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저세상의 오 마이 갓!
도시의 한복판에 저승과 통하는 문이 열린다고?
나는 개구멍이 열리는 장소에 한 번 놀라고, 험한 말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고귀함을 가진 염라가 맛깔나게 욕을 하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솔직히 욕하는 건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거친 것도 묘하게 잘 어울렸다.
하긴……. 저 얼굴이면 뭔들 안 어울릴까?
자칫하면 과해 보일 수도 있는 길게 늘어진 붉은 보석 귀걸이도,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황금 비녀도 염라에게는 몸의 한 부분처럼 잘 어우러졌다.
얼굴이 보석을 이기기도 하는구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잘 그려진 초상화 같은 염라의 얼굴을 설렁 바라보던 내 관심은 빠르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염라와 까마귀의 분위기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 구멍이 저승의 어느 곳과 연결된다는 거지?”
“그곳은 용암 지옥의 죄수들이 갇혀 있는 곳입니다. 만약 그자가 시공간을 비집고 억지로 저승으로 통하는 문을 열게 된다면 옥에서 나온 지옥귀들이 인간계로 들이닥칠 것입니다.”
지옥귀들이 이승으로 나온다고?
‘지옥귀가 살아 있는 사람을 위협할 수 있어?’
[성좌 ‘저승의 염라’가 “시공간을 비틀어 이승과 저승을 잇는 것이기 때문에 개구멍이 생긴 동안 일시적으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사라진다”며 “그렇게 되면 저승의 것들이 살아 있는 인간들의 눈에 보이고 해를 끼칠 수도 있다”면서 두통을 호소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점잖은 염라가 욕을 할 만도 했다.
‘지옥귀가 뭔데? 강해?’
[성좌 ‘저승의 염라’가 “지옥귀는 생전에 생명을 해친 사악한 망령들을 말한다”며 “등급은 천차만별이고 귀신이 되어서도 사람의 간이나 심장을 파먹는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간이나 심장을 파먹는다고?
무슨 구미호야?
이제야 그들이 심각한 이유를 깨달았다.
듣고 보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까마귀의 말대로라면 무고한 도시의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어.
“죽여주십시오! 대왕님! 이미 저승의 장군들이 탑의 주인을 제지해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예감한 듯 까마귀가 염라의 발밑에 머리를 조아리고 납작 엎드렸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오 마이 갓”이라며 한탄합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곧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좌절합니다.]
“까마귀 호위병의 말대로라면 큰일이 난 게 아닙니까? 이대로라면 지옥귀들이 인간계로 흘러 들어가 예정에 없던 망자들이 산더미처럼 생겨날 것입니다. 빨리 대책을 구해야…….”
흑호랑이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내 생각도 흑호랑이와 같았다.
‘빨리 대책을 찾아야 해. 염라! 그렇지 않으면 대참사를 막을 수 없을지도 몰라.’
[성좌 ‘저승의 염라’가 고뇌에 빠집니다.]
더군다나 보통 사람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투입되는 게 헌터였다.
특히 지호나 박시우는 사람들이 습격하는 걸 보고만 있는 성격이 못되잖아.
분명히 가장 먼저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나설 텐데…….
이 대참사의 사상자 중에 둘이 있을지도 모르는 다는 생각에 입술이 바짝 마르고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이러다 저승에 다 모이는 거 아니야?
박시우, 지호와 나란히 재판장에 선 것을 상상하던 나는 경기를 일으키듯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승이 만남의 장이 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하지만 고심하던 흑호랑이도 그럴듯한 대안이 생각나지 않는지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난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올 리가 없지요. 시스템이 만들어낸 존재들에게는 성좌의 힘이 통하지 않으니까요. 인간계에 그를 대적할 만한 강력한 각성자가 있으면 몰라도…….”
흑두루미가 답이 없다는 듯 혼잣말을 하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널브러지는 그때였다.
그래! 저승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기 전에 베카를 막으면 되잖아!
그러면 지옥귀가 이승을 공격할 일도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 각성자!”
흑두루미의 혼잣말에서 해결책을 찾은 난, 손을 하늘 위로 번쩍 올리며 용감하게 소리쳤다.
“온천 사장이라고 하지만 너는 E급 각성자다. 무슨 수로 탑의 주인을 막아내겠다는 거지?”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흑두루미가 양 날개를 펼친 채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탑의 주인이 제 고객님이십니다.”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설명하는 게 최선이었다.
베카가 저승으로 오려는 이유가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할지도 몰랐다.
“뭐라고?”
“탑의 주인 베카가 제 권한으로 온천에 들인 손님이십니다. 저와 계약을 할 만큼 가까운 사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제가 설득할 수 있습니다.”
진위를 묻듯이 흑두루미가 염라를 돌아봤다.
졸지에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염라가 고개를 까딱였다.
“모두 사실이다.”
“이럴 수가……. 성좌님들도 어쩌지 못하는 탑의 주인과 저 망자가 어떻게 계약을…….”
염라의 증언을 들은 흑두루미가 혼란스러워하며 뒷골을 잡는 것을 시작으로 재판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염라가 결단을 내린 듯 손을 들어 중재했다.
작은 손짓 한 번에 재판장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어쩔 수 없군. 탑의 주인을 설득할 수 있는 건 단 한 명뿐이다. 그러므로 이번 임무는 박수온이 적임자다. 그대의 뜻은 어떠하지? 하겠느냐?”
염라가 내 의견에 힘을 실어주며 의사를 물어왔다.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염라대왕님, 부디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아직 박수온은 죽은 상태인 데다 승소할 만큼 큰 공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승으로 가다니요? 이건 저승의 규칙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급해 죽겠는데 융통성 없는 꼰대 흑두루미가 발목을 잡았다.
‘……진짜 대머리로 만들어버릴까 보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후일을 위해서는 성질을 죽여라”라며 말리고 나섭니다.]
그래, 염라의 말이 맞아.
승소한 상태였다면 남은 깃털까지 몽땅 뽑아줬을 텐데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당장 승소 판결을 내리겠다는 게 아니다. 상황이 긴박하니 일시적으로 망자를 부활시키겠다는 거지. 그러니 공정성이나 규칙에 어긋나는 부분은 없다. 재판은 대참사를 막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고.”
염라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흑두루미의 기를 눌렀다.
“내키지 않는다면 흑두루미 판관, 그대가 대신 인간계로 가서 탑의 주인을 상대하겠는가?”
한층 더 날카로워진 염라의 적안이 흑두루미에게로 꽂혔다.
대신 베카를 상대하겠냐는 물음에 흑두루미는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이리 올라와, 박수온.”
염라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는 듯이 눈짓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계단을 따라 그가 있는 상석으로 올라갔다.
“아직은 승소하기 전이기 때문에 네 진짜 몸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대신 네 영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주겠다. 임시방편이긴 해도 살아 있을 때처럼 성좌들과의 계약이 유효해질 것이다.”
염라가 사람 모양의 도자기에 내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가 적혀 있는 종이를 붙이자 도자기 인형이 내 몸에 흡수됐다.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내 몸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는데 염라가 왼손에 감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서 내게 들려줬다.
“이건 저승의 문을 닫을 수 있는 성물이다. 지옥귀가 인간계로 나가기 전에 이걸로 저승의 문을 닫아라.”
말을 하면서도 염라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손바닥에 무언가를 새기기 시작했다.
“이제 다 된 거야?”
“잠깐.”
내 손목을 잡아 제게로 이끈 염라의 붉은 입술이 손등에 살포시 닿았다.
살짝 아래로 향한 염라의 긴 속눈썹이 유독 검고 짙었다.
다시 봐도 저세상 인물이긴 했다.
“지금 대왕님께서 망자의 손등에 입맞춤을……!”
[성물 ‘저승의 눈(EX)’을 사용할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염라의 손등 키스에 충격을 받은 흑두루미가 흰자를 보이며 쓰러질 때쯤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역시 성물을 사용할 권한을 넘겨주는 거였다.
이미 샤레니안의 가호와 해령의 각인을 받아본 터라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다.
그게 아니면 날 망나니로 여기는 염라가 손등 키스를 할 일이 뭐가 있겠어?
“대왕님, 큰일이 났습니다! 용암 지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재판장 안으로 갓을 쓴 까치가 달려 들어왔다.
검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걸 보면 상황이 위태롭긴 한 모양이었다.
주변의 동요에도 침착함을 유지한 채 입술을 거둔 염라가 나를 바라봤다.
“이제 됐다. 준비가 끝나면 곧바로 탑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
염라는 조용히 판결봉을 손에 쥐었다.
“잠깐만! 일단 사우나 가운부터 챙기고…….”
부활하자마자 죽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니까.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사우나 가운을 꺼내 챙겨 입은 난 손바닥을 위로 가게끔 펼쳤다.
“부채!”
내 부름에 성좌의 부채가 나타났다.
각인이 사용되는 걸 보니 몸이 일시적으로 부활하긴 한 것 같았다.
그보다 베카는 도시 한복판에 있다고 했으니까 내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면 얼굴을 가릴 만한 게 필요한데…….
지호에게 얼굴이 팔린 상태라 더 신경을 써야 했다.
급한 대로 인벤토리를 살피던 내 눈에 낯익은 초록색 천이 들어왔다.
샤레니안의 애착 때수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