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캬아아악!
하늘에서 지옥귀들이 엄청난 기세로 쏟아져 내렸다.
“캬아아악!”
용암 지옥에 달궈진 탓인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살갗에 충혈된 눈동자.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그것은 한때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이렇게 보고 있을 때가 아니야.
부채를 펼쳐 지옥귀들을 소멸시키려던 나는 행동을 멈췄다.
‘잔잔한 바람으로 균열이 더 벌어진다면?’
베란다를 통째로 날려버리고도 남았을 만큼의 위력이었으니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그렇게 되면 용암 지옥 인근의 지옥귀들까지 나오게 될 것”이라 말하고는 다시 재판에 집중합니다.]
이 사달이 났는데도 재판을 한다고?
염라의 말대로라면 일이 더 커졌다.
잔잔한 바람을 좀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면 힘 조절이 가능했을 텐데…….
부채의 주인인 해령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해령, 잔잔한 바람의 세기를 조절할 수 있는 법이 없을까?’
[성좌 ‘온천의 지배자’와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급해 죽겠는데, 얜 또 왜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거야?’
운수도 샤레니안도 이상하게 조용하고…….
[성좌 ‘저승의 염라’가 “각인을 새긴 계약자가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해령은 한동안 성좌의 힘을 박탈당하고 온천이 폐쇄된 상태”라며 망자가 친구의 여자와 사랑한 썰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지옥행을 판결합니다.]
해령이 힘을 박탈당한 상태라고?
‘성좌가 힘을 박탈당하면 어떻게 되는데?’
[성좌 ‘저승의 염라’가 “궁금하면 살아서 직접 보라”며 망자의 서류를 읽어나갑니다.]
그래, 일단 내가 살아 나가야 해령도 온천도 되찾을 수 있어.
지금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자.
아래쪽에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캬악!”
그때, 방심하고 있는 것을 틈타 지옥귀 하나가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어딜.”
차가운 음성과 동시에 베카가 나를 가로막고 섰다.
지옥귀는 나에게 닿기 직전에 베카의 붉은 섬광에 반토막이 되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한순간이지만 몸을 꿰뚫고도 남을 만큼 굵고 뾰족한 지옥귀의 송곳니와 칼날 같은 손톱을 가까이서 마주한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보통 사람이 저 송곳니에 꽂히면 즉사하겠지.
지옥귀는 온몸이 흉기 그 자체였다.
헌터라고 해서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어.
피해자가 나오기 전에 지옥귀를 처치해야만 했다.
일단 지옥귀가 더 나오기 전에 문부터 닫자.
‘그런데 어떻게 닫지?’
일단 저승의 문을 닫아준다는 목걸이를 받아오긴 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시공간이 뒤틀려서 균열이 생긴 경우 밖에서는 문을 닫을 수 없다”며 “일단 균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균열 속으로 들어간 뒤에 저승의 눈을 왼손에 감아보면 알아서 몸이 움직일 것”이라고 말하며 망자의 서류에 바람난 전적이 있는 것을 보고 주저 없이 지옥행을 판결합니다.]
‘……염라, 판결 내리는 데 가차 없네.’
새삼 염라가 나의 계약 성좌라는 것에 안도했다.
솔직히 재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름대로 사정을 봐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문을 닫으려면 균열 안까지 들어가야 한다고?
그럼 바깥은?
내가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다시 이승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럼 이미 나온 지옥귀들은 어쩌지?
이미 상당히 많은 양의 지옥귀들이 빠져나온 상태였다.
이래서는 문을 닫으러 갈 수도 없잖아!
“악!”
아래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지옥귀가 사람을 습격한 것 같았다.
일단 사람을 살리는 게 먼저야!
“검둥아, 소리가 나는 곳으로 내려가자!”
내 말에 드래곤이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그 반동으로 얼굴에 두른 샤레니안의 때수건이 펄럭거리며 얼굴을 때렸다.
검둥이는 아직도 내 말을 따르는 게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소리가 난 곳으로 가자 지옥귀에게 얼음 총을 쏘는 박시우가 보였다.
너였냐?
그 하이톤의 비명을 지른 게…….
“악! 징그러워!”
박시우는 호들갑스럽게 비명을 내지르며 확인 사살까지 시켜줬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들이 미리 대피를 시킨 건지 지옥귀들 근처에는 박시우와 지호뿐이었다.
“어우! 바퀴벌레보다 더해! 어우!”
그 와중에도 지옥귀의 이마에 총알을 명중시킨 박시우는 혹여 쓰러진 지옥귀가 자신에게 닿을까 파르르 떨며 물러났다.
그냥 못 본 척하고 돌아갈까?
내면에서 박시우에 대한 남매애와 수치심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데 날이 선 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제발! 정신 사나우니까 조용히 좀 해. 잠시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지옥귀들이 보호막을 뚫고 들어올 거라고!”
지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큐브 지팡이로 인근에 대형 보호막을 펼치고 있었다.
아마도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온 거겠지.
문제는 박시우와 지호, 둘이 상대하기에는 지옥귀의 개체 수가 너무 많다는 거였다.
심지어 아직도 균열에서는 지옥귀가 끝도 없이 쏟아지고 있고.
넓은 범위의 보호막인 만큼 유지하려면 소모하는 마나도 배가될 것이었다.
지금도 손을 떨고 있는 걸 보면 지호의 몸에 무리가 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호가 버티지 못하면 보호막이 사라질 테고, 그렇게 되면 박시우도 지옥귀를 상대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내가 도와야 해.
그렇다고 그들을 마주 본 상태로 잔잔한 바람을 사용했다가는 지호와 박시우까지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호와 박시우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공격하는 수밖에 없는데…….
고민하던 것도 잠시, 지호를 덮치려는 지옥귀들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자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고민이 길어져서 좋을 게 없어.
어차피 지금은 각성한 상태고 때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공격하고 검둥이에 올라타면 문제없을 거야.
“검둥아,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
“크와앙!”
콧방귀를 뀌면서도 드래곤은 순순히 아래로 내려갔다.
“뭘 어쩌려는 거지?”
가만히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베카가 내게 넌지시 물어왔다.
“지옥귀들의 습격을 막을 거야. 사람들이 죽게 되면 설사 저승의 문을 닫고 내가 저승에서 살아 돌아간다 해도 기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이해할 수 없군. 어떻게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할 수 있는 건지.”
말을 하면서도 베카는 붉은 섬광을 빛내며 내게 달려드는 지옥귀들을 쳐냈다.
“지호랑 박시우는 나한테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그 사람들이 다치면 난 진짜 미쳐버릴지도 몰라.”
전혀 공감되지 않는다는 듯이 내 말을 듣고 있던 베카의 얼굴이 일순간 동요했다.
“다녀올게. 어쨌든 사람들을 지키고 공을 세워야 나도 재판에서 승소할 수 있는 거니까.”
베카를 향해 소리친 난 적당한 높이가 도달하자 곧장 박시우가 있는 곳으로 뛰어내렸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온천 사장님! 어떻게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지옥귀를 상대하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박시우는 영광이라는 듯 두 손을 모아 나를 반겼다.
어떻게 내가 온천 사장이라는 걸 안 거지?
때수건으로 가린 상태라 얼굴도 못 봤잖아!
“이 상황에 때수건을 얼굴에 감고 사우나 가운 차림으로 나타나실 분은 온천 사장님뿐이시죠! 제가 사장님 팬이라 딱 보면 느낌이 오거든요!”
독심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박시우는 사람 좋게 웃으며 살갑게 말을 붙어왔다.
지금 한가하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그사이에도 지옥귀들은 보호막을 뚫고 들어올 기세로 위협해왔다.
“당신, 정신 나갔어? 눈앞에 지옥귀들이 바글거리는데 총을 내려놓으면 어떡해?”
“아, 죄송합니다! 사장님이 너무 반가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그만…….”
황급히 총을 꺼내든 박시우는 멋쩍게 웃으며 빠르게 지옥귀를 저격했다.
박시우의 총으로 지옥귀를 막는 건 불가능해.
이대로 한 마리씩 잡다간 지쳐서 나가떨어질 게 불 보듯 뻔했다.
게다가 바퀴벌레만 봐도 혼비백산하는 인간이 지옥귀를 상대한다?
호들갑만 떨다가 진이 먼저 빠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온천 사장님을 실제로 뵙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사우나 가운과 때수건 조합이 이렇게 멋져 보이는 건 처음이에요!”
심각한 나와 달리 박시우는 온천 사장을 만났다는 기쁨에 심각하게 심취해 있는 것 같았다.
“야, 너! 방해만 되니까 당장 뒤로 물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 많은 몬스터들을 혼자 사냥하시는 건 무리입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잔잔한 바람.”
나는 박시우보다 몇 발 앞에 서서 부채를 펼쳐 휘둘렀다.
얌전한 이름과 달리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며 수십의 지옥귀가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부채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한 박시우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내가 말했지? 방해된다고. 좋은 말할 때 꺼져. 저것들이랑 같이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살벌하리만큼 목소리를 한껏 깔며 박시우를 돌아봤는데…….
“너무 멋지십니다! 킹갓제너럴 온천 사장님!”
꺼지라는 말을 못 알아들은 건지 박시우가 두 손으로 엄지를 추켜세우며 환호했다.
도대체 박시우란 생명체의 뇌는 어떻게 생겨먹은 거지?
어떻게 하면 지옥귀 앞에서 이렇게 태평할 수 있냐는 말이야.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그의 머릿속 사정을 알 수 없었다.
“정신 사나우니까 꺼지라고.”
지금 기세를 보아하니 박시우는 좋은 말로 해서는 절대 대피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난 그를 쫓아내기 위해 당장에라도 바람을 일으킬 듯이 부채를 들어 올렸다.
그때 박시우가 빠른 속도로 총을 꺼내 어딘가를 겨눴다.
날카로운 얼음 총알이 순식간에 내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캬아아악!”
내 바로 뒤에서 가슴팍에 총을 맞은 지옥귀가 괴성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어느 틈에 보호막을 뚫고 들어온 거지?
“뒤를 조심하셔야죠.”
얼음으로 된 투명한 총구를 입으로 후 불어낸 박시우가 여유롭게 한쪽 입가를 올려 웃었다.
괜히 랭킹 1위는 아니란 건가?
박시우의 움직임은 이런 상황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닌 것처럼 숙련되어 있었다.
옅은 회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빠르게 다가온 박시우가 내게 등을 맞대고 서서 슬며시 날 돌아봤다.
“사장님의 뒤는 제게 맡기십시오.”
능숙하게 얼음 총을 장전하며 장난스럽게 웃던 박시우의 눈빛이 돌연 서늘하게 식었다.
“사장님을 노리는 놈들은 다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