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구멍이 났어요
“……어디에 구멍을 냈다고?”
귀를 의심하게 하는 까마귀의 발언에 염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승에요.”
답을 하면서도 갓을 쓴 까마귀는 연신 염라의 눈치를 살폈다.
누구는 탈출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저승을 못 들어와서 안달이라니…….
온천의 성좌들을 능가할 또라이는 없을 줄 알았는데 더한 놈도 있었구나!
어딜 가든 또라이는 존재한다는 또라이 보존의 법칙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난 슬쩍 염라의 표정을 살폈다.
벼락이 떨어지기 직전의 하늘 같은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털이 쭈뼛 서며 간담이 서늘해졌다.
……누군지 몰라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겠다는 건 알겠어.
하긴, 제 발로 저승에 들어오려는 거면 목적은 달성한 건가?
염라는 원래도 수려한 외모이긴 했지만, 살가운 인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위압감이 있었는데 화가 난 염라는 상상 이상으로 매서웠다.
과연 저승을 다스리는 성좌다워.
아무리 사납고 흉포한 지옥귀라고 해도 그 앞에서는 맥을 못 추릴 것 같았다.
“시공간을 뚫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성좌라 하더라도 죽은 자의 공간인 저승에 들어오지 못하는데, 대체 누가 그런 짓을 벌인다는 겁니까?”
열이 뻗친 듯 목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흑두루미가 날개를 퍼덕이며 당혹스러워했다.
난 깃털이 벚꽃처럼 흩날리는 흑두루미의 머리를 물끄러미 지켜봤다.
뜬금없지만 아주 잠깐 반짝이는 민머리가 된 흑두루미를 보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흑두루미가 탈모라니…….’
난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안 돼.
아무리 흑두루미가 성가셔도 탈모는 아픈 부분이니까 웃어서는 안 됐다.
“풉!”
이건 내가 낸 웃음소리가 아닌데?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염라가 커다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고 있었다.
‘야, 너도……?’
웃겼구나?
조용히 공감의 미소를 보내자 염라가 헛기침을 했다.
‘참고 있는데 웃으면 어떡해? 더 웃기잖아!’
[성좌 ‘저승의 염라’가 “탈모 있는 흑두루미를 놀리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도 웃었으면서!’
[성좌 ‘저승의 염라’가 “흑두루미 판관 가문은 대대로 대머리”라고 말을 덧붙입니다.]
대대로 대머리……?
……위기다.
쓰나미처럼 웃음이 밀려왔다.
아…… 안 돼!
이 상황에 웃었다가는 온천 할아범이 애써준 것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었다.
“사자야, 물 좀 마실 수 있을까?”
난 사방에 날리는 흑두루미의 깃털을 애써 외면하며 사자를 돌아봤다.
“여기 있다. 크릉!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으니까 너무 낙담하지 마라! 박수온 망자! 크릉!”
웃음을 참느라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고 내가 재판 때문에 긴장했다고 생각한 건지 물병을 내어준 사자가 내 등을 다정하게 쓸어줬다.
“아직 저승의 시공간을 일그러뜨린 자가 누군지는 정확히 밝혀내지 못한 상태입니다.”
흑두루미의 비밀을 공유한 탓인지 염라의 분노가 한층 누그러들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까마귀는 빠르게 사건에 대한 보고를 이어갔다.
“다만, 확실한 건 시공간이 흐트러진 것을 틈타 탑의 주인이 저승을 비집고 들어오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쿨럭!
진정하기 위해 물을 들이켜던 난 입안에 담았던 것을 주르륵 뱉어냈다.
내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지금 저승을 뚫고 들어오고 있는 게 ‘탑의 주인’이라고 한 것 같은데?
“거참, 온천의 사장이라는 자가 칠칠치 못하긴!”
흑두루미가 물을 도로 뱉어내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혀를 찼다.
“잠깐만! 말 걸지 말아보세요. 지금 심각한데 집중이 안 된다는 말이에요.”
나는 손을 뻗어 흑두루미 판관의 말을 막으며 다른 쪽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지금은 흑두루미를 보고 웃고 있을 때가 아니야.
우리 귀염둥이 베카가 억지로 저승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다잖아.
대체 왜……?
“베카, 너만 괜찮다면 나랑 같이 이 탑의 밖으로 나가보지 않을래?”
“가고 싶다. 네가 있는 세상으로. 함께.”
그때 언젠가 베카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맞아, 베카는 내가 있는 세상으로 함께 가고 싶다고 했었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저승이고…….
……아주 만약에 그런 이유로 나를 따라올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래서…… 저승의 시공간을 뚫고 들어오고 있는 거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나 하나 때문에 저승까지 올 생각을 하겠어?
보통은 안 그렇잖아.
과한 생각이라며 손을 내젓던 난 불현듯 베란다가 통째로 날아갔을 때, 진하게 사랑해주겠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던전 브레이크를 발생시키던 베카를 떠올렸다.
그것도 SS급 던전 브레이크를.
거기서부터 이미 베카는 보통이 아니잖아!
사태의 심각함을 인지하자 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탑의 주인이라는 건 베카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이상하군요. 탑의 주인이라는 건 시스템이 설정한 대로 움직이는 게 아닙니까? 어떻게 제멋대로 탑을 나온 거지요?”
까마귀와 염라의 대화를 듣고 있던 흑호랑이가 도톰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의문을 표했다.
악의 없이 던진 흑호랑이의 말이 뾰족한 바늘이 되어 내 양심을 콕콕 쑤셨다.
‘그게…… 제가 데리고 나온 것 같습니다만?’
[성좌 ‘저승의 염라’가 “정말 가지가지한다”며 이해하기를 포기합니다.]
‘난 베카가 저승까지 쫓아오려고 할 줄은 몰랐지! 난 애초에 내가 죽을 줄도 몰랐다고!’
[성좌 ‘저승의 염라’가 “원래 모르는 게 정상이지만, 명부도 모르는 죽음은 나도 처음”이라며 황당해합니다.]
‘그것 참, 영광이네.’
이런 일로 최초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말이야.
[성좌 ‘저승의 염라’가 “대체 어떻게 했길래 탑에 갇혀 있는 게 숙명인 베카가 밖으로 나오다 못해 저승까지 뚫고 들어오는 거냐”며 “혹시 빌린 돈이 있냐”고 묻습니다.]
이쯤 되니까 궁금해지는데…….
‘염라, 넌 평소에 나를 대체 어떻게 보고 있었던 거니?’
방금만 해도 원한을 샀냐고 묻더니 이제는 빌린 돈이 있냐니?
‘이 정도면 최소한 망나니로 생각한 것 아니야?’
[성좌 ‘저승의 염라’가 “아니면 말고……”라며 말끝을 흐립니다.]
‘……잠깐만 있어봐, 어쨌든 날 진짜 망나니로 생각했다는 거네?’
[성좌 ‘저승의 염라’가 황급히 담뱃대를 입에 물며 대답을 회피합니다.]
가만 보면 자기한테 불리한 말은 못 들은 척한다니까?
‘다른 건 넘어가주겠는데, 나중에라도 베카한테 탑에 갇혀 있는 게 운명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하지 마.’
[성좌 ‘저승의 염라’가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뭐가 문제냐”며 이해하지 못합니다.]
‘베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처음 만났을 때 베카는 엄청 외로워 보였거든. 그게 꼭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계속 마음이 쓰여.’
온천에 오고 나서부터는 표정도 많아진 것 같고 즐거워 보여서 이제 막 마음이 놓이는 참인데, 괜한 말에 마음 여린 베카가 상처받지 않길 바랐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정말 알 수 없는 인간이군, 평소에는 무서울 게 없어 보일 정도로 거침없으면서 또……”라고 말끝을 흐리며 뜻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또 뭐? 세심하다고?’
내심 칭찬이길 기대하며 염라를 향해 되물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또…… 망나니 같다”며 내게 양심을 챙기라고 조언합니다.]
그럼 그렇지!
염라에게 좋은 말을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아무튼 베카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우리 베카의 숙명은 따로 있거든.’
[성좌 ‘저승의 염라’가 “너희 베카의 숙명이 뭔지 들어나 보자”며 무심하게 묻습니다.]
난 확신에 찬 얼굴로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귀여움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거?’
“하!”
시스템창이 뜨기도 전에 어이가 없다는 듯한 염라의 웃음소리가 육성으로 들렸다.
뭐야? 그 웃음은?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우리 베카 정도면 귀여움으로 세상을 지배하고도 남지!’
베카의 귀여움에 대한 자부심을 여과 없이 드러내자 염라가 작게 혀를 찼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지금 네 귀여운 베카가 무력으로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허물려 하고 있다”며 답도 안 나온다는 듯이 나를 봅니다.]
……그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지.
“염라대왕님, 사실은……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염라의 헛웃음에 바들바들 떨며 말을 꺼내기를 주저하던 까마귀가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부리를 열었다.
“살아 있는 자가 저승에 개구멍을 뚫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단 말인가?”
“그 개구멍을 뚫고 있는 위치가…… 말입니다.”
“위치가?”
해탈한 듯 실소를 터뜨리는 염라에게 기가 눌린 까마귀가 반쯤 울먹이며 말을 이어갔다.
“인간계의 도시 한복판입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며 욕을 읊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