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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55화 (55/190)

55화

이 망할 저승국 놈들!

- 자료 제공 : 저승국 -

저 장면을 마지막으로 진실의 거울 위에 자막이 떠올랐다.

……이렇게 날것을 보여준다고?

조금은 걸러줄 줄 수 있는 거 아냐?

우리가 늘 이렇게 살벌한 사이는 아니라고!

예를 들면…….

……음, ……그래! 최소한 전체 연령가 느낌으로 갈 수는 있잖아!

저승국의 편집은 이승의 방송국과 다를 것 없이 자극적이고 교묘했다.

“……거울은 더 보나 마나 한 것 같군요. 망자의 인성이 어떤지는 확실하게 알겠으니.”

잠자코 진실의 거울을 들여다보던 흑호랑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류를 반으로 접었다.

아니, 왜 서류를 접어?

설마…… 벌써 재판을 끝내려는 거야?

이대로 재판이 끝난다면 여지없이 패소 확정이었다.

“억울합니다! 판관님, 이건 악마의 편집입니다! 거울이 보여준 게 전부가 아니라고요!”

불을 끄라고 시킨 것도 박시우한테 배운 거란 말이야!

거울이 보여준 장면은 박시우한테 계속 당하다가 어쩌다 한 번 복수를 한 것뿐이라고!

닭다리를 두고 싸운 일도 그랬다.

“이건 내가 가져간다. 괴도 박시우.”

손모가지를 조심하라고 협박하긴 했지만, 이후에는 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박시우가 입으로 닭다리를 덥석 물어버렸다.

그 바람에 닭다리 두 개가 다 박시우의 입으로 들어갔으니 난 피해자나 다름이 없었다.

닭다리를 쟁취해내고 나를 향해 두 손가락을 펼쳐 브이를 그리며 웃는 박시우의 얼굴이 떠올라 이가 바드득 갈렸다.

박시우는 죽어서도 도움이 안 돼!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변하는 건 없다. 억울하게 죽은 망자 중에서도 인성이 출중한 자들이 많으니까. 그대에게만 살 기회를 주는 건 불공평하지.”

“저도 흑호 판관과 뜻이 같습니다.”

흑호랑이의 주장에 흑두루미가 힘을 실었다.

냉담한 판관들의 표정을 보니 변명을 보탠다 해도 상황이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난 탁상 위에 놓인 담뱃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염라에게로 눈을 돌렸다.

공정하게 재판을 치르겠다는 말을 지키려는 건지, 그는 내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계약자가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보고만 있다니, 매정한 놈! 그래도 난 널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성좌 ‘저승의 염라’가 담뱃대를 가지고 놀던 손을 멈춥니다.]

염라도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고……. 이제 믿을 건 나뿐이었다.

머리를 굴려라, 박수온.

뭔가 없나? 판관들의 마음을 돌릴 만큼 강력한 한 방이…….

“생사재판에서 이기려면 두 판관이 모두 인정할 만큼의 숭고한 업적이 있어야 한다.”

“그대가 온천 사장으로서 공헌한 것이 있다면 재판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

그 순간, 사자가 재판장으로 오는 길에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래, 생사재판에서 중요한 건 따로 있어!

인성보다 내가 꼭 온천 사장이어야만 하는 당위가 있어야 한다.

내가 온천에서 쌓은 업적 같은…….

“……더 할 말이 없다면 대왕님께 판결을 요청하도록 하겠소.”

재판에 흥미를 잃은 듯한 흑호랑이가 마무리를 지으려는 조짐을 보였다.

“저……!”

그때 저승사자가 번쩍 손을 들며 소리를 높였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걸 보면 아직도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를 위해서 나서주다니…….

의리 있는 사자의 용기에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더 할 말이 남았소?”

“제가 너무 긴장해서 배가……. 실례되지만 잠시 변소를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진땀을 흘리던 게 긴장해서가 아니라 화장실이 급했던 거였어?

크르르릉! 크르릉!

사자의 배 속에서 벼락이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저걸 여태 참고 있었으니 재판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급하다니 어쩔 수 없지. 빨리 다녀오시오.”

흑호랑이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저승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판장을 빠져나갔다.

내가 미쳤지.

뇌물 받는 저승사자를 내 편이라고 믿다니.

“그럼 담당 저승사자가 돌아올 때까지 잠시 휴정을…….”

흑두루미가 쉬어가자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있습니다! 제가 꼭 살아 나가야 하는 이유!”

나는 자리를 박차고 저승사자가 서 있던 재판장 중앙으로 나섰다.

생각보다 크게 소리를 질렀던 건지 내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재판장을 울렸다.

비장한 눈빛과 우렁찬 목소리에 놀란 듯한 흑두루미가 긴 부리를 꾹 다물었다.

“그게 뭐지?”

말문이 막힌 흑두루미를 대신해 흑호랑이가 내게 물음을 던졌다.

“앞서 말했듯이 전 명성이 높은 성좌님들을 손님으로 둔 온천의 사장입니다.”

“그래서?”

흑호랑이는 따분하다는 얼굴로 내게 되물었다.

“제가 갔을 때만 해도 그 온천은 메말라 있어서 운영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수맥을 찾아 온천수를 터뜨렸죠. 제가 성좌님들의 휴양지를 부활시킨 장본인이라는 겁니다.”

“메마른 땅에 온천수를 채우는 건 온천의 지배자께서 손 하나만 까딱하면 가능한 일이다. 네가 꼭 필요한 일은 아니라는 거지. 그것만으로는 이 재판의 결과를 바꿀 수는 없다.”

저승사자에게서 구한 자문이 엉터리는 아니었나 보다.

흑두루미는 사자가 예상한 대로 반박해왔다.

더 말할 수 있는 게 없을까?

혼란에 빠져 있는 그때,

“꼭 박수온 망자여야 합니다.”

재판장 입구에서 노인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변소에 간다던 저승사자가 머리가 새하얗게 센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승사자는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간 게 아니었나?

그리고 저 할아버지는 또 누구시길래 내 편을 들어주시는 거지?

“온천이 메말라버리지 않고 지금처럼 운영되려면 이자가 꼭 필요합니다.”

“저분은…….”

두 판관이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크르르릉! 증인을 신청합니다. 지금은 대왕님께 공로를 인정받아 편히 쉬고 계시지만 생전에는 온천을 운영하며 ‘온천 할아범’이라 불렸던 반신반인, 무영이십니다. 크릉!”

……저 할아버지가 말로만 듣던 온천 할아범이시라고?

“이미 알고들 계시겠지만, 대왕님께서 한때 보좌관 자리를 제안하신 적이 있을 정도로 만인에게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하시지요!”

해령에게 들었던 대로 무영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의 할아버지였다.

어찌된 영문이냐는 듯이 저승사자를 바라보자 그가 재판장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편안하게 웃어 보였다.

마치 볼일을 시원하게 보고 온 것처럼 홀가분한 얼굴이었달까?

후련한 표정을 보니 배가 아팠던 건 진짜인 것 같았다.

오래가지 않아 내 관심은 다시 온천 할아범에게로 향했다.

확실히 온천 사장이었던 할아범이 내가 꼭 필요하다는 증언을 해주면 승소할 확률이 높아지겠지.

난 숨죽여 웃으며 저승사자를 향해 은밀하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온천 할아범의 등장은 내게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다.

“증인을 재판에 세우는 걸 허한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차분한 얼굴의 염라가 온천 할아범이 증언하는 것을 허락했다.

온천 할아범이 증인석에 오르자 판관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승사자의 설명대로 온천 할아범은 저승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인 것 같았다.

“증인, 무영. 증언에 있어 사실 그대로를 말하며, 만일 거짓을 말하면 그에 대한 벌을 받을 것을 맹세합니다.”

증인석에 앉은 온천 할아범이 선서했다.

선서를 마친 할아범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예의를 갖춰 할아범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내 인사에 온천 할아범은 날 향해 따뜻한 미소로 답했다.

초면이지만 온천 할아범은 내가 누구인지 아는 눈치였다.

“증인에게 질문하겠습니다. 크릉!”

제자리로 돌아온 저승사자는 한층 안정된 모습으로 증인석을 올려다봤다.

“앞서 증인은 박수온 망자가 꼭 온천 사장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크르릉!”

“그렇습니다.”

“전 온천 사장으로서, 그 주장에 대한 타당한 근거가 있다면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크릉?”

오, 사자! 이제야 좀 변호인다운걸?

비로소 저승사자에게 준 도시락이 아깝지 않게 느껴졌다.

“당연하지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자리까지 온 것을요.”

온천 할아범은 길게 늘어진 백발을 비녀로 감아올리고 나무로 된 지팡이를 짚은 채, 과거를 회상하는 듯 그리운 얼굴을 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그 온천은 온천의 지배자이신 해령님의 신력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죽고 나자 온천은 메마른 땅으로 변해버렸지요. 그건 아마도 어릴 적부터 해령님과 함께해온 제가 죽었기 때문일 겁니다.”

내가 처음 영계에게서 마스터키를 받았던 날, 온천이 메말라 있었던 이유가 그거였어?

내게 도시락을 만들어줄 때, 온천 할아범에 대해 말하는 해령의 낯빛이 슬퍼 보였던 것도 같은 이유 같았다.

성좌의 시간은 인간과 달리 무한하다.

그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수로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도 됐다.

그렇게 생각하니 슬퍼졌지만…….

하지만 그만큼 해령에게는 온천 할아범이 특별한 존재였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시간이 흘러도 해령은 온천 할아범을 그리워하고 있는 거야.

“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해령님은 자신을 온천에 가둔 채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계셨습니다. 저와의 기억이 떠올라 괴로우셨는지 과거의 기억을 일부 지워버리시기까지 하셨죠.”

“그래서 오랫동안 온천이 열리지 않았던 거로군…….”

처음 안 사실에 흑두루미가 혼잣말했다.

까칠하기도 하고 정도 많지만, 해령은 결국 성좌였다.

그래서 그리움에 못 이겨 스스로 기억을 지울 정도로 누군가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존재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성좌는 사람들에게 무정하고 계약자들을 유희로 삼는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말이다.

그건 어쩌면 내 편견이었을지도…….

“깊은 슬픔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던 해령님을 다시 심해 밖으로 꺼내준 것이 저 소녀입니다.”

“하지만 서류에 적힌 대로라면 해령님은 망자와의 계약이 진행되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수맥을 찾는다면 온천 사장으로 인정하겠다는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고요. 그 말은 저 망자가 아닌 누구라도 운 좋게 수맥을 찾았다면 온천은 부활할 수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틀렸습니다. 흑두루미 판관께서는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계십니다.”

“제가 무엇을 놓쳤다는 말입니까?”

머리에서 깃털이 빠질 정도로 고심하던 흑두루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말했지요? 제가 죽은 뒤에 온천을 메마른 땅으로 만든 것도 해령님이시라고.”

“그렇……지요?”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해령님께서는 어디서든 온천수를 차오르게 할 수 있는 분이시기도 하시지만, 메마르게 할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그 말은…….”

내가 수맥을 찾았을 때, 해령이 온천수가 터지는 걸 막을 수도 있었다는 건가?

그런데 왜…… 막지 않았지?

그때 해령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게 아니었나?

판관들이 어느 정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은 것을 눈치껏 알아챈 온천 할아범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해령님이 스스로 선택하신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계약자를.”

“하지만 서류에 그런 내용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서류를 처음부터 다시 살핀 흑두루미 판관이 깐깐하게 굴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고작 몇 장의 종이에 전부 담아낼 수 있겠습니까? 판관도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는 것은 그 망자가 살아온 인생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

온천 할아범의 말에 달리 반박할 거리가 없었는지 흑두루미의 긴 부리가 굳게 닫혔다.

이거 좋은 징조지?

이 분위기대로라면 재판에서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을 때였다.

“염라대왕님! 큰일이 났습니다!”

푸드덕 날개를 펄럭이는 소리를 내더니 검은 갓을 쓴 까마귀가 재판장으로 부리나케 날아들어 왔다.

“무슨 소란이냐?”

염라의 바른 눈썹이 까마귀의 소란스러움에 일그러졌다.

그때, 염라가 왼손에 감고 있던 금목걸이에 박힌 투명한 보석이 경고등처럼 새빨간 빛으로 물들었다.

머리를 조아린 까마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군가 시공간을 부숴 저승에 구멍을 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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