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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54화 (54/190)
  • 54화

    어디서 장난질이여?

    ‘난 진짜 잘근잘근 씹어먹고 싶은 거지만.’

    [성좌 ‘저승의 염라’가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습니다.]

    ‘웃어? 지금 난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웃음이 나와?’

    “지금 대왕님을 희롱하는 것이냐?”

    “희롱이 아니라 솔직한 감상을 말하는 거죠. 저승에서는 좋은 걸 좋다고도 말 못합니까?”

    한껏 흥분한 흑두루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듯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던 나는 맨살에 부딪히는 서늘한 분위기에 흠칫 놀랐다.

    아차, 버릇이 나와버렸다…….

    그래도 목숨이 걸린 재판인데 성질 좀 죽일걸 그랬나?

    하지만 후회한다고 한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순 없었다.

    “아니, 저것이……!”

    “됐다.”

    흑두루미의 긴 목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을 때쯤, 염라가 상황을 중재하고 나섰다.

    “대왕님, 어째서 이 오만방자한 망자의 만행을 그냥 넘기시려는 겁니까?”

    “내가 아는 자이다.”

    “저자가 대왕님의 지인이라는 말씀입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기다랗고 뾰족한 부리를 쩍 벌린 흑두루미의 물음에 염라는 대답 대신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냈다.

    “그런가? 저자는…….”

    그사이 서류를 꼼꼼히 살펴본 흑호랑이가 다시금 금안을 번뜩이며 나를 주시했다.

    “새로운 온천의 사장이라고?”

    “그렇습니다. 이 망자는 위대하신 염라대왕님과 성좌님들께서 휴양을 즐기시는 온천의 사장입니다.”

    흐름이 내게 유리해지는 듯하자 잠자코 있던 저승사자가 나를 대변하고 나섰다.

    이제 사자가 도시락값을 하나 보다 싶었는데.

    “……큼, 아무리 대왕님과 사적인 친분이 있더라 하더라도 방금 그 발언은 무례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흑두루미가 곧바로 이의를 제기해왔다.

    온천 사장이 손님이랑 말도 좀 편하게 하면서 친하게 지낼 수도 있는 거지.

    처음부터 예상은 했지만, 흑두루미 판관은 꼰대가 맞았다.

    “각별한 사이다. 그 이상으로.”

    그때 염라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예?”

    염라의 발언에 재판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도 의외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흑두루미를 포함한 재판장의 모든 이들이 말 그대로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며 염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말하는 걸 듣지 않았나? 나를 좋아한다고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도 재미있다는 듯이 염라의 무심한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왠지는 몰라도 내가 했던 말을 두고두고 놀려먹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성좌 ‘저승의 염라’가 정확하다며 나의 통찰력을 칭찬합니다.]

    그런 건 통찰하고 싶지 않아.

    행여라도 다른 성좌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살아나간다고 해도 죽을 맛일 것 같았다.

    그래,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라고, 일단은 살아나가는 게 먼저니까.

    “방금 염라대왕님께서 웃으신 게 맞나?”

    “그런 것 같은데……?”

    잡념을 떨쳐내자 주변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과연! 저승의 최고의 미색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네!”

    “대왕님께서 저렇게 활짝 웃으시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저자와 보통 사이가 아닌…….”

    “쉿, 목소리를 낮추게! 이러다 다 들리겠어.”

    이미 다 들었는데요?

    그리고 어딜 봐서 저게 활짝 웃은 거야?

    살짝 쪼개다 만 수준인데.

    피식 웃은 것만으로 재판장이 혼돈의 장으로 변하는 걸 보니 저승에서 염라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 났다.

    이런 반응 오히려 좋아?

    원하지 않게 오해를 사긴 했어도 저승 최고의 권력자인 염라의 각별한 지인이 됐으니까 내가 생사재판에서 승소할 확률도 높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충격에 빠진 것처럼 굳은 듯이 있던 흑두루미가 날개로 제 뺨을 쳤다.

    어찌나 세게 때린 건지 떨어져 나온 흑색 깃털이 날렸다.

    아프겠다…….

    “대왕님, 미인계를 쓰셔도 소용없으십니다.”

    아, 충격에 빠진 게 아니라…… 염라의 외모에 홀린 거였나?

    염라의 외모가 출중한 건 인정한다만, 흑두루미는 자신의 주군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었다.

    염라는 미인계를 쓰면서까지 날 도울 일이 없거든.

    애초에 그 정도로 남 일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오늘만 해도 자기 계약자가 죽은 것도 모르고 있었잖아?

    게다가 재판을 도와달라고 하니까 모르는 척이나 하고 말이야.

    “아무리 대왕님의 각별한 지인이라 할지라도 이 재판은 모두가 결과에 승복할 수 있을 정도로 공명정대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속으로 염라의 무정함을 토로하고 있는데 문제의 흑두루미가 또다시 내 재판에 훼방을 두고 나섰다.

    누가 저 부리 좀 막아라!

    마음 같아서는 내가 손수 막아주고 싶은데 여기서 내가 원하는 바를 실행했다가는 회생의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았다.

    애꿎은 주먹만 틀어쥐고 있는데 재판장을 울릴 만큼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대의 눈에는 내가 공과 사도 구분하지 못할 존재로 보이나?”

    재를 턴 담뱃대를 탁상 위에 내려놓은 뒤, 미련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염라가 흑두루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것이 아니오라…….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풀이 죽은 흑두루미가 염라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저게 권력의 힘이란 건가?

    압도적인 분위기의 염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다른 성좌들과 함께 염순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어울리네 마네 하며 놀았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낯설었다.

    “됐다. 사죄를 받고자 한 말은 아니다. 그대가 한 말에 담긴 충심은 알고 있으니. 이번 재판은…….”

    재판 이야기가 나오자 난 은근한 기대감을 안고 염라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어떤 재판보다 공정한 판결을 낼 것을 약속하지.”

    아니, 공정한 것까지는 이해해!

    그런데 “그 어떤 재판보다 공정”할 건 없지 않나?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는데 사심 조금 섞는다고 나쁠 건 없잖아!

    [성좌 ‘저승의 염라’가 나의 격한 항의를 못 들은 척 외면하며 서류를 듭니다.]

    ‘이 일밖에 모르는 워커홀릭 성좌 같으니라고!’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지. 진실의 거울을 깨워라.”

    염라의 말에 재판장의 중앙에 놓인 커다란 거울이 신비로운 빛을 냈다.

    저승사자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진실의 거울은 생전의 삶을 꾸밈없이 보여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나는 괜스레 긴장하게 됐다.

    “망자 측 저승사자, 나와서 발언하시오.”

    흑호랑이가 재판장의 중앙으로 나오라 손짓하자 저승사자가 서류를 챙겨 들었다.

    “사자님!”

    “떨려 죽겠는데 왜 부르는 거냐? 크릉?”

    긴장한 건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사자를 향해 난 보란 듯이 손으로 배를 두드렸다.

    “이거 잊지 마시라고요.”

    “알았으니까 물러나 있어라! 크르릉!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불안하게 떨리는 동공으로 주변을 살피던 사자가 전보다 비장한 표정을 한 채 재판장 중앙으로 나섰다.

    일단 협박은 제대로 먹힌 것 같고…….

    이제 할 수 있는 건 저승사자가 날 무사히 변호해주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크릉! 사건 번호 19999013023 망자, 박수온의 변호를 시작하겠습니다.”

    저승사자가 입을 열자 재판장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긴장한 듯한 저승사자가 마른침을 삼키며 준비한 서류로 눈을 돌렸다.

    “박수온 망자는 일곱 살 때, S급 헌터로서 수많은 생명을 구한 부모님이 일가족을 구하다 실종당하는 참혹한 일을 겪었습니다.”

    “오오……. 저런.”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다니, 훌륭한 부모님을 뒀군.”

    부모님의 실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판관들이 동요했다.

    진실의 거울에 헌터로 일하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비쳤다.

    ‘엄마……. 아빠…….’

    너무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지내서 희미해져버린 부모님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자 가슴이 벅차올라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나를 바라봅니다.]

    내게로 닿는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상태에서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면 눈물을 참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었지만, 착한 심성을 가진 박수온 망자는 그 누구보다 오빠 박시우와 동생 박지호를 애틋하게 생각하며 끈끈한 우애를 다져왔습니다.”

    판관들의 반응에서 희망을 본 저승사자의 견고한 목소리에서 전에 없던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야! 박시우! 야! 나 급하다고! 박시우!

    그때였다.

    진실의 거울에서 내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깐만, 저때는…….

    거울 속의 나를 마주하자 그날의 나의 행적이 떠올랐다.

    ―아! 왜 자꾸 불러? 너 진짜 별일 아니면 정육점에 팔아넘긴다. 박돈돈.

    ―악! 진짜 급한 일이라니까!

    거울 속 내 목소리가 더 위태로워질수록 지금의 난 입이 바싹 말라갔다.

    안 돼…….

    ―왜 무슨 일인데?

    ―누나, 왜 그래?

    그날 내 성화에 못 이긴 박시우와 마음 약한 지호까지 덩달아서 내 방에 달려 들어왔다.

    거울 속의 난 내 걱정에 쏜살같이 달려온 두 남자에게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불 좀 꺼줘.

    “아니…… 잠깐, 송출에 오류가 있었습니다. 다른 장면을 보시죠!”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저승사자가 리모컨으로 장면을 전환했다.

    스킵 할 수 있는 거였으면 빨리 좀 해주지…….

    이번에는 나와 박시우가 치킨을 먹고 있었다.

    ―야, 박시우. 닭다리 하나 어디 갔냐?

    ―그러게. 사장님이 실수로 빠트리셨나?

    치킨을 먹은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박시우, 아마추어같이 왜 이래?

    아, 저때는 설마…….

    깨달음과 함께 거울 속의 나는 등 뒤로 감춘 박시우의 손을 낚아챘다.

    박시우의 손에는 잘 튀겨진 닭다리가 들려 있었다.

    수온아! 제발 그 말만큼은……!

    ―자꾸 이런 식으로 장난질하면…….

    내가 사자를 부르기도 전에 내 살벌한 목소리가 재판장을 울렸다.

    ―손모가지 날아간다?

    다시금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박시우의 손모가지가 아니라 내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다는 직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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