아온 집필 소속 헌터들이 줄줄이 마나를 보탰다.
하지만 균열에서 전보다 많은 수의 지옥귀들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회복되기가 무섭게 보호막에 다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베카가 수온이 떨어뜨리고 간 때수건을 오른손에 칭칭 감았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지키겠다.’
베카가 때수건을 감은 손을 활짝 펼치자 그의 오른쪽 얼굴에 붉은 문자가 새겨지며 눈동자색과 같은 거대하고 날카로운 핏빛의 낫이 나타났다.
베카가 낫을 쥐자 곱슬기가 있는 흑발이 눈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수온과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안 돼, 더 버티는 건 무리야!”
지호에게 마나를 불어 넣어주던 집필 소속 길드원 서넛이 한계를 느끼고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주저앉았다.
“커헉!”
시우가 끝까지 마나를 불어 넣어줬지만, 얼마 못 가 지호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동시에 지호가 유지하고 있던 보호 마법이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져나갔다.
“젠장, 역시 우리만으로는 무리였나?”
지호만큼이나 많은 힘을 소진한 시우가 정신력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금세 무리를 지어 돌격해오는 지옥귀들을 향해 총을 겨누는 그때였다.
순식간에 붉은 토네이도 같은 것이 휘몰아치며 단숨에 지옥귀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붉은색 마나에 위압감을 느낀 시우가 지호를 부축해 일으키는 순간, 같은 색깔 마나가 거대한 보호막을 만들며 그들을 보호했다.
‘대체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을…….’
시우는 족히 다섯은 되어 보이는 무시무시한 토네이도가 휘몰아치는 한가운데에 떠서 담담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생명체를 올려다봤다.
‘베카?’
백발의 베카가 붉은 낫을 휘두르자 거센 토네이도가 일며 균열에서 나오는 족족 지옥귀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베카가 꼭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커헉! 형…….”
시우가 베카의 범접할 수 없는 위력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지호가 다시금 핏덩이를 토해냈다.
‘내상이 심해.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해.’
“마나를 한계치까지 끌어 쓰니까 그렇지. 요령껏 해야 할 것 아냐? 일단 업혀! 힐러가 있는 곳으로 가자.”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시우가 지호의 앞에 몸을 낮추고 앉아 등을 내어줬다.
핏기가 없는 얼굴의 지호는 비틀거리며 시우의 등에 업힌 채 정신을 잃었다.
“힐러 어딨어?”
시우는 지호를 등에 업은 채 길드원이 있는 곳으로 달려 나갔고, 상황을 지켜보던 베카가 균열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그곳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귀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지 마. 박수온.”
나지막한 응원과 함께 베카가 손끝에 숨을 불어 넣자 다시금 붉은 문자가 빛나며 빨간색 마나가 피어오르더니 수온이 있는 곳으로 실려 올라갔다.
* * *
“어? 내 때수건!”
검둥이가 격하게 날아오르는 바람에 얼굴에 감고 있던 때수건이 허공 속으로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손을 재빨리 뻗어도 봤지만, 이미 저 멀리 가버린 뒤였다.
이 정도 높이면 굳이 때수건으로 가리지 않아도 얼굴이 보이지 않을 거야.
샤레니안, 미안. 너와 때수건의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봐.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살아 돌아간다면 새로 하나 장만해줄게.
샤레니안에게 전해지지 못할 사과를 마친 나는 건물이 장난감처럼 보일 만큼 높이 올라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균열로 눈을 돌렸다.
얼마나 지옥이 지긋지긋했던 건지 지옥귀들은 회사를 벗어나는 직장인들처럼 균열을 비집고 나왔다.
“잔잔한 바람!”
부채의 힘으로 지옥귀들을 몰아내도 금세 빈자리가 메워졌다.
곤란하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사우나 가운이 있다고는 하지만 지옥귀들의 등급도 천차만별이었기에 몸이 버텨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EX급 성물을 가지고 있어도 현실은 체력 45인 E급 헌터인걸.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다가는 지옥귀한테 공격당해서 균열을 닫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살아 있는 생명체인 검둥이를 타고 저승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고…….
내 눈길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검둥이가 진땀을 흘렸다.
갈등에 빠져 있는 그때, 어디선가 붉은 불빛 같은 것이 날아와 내 몸을 휘감았다.
[‘탑의 주인’의 가호를 받습니다.]
[‘탑의 주인’의 가호로 보호막이 유지되는 동안, 타격을 입지 않습니다.]
반가운 시스템창과 함께 붉은 마나가 보호막을 형성했다.
‘진짜 이래서 베카는 사랑일 수밖에 없는 거야! 내가 다칠까 봐 보호막까지 챙겨주는 것 봐. 계약자가 위기에 빠졌는데 망치나 두드리고 있는 누구랑은 엄청 다르다니까?’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그 누구가 본인을 말하는 거냐”며 귀를 만지작거립니다.]
맨날 바쁘다더니 자기 욕하는 건 또 들리나 보네?
‘그 누구의 정체는…….’
[성좌 ‘저승의 염라’가 “왜 말을 하다 마냐”며 재판을 보다 말고 답답해합니다.]
나는 대화 상대를 가장 짜증 나게 만든다는 ‘말하다가 말기’를 시전하고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며 균열 안으로 뛰어들었다.
“검둥아, 고생했어!”
검둥이에게 급하게 인사를 전하고 들어온 균열 뒤에는 용암이 끓어오르는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캬아아악!”
지옥귀들은 용암 속에서 타죽지도 않고 절벽을 타고 빠른 속도로 균열이 있는 곳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베카의 가호 덕분인지 지옥귀들이 스쳐도 타격을 입지 않았다.
좋아. 균열을 막을 기회는 지금뿐이다!
난 사우나 가운 주머니에서 염라에게 받았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문을 닫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지?
그 생각에 도달한 순간, 목걸이의 붉은 보석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은발이 흑발로 되돌아왔다.
나는 마치 처음부터 목걸이의 사용법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목걸이를 왼손에 감고 보석을 쥐었다.
균열을 향해 목걸이를 감은 손을 든 나는 쥐고 있던 보석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환한 빛과 함께 목걸이 주변으로 용암처럼 뜨거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봉쇄.”
붉은 보석의 빛이 비친 곳에 커다란 적안의 형상이 떠올랐다.
내 명령에 따르듯 그 눈동자 형상은 이내 눈을 감았다.
[‘저승의 눈(EX)’에 의해 균열이 폐쇄됩니다.]
‘됐다! 문을 닫았어!’
기뻐한 것도 잠시,
[이승과 저승의 시공간이 끊어지며 ‘탑의 주인’의 가호가 사라집니다.]
어라?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난 순간적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캬아악!”
바로 뒤에서 수많은 지옥귀의 울부짖음이 몰려오는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손이 나를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