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쩌적!
내가 소환된 지점은 베카와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말 그대로 눈 깜빡할 새에 베카는 내 코앞에 나타났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두 팔을 뻗어 베카를 품에 안은 채 질끈 눈을 감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자 순간적으로 요동치던 마음이 안심되었다.
정확하지 않지만 베카를 품에 안는 순간 그의 오른쪽 얼굴에서 붉은 문자가 빛나고 있는 걸 본 것 같았다.
“루카.”
베카가 나지막이 속삭이자 거세게 일던 바람이 멈췄다.
어라?
그러고는 슬그머니 눈을 뜨니 나는 하늘에 떠 있었다.
“살았다!”
이승에서 입구 컷 당하는 줄 알았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나 왜 떠 있는 거지?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뭔가가 나를 태운 채 하늘을 날고 있었다.
단단하고 빛나는 검은 가죽, 토파즈 같은 금안과 건물 몇 개쯤은 때려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굵기의 꼬리를 가진 생명체는…….
“드래곤……?”
영화에서나 보던 드래곤이 왜 여기에…….
이건 판타지 소설에서나 존재하는 생명체 아니었나?
처음에는 미지의 영역에서나 보던 생명체의 등장에 무척 놀랐지만, 난 머지않아 그 상황에 수긍하게 됐다.
하긴, 이제는 사람들이 스킬도 쓰고 몬스터도 나오는 세상인데.
현실이나 판타지 소설이 큰 차이가 없으니 뭐가 나타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베카, 이거 네가 부른 거야?”
내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베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를 꼭 붙들었다.
“다시 살아 돌아온 건가?”
베카에게는 드래곤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것 같았다.
날 바라보는 베카의 눈동자에서 전에 없던 온기가 느껴졌다.
전보다 강렬해진 것 같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내가 죽어버렸으니까 베카도 많이 놀랐겠지.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시한부이긴 한데…….”
“내가 저승으로 가서 명부를 갈기갈기 찢어놓겠다.”
콰과광!
베카의 말 한마디에 마른하늘이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붉은색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
곧이어 벼락은 균열이 난 하늘로 강하게 내리꽂혔다.
저게 저승으로 통하는 개구멍이 열리는 곳인가?
“아니야! 그러지 마! 베카.”
내가 황급히 베카를 말리자 벼락이 잦아들었다.
“어째서 그만두라는 거지? 네가 죽을 수도 있는데 보고만 있으라는 건가?”
날 향한 베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해.
베카를 탑에서 나오게 한 건 난데 내가 세상에서 영영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상황인 거니까.
“베카, 걱정하지 마. 난 꼭 살아서 돌아올 거야.”
불안해하는 베카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자 그가 슬며시 나를 올려다봤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촉촉이 젖은 눈망울을 마주하니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누가 저 안쓰러운 핏덩이를 두고 저승으로 갈 수 있을까.
난 절대 못해.
[성좌 ‘저승의 염라’가 “실제로는 네가 훨씬 더 핏덩이”라며 명부를 들어 보입니다.]
‘됐거든! 안 궁금하니까 저리 치워! 우리 베카 귀여움은 내가 지켜!’
염라의 시스템창을 깔끔하게 무시한 나는 베카에게로 눈을 돌렸다.
“내가 저승으로 통하는 균열을 닫고 예정에 없던 인명 피해를 막아내면 그 공으로 재판에서 이겨서 부활할 수 있거든. 그러니까 날 믿고 기다려줄 수는 없을까?”
“……모든 게 끝난 후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저승을 부숴버리겠다.”
살벌한 대답이긴 했지만, 일단 베카를 설득하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았다.
“그래, 그때는 안 말릴게.”
베카는 마지못해 내 말에 수긍하는 눈치였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왜 안 말리냐”며 나를 추궁합니다.]
‘나도 보험 하나쯤은 들어놔야지. 공을 세웠는데도 승소 안 시켜주면 다 죽는 거야. 알겠어?’
[성좌 ‘저승의 염라’가 나의 살벌한 협박에 “지옥귀보다 무서운 인간”이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습니다.]
“아이고! 온천 사장님 또 뵙습니다!”
믿을 구석이 생긴 것에 만족하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재수 없는 목소리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아래로 눈을 돌리니 나를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박시우가 보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S급 헌터라는 것만 믿고 겁도 없이 현장에 뛰어들다니…….
박시우가 여기 있다는 건 지호도 왔다는 거겠지.
얼굴만 봤을 뿐인데 짐이 더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온천 사장님, 그거 아시나요? 사장님이랑 저랑 같은 사우나 통 써요!”
아니, 알고 싶지 않아!
지독한 놈, 여기 와서까지 우나 이야기라니!
나는 최애 아이돌을 만난 소녀팬처럼 감격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박시우를 외면하며 때수건으로 얼굴을 한껏 더 가렸다.
빨리 균열을 막고 이곳을 떠야겠다.
하지만 그걸 실현하려면 균열이 난 곳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베카, 잠시 드래곤을 빌릴 수 있을까?”
[탑의 주인이 <수하> 다크 드래곤 ‘루카(SS)’의 사용 권한을 넘깁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카가 내게 드래곤을 넘겨줬다.
역시 금수저…….
고민도 없이 드래곤을 넘겨주다니 씀씀이가 남달랐다.
“검둥아! 균열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자!”
입에 감기는 호칭으로 드래곤을 향해 기세 좋게 외쳤건만…….
“크와아아앙!”
분명 권한을 넘겨받았는데 드래곤이 날개를 퍼덕이며 말을 듣지 않았다.
왠지 불만이 있는 것 같은데 당최 드래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수하> 다크 드래곤 ‘루카(SS)’의 언어 번역기를 켜시겠습니까? (설정>언어 번역기에서 기능 끄기 가능) 수락 / 거절]
오? 웬일이야?
시스템이 먼저 나한테 도움이 되는 기능을 알려주고?
조금 의심스럽긴 했지만, 지금은 드래곤을 다루는 게 먼저였기에 시스템창의 제안을 수락했다.
기능 끄기도 가능하다니까 걱정할 일은 없겠지.
[<수하> 다크 드래곤 ‘루카(SS)’의 언어를 번역합니다.]
[<수하> 다크 드래곤 루카(SS) : 나 가기 싫어! 가기 싫다고! 뿌엥! 베카 님 제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고작 인간에게 저를 넘기시다니! 그리고 저 인간도 그렇습니다! 내가 검둥이라니! 무슨 개도 아니고…….]
“설정…… 언어 번역기…… 기능 끄기.”
번역기를 돌리자마자 나는 서둘러 기능을 껐다.
어쩐지 시스템창이 웬일로 순순히 나를 도와준다고 했어.
직접 귀로 들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정신이 사나워질 수 있다니.
어쨌든 불만 사항은 확실히 알았다.
“크와와아아아앙!”
나는 여전히 울부짖고 있는 드래곤의 등을 어루만지며 살며시 몸을 낮췄다.
“검둥아, 계속 버티면 그대로 저승으로 가는 수가 있다?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나 살아 있는 몸이 아니거든.”
들어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루 뭐시기보다는 검둥이가 입에 착착 감긴다는 말이야!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이니 드래곤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크왕!”
한껏 누그러진 드래곤이 균열이 일어난 방향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갈등은 평화롭게 대화로 풀어야지.
지시에 따르는 드래곤을 흐뭇해하는 나를 지켜보고 있던 베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루카가 나 아닌 누군가의 말을 듣는 건 처음 보는군.”
“처음이네.”
넌지시 건넨 말에 베카가 날 돌아봤다.
“네가 진심으로 웃는 것도.”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환하게 웃는 베카의 미소가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았다.
좋은 의미였는데 당황한 듯한 베카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곱슬기가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불그스름했다.
부끄러웠나 봐. 귀여워!
“네가 있어서다.”
“응?”
바람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아서 베카에게로 상체를 숙이며 되물었다.
그 순간 베카가 다시 나를 돌아봤다.
바람에 날리는 흑색 머리카락, 그 아래로 드러난 장밋빛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내게로 고정됐다.
“내가 웃을 수 있는 이유.”
왜일까?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늘 어리게만 보이던 베카가 실은 5000년을 넘게 산 존재라는 말이 뇌리에 와 꽂혔다.
“박수온! 숙여.”
잠시 한눈에 팔려 있는 그때, 베카가 나의 등을 눌러 고개를 숙이게 했다.
거의 동시에 내 머리 위로 얇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날 노리고 있나?
아직 저승의 문은 열리지 않았는데?
그럼 누가?
만일에 상황에 대비해 몸을 낮춘 난 물체가 날아온 편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이미 높은 하늘로 올라와 있는 상태라 아래의 풍경이 아득하게 보였다.
이 위치에서는 날 공격한 사람을 찾아내는 건 무리야.
포기하려는 찰나에 염라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그때 그놈과 같은 기운”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그놈이라니? 그놈이 누군데?’
말이 끝나자마자 불현듯 바나나 던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설마…….’
[성좌 ‘저승의 염라’가 “맞다. 그때 널 노리던 놈”이라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물체가 날아간 방향을 올려다봤다.
정확히 하늘의 균열에 화려한 무늬의 카드 한 장이 박혀 있었다.
저건 카드잖아?
그러고 보니 그때…….
흑화한 거대 바나나의 기억 속에서 본 물체와 똑같았다.
그걸 깨닫는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큰일이다.
‘……내가 아니었어. 카드는 처음부터 균열을 노린 거야.’
“검둥아! 최대한 빨리…….”
드래곤을 재촉하며 서둘러 날아오르려는 그때였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균열이 폭발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나직하게 신음하며 한탄합니다.]
[저승으로 통하는 문이 열립니다.]
쩌적!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지옥귀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