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저승에서 계약한 성좌를 만났다 (2)
“염라대왕님, 괜찮으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흑두루미 판관이 떨어진 담뱃대를 손수 닦아 염라에게 가져갔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흑두루미 판관에게서 담뱃대를 건네받을 때도 염라는 내게서 쉬이 시선을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놀라는 걸 보니까 염라는 내가 죽은 걸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재판을 받기 위해 빼곡하게 줄지어 서 있던 개미 떼 같은 망자들을 떠올린 난 얼마 가지 않아서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바깥의 광경을 보면 염라가 내 죽음을 알지 못하고 있을 만도 해.
내가 재판장으로 들어오기 직전까지도 새로운 망자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떠올려보면 내가 저승탕에서 쓰러졌던 날에도 염라는 저승의 명부를 살피고 있었다.
온천에 와서까지 제대로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는 거겠지.
다른 성좌들이 쉬지 않고 떠들 때도 염라는 간혹가다 나타나는 게 전부길래 원래 말수가 적은 건 줄 알았는데, 막상 저승을 직접 보고 나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이해가 갔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어느 틈에 죽은 거냐”고 묻습니다.]
이것 봐. 내가 죽었단 걸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니까?
예상은 했지만 확인하고 나니 더 씁쓸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어떻게 계약자가 죽은 것도 몰라?’
얼굴이라고는 한 번 본 게 전부, 심지어 첫 만남부터 민폐를 끼쳤으니 엄밀히 말해 다른 성좌들보다는 사이가 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근래에 자주 나타나기도 했고 SS급 던전에서 날 지켜주기도 해서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내가 친구 같이 느껴진다고 해서 염라도 그렇다는 법은 없지.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입이 오리 주둥이처럼 삐죽 튀어나왔다.
나는 재차 시스템창으로 눈길을 돌렸다.
문구에 적힌 익숙한 별칭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까 염라의 시스템창이 아직도 내게 보이잖아?’
게다가 내가 망자가 되었는데도 염라는 변함없이 ‘성좌’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문득 저승사자가 내게 흘리듯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승에서 망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성좌는 ‘단 한 분’뿐이라고.
뭐야? 역시 그게 염라가 맞았잖아!
‘그런데 아까 내가 불렀을 때는 왜 대답 안 했어?’
사자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당연히 염라를 떠올렸다.
‘염라, 듣고 있어? 나 지금 네 고향에 와 있어. 저승 경관이 훌륭하네. 사방이 어두운 게 딱 내 앞날 같은데.’
그래서 염라에게 구구절절 내 심정을 털어놓으면서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본인은 하루에도 수십만 명의 죽음을 처리하느라 바쁘다”고 합니다.]
내 말이 염라에게 전해지긴 했던 모양이었다.
무슨 상황인지 이렇게 빨리 파악하는 거 보면 말이야.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그때도 재판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며 명부조차 상상하지 못한 일에 이마를 짚습니다.]
어쨌든 염라가 판사라면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그야 염라는 내 계약 성좌니까!
그간에 정이 있는데 모르는 척하기야 하겠어?
드디어 어둡던 내 미래에 한 줄기 빛이 보이자 서운한 마음이 금세 잊혀졌다.
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가장 상석에 앉은 염라에게로 옮겨갔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수십만 명 중에 본인의 계약자가 속해 있을 줄은 몰랐지만……”이라고 말끝을 흐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습니다.]
‘명부를 보는 너도 모르는데, 나라고 알았을까?’
내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쯤 저승에 있을 게 아니라 한적한 곳에서 여유를 즐기며 해령이 만들어준 돈가스 도시락을 먹고 있어야 했다고!
[성좌 ‘저승의 염라’가 “운수가 경고를 줬는데도 기어코 계약을 파기하고 도주라도 한 거냐”며 반쯤 체념한 상태로 묻습니다.]
‘죽으면서까지 계약을 파기할 정도로 목숨이 많지 않거든? 온천 사장으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고……. 딱 한 가지, 시스템창이 주는 요리 퀘스트만 빼면!’
바나나 몬스터를 잡다가 허무하게 열사병으로 사망한 순간을 떠올리니 시스템창한테 열이 뻗쳐서 뒷골이 뻐근해졌다.
‘시스템창이 나한테 바나나 우유만 만들라고 시키지 않았어도 너와 내가 저승에서 재회할 일도 없었다고!’
[성좌 ‘저승의 염라’가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간다”며 “네가 만든 바나나 우유를 마신 거로군”이라며 사인을 독극물로 단정 짓습니다.]
왜 아직 만들지도 않은 바나나 우유를 당연하다는 듯이 독극물로 치부하는 건데?
바빠서 시스템창 같은 건 못 보는 줄 알았는데, 내가 똥손이라는 건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바나나 우유는 만들기도 전이거든? 난 재료를 구하다가 열사병으로 죽은 거라고!’
[성좌 ‘저승의 염라’가 “본인 말고도 성좌가 셋이나 지켜보고 있는데 단순히 열사병으로 죽는 건 말도 안 된다”며 생각에 잠깁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혹시 성좌들에게 따로 원한을 산 적이 있냐”고 묻습니다.]
원한을 산 적이 있냐고?
염라의 물음에 순식간에 여러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운수에게 시도 때도 없이 부적을 써달라며 귀찮게 굴거나 해령은 도시락을 싸는 데 부려먹고 샤레니안과 함께 쑥 라테의 희생양으로 삼기도 했지.
당장 몇 가지만 떠올려봐도 그들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그다지…… 별로?’
[성좌 ‘저승의 염라’가 “누가 봐도 찔리는 데가 많은 얼굴”이라며 허를 찌릅니다.]
짚이는 데가 전혀 없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잘 연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의 속을 꿰뚫는 듯한 염라의 눈을 속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듣고 보니 이상하기는 했다.
저번에 던전 브레이크에서 흑화한 우나에게 달려들었을 때는 시스템창 한 면이 성좌들의 문구로 도배될 정도로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각자의 방법으로 나를 보호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죽기 직전까지 성좌들과 소통했지만 결과는 달랐지.
‘해령이 날 보호할 거라고 생각해서 다들 안심하고 있었던 거 아닐까?’
그때 해령은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하는 바람에 소환된 상태였으니까.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그렇다고 해도 성좌가 각인을 새긴 이상, 계약자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던전의 페널티로 체력이 깎이는 정도는 성좌가 대신 타격을 받게 되는 게 일반적”이라며 미심쩍어합니다.]
‘누군가 내가 타격을 입도록 개입했다는 거야? 설마…… 내 마스터키를 잠그고 바나나를 흑화한 그놈이…….’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그건 차차 살펴봐야 안다”며 내 담당 저승사자에게로 눈길을 돌립니다.]
“사건 기록지는?”
“여기 있습니다. 크릉!”
기다렸다는 듯이 저승사자가 날쌔게 염라와 판관들에게 사건 기록지를 전달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사건 번호-19999013023 기록을 살핍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염라가 사건 기록지를 몇 번 넘겨가며 내용을 훑었다.
‘내가 누군가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게 밝혀지면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어?’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그렇게 치면 다시 살아날 망자가 한둘이 아니다”라며 “억울하게 죽은 것도 어쨌든 죽은 것”이라며 딱 잘라 말합니다.]
듣고 보니 그랬다.
실수로 발을 헛디뎌 죽거나 살해를 당해 죽은 것도 억울한 죽음이니까.
그 망자들이 다 살아난다면 이승에서 현실판 좀비 영화를 볼 수 있게 되겠지.
[성좌 ‘저승의 염라’가 “네가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은 생사 재판에서 이기는 것뿐”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
왜? 내 성좌가 염라대왕이니까!
‘염라, 그래도 내가 명색이 네 계약자인데, 당연히 내가 재판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줄 거지?’
익숙하게 담뱃대를 향하던 염라의 커다란 손이 내 물음에 일순 멈췄다.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담뱃대에서 손을 거둬들인 그가 마른 장미 같은 적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글쎄……?”라며 모르는 척합니다.]
“야!”
염라의 딴청에 욱해버린 나의 우렁찬 목소리가 고요한 재판장 안을 가득 울렸다.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지금…… 저 망자가 염라대왕님께 ‘야’라고 한 것 같은데……?”
내 기세 좋은 외침에 재판장 안의 모든 이들이 입을 쩍 벌린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차…….
나 재판 중이었지?
그것도 내 생사가 걸린.
분위기로 봐서는 시작도 전에 목이 달아나게 생긴 것 같지만.
“무엄하도다! 이리 무례하고 발칙한 망자를 봤나?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대왕님, 더 볼 것도 없습니다. 저 망자가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도록 당장 얼음 지옥으로……!”
얼음 지옥?
추운 겨울에도 꿋꿋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집할 만큼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이긴 했어도 내가 얼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염라가 내 계약성이라고 말할까도 싶었지만, 분위기로 봐서는 그걸 알게 된다고 해도 그가 가까운 사이라고 말해주지 않는다면 판관들은 예의가 없다고 판단해서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 같았다.
“오해입니다! 제가 한 건 감탄사였습니다! 대왕님의 자태가 너무 고귀하고 수려하셔서 저도 모르게 “이야!” 하고…….”
난 다급하게 염라를 추앙하듯 과장된 손짓을 해가며 변명을 내뱉었다.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이 소리를 쳐놓고! 어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을 늘어놓는 것이냐?”
사태를 지켜보던 흑호랑이 판관이 버럭 화를 내며 큼직한 앞발로 탁상을 내리쳤다.
내가 생각해도 개소리긴 했어.
조금 전 염라를 향한 나의 외침은 앞구르기를 하면서 들어도 의도가 불순하다는 걸 알아챌 만큼 적의가 가득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것 같아?
이럴 땐 우기고 보는 거다!
창창하게 젊은 나이에 죽는 것도 억울한데 영원히 냉동 인간으로 생을 마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만큼 매력적이었다는 거죠. 이승에서는 격한 호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답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염라를 향해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어 웃었다.
“당장 잡아먹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