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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51화 (51/190)
  • 51화

    [탑의 주인이 XX합니다]

    “아, 배부르다. 몇백 년이 지나도 온천표 돈가스의 맛은 여전하군. 너무 맛있어서 피로가 싹 풀릴 정도랄까? 크릉! 크르릉!”

    허기를 채운 저승사자는 어느 때보다 만족스럽다는 듯 손으로 볼록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식사는 만족스러우셨나요?”

    “무척 만족했다. 크릉!”

    “저승사자님이 흡족할 만한 식사였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밥값을 하셔야죠?”

    “밥값이라니……?”

    방금만 해도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기분이 좋았던 저승사자는 불길함을 직감이라도 한 듯 진땀을 흘렸다.

    불안해하는 걸 보니 제대로 짚은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뇌물을 받은 저승사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사자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는 저승의 법, 잊지 않으셨죠?”

    “처음부터 이럴 속셈으로 도시락을 준 건가? 이런……. 크릉!”

    역시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야.

    어릴 적 들었던 이야기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내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저승사자가 두툼한 앞발로 이마를 짚으며 크게 좌절했다.

    어릴 적 책에서 보았던 전래동화 내용을 대충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저승사자가 죽을 사람을 데리러 갔는데 그 사람이 옷이나 신발, 음식을 대접했더랬다.

    그런데 뇌물을 받은 저승사자는 대접한 사람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는 게 저승의 법이라 죽은 사람을 살려줬다는 이야기였다.

    근데 이게 진짜일 줄은 몰랐지.

    이 정도면 K-동화 재평가가 시급했다.

    안도하던 난 빈 도시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령이 만들어준 도시락이 있어서 다행이야.

    이게 아니었다면 저승사자에게 뇌물을 줄 수도 없었을 테니까.

    도시락을 보고 있자니 문득 죽기 직전에 소환됐던 해령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해령은 괜찮을까?

    각인을 새긴 성좌는 계약자가 명부의 수명을 다 채우기 전에 죽으면 벌을 받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저승사자님, 혹시 성좌가 죽기도 하나요?”

    내 물음에 자포자기한 듯한 사자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내며 답했다.

    “죽지는 않지만 소멸당할 수는 있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거나 신의 규율에 반했다거나 할 때 말이야.”

    그럼 내 죽음으로 인해 해령이 소멸당할 가능성도 있다는 건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저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건…… 안 돼!

    해령은 이제 내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야.

    온천은 해령의 힘으로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공간이라고 했다.

    그 말은 즉, 해령이 소멸한다면 온천도 사라진다는 말이 됐다.

    내 직장도 같이 소멸한다는 거지.

    하지만 내가 해령이 없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건 꼭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좀 툴툴대고 까칠하게 굴긴 해도 해령은 매번 내게 요리를 해주고 세심하게 내 상태를 신경 써줬다.

    게다가 절대 안 해줄 것처럼 굴면서 해순이 연기도 도맡아서 잘해줬고.

    급조된 친구이긴 했어도 그날 이후로 해령이랑 진짜 친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

    유년기부터 학창 시절까지 S급 헌터 집안이라는 배경 때문에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는 내게 해령을 포함한 온천 식구들은 가족 외에 처음으로 친근함과 편안함을 느낀 존재들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잃고 싶지 않아.

    거기다 해령이 만든 온천표 돈가스의 빈자리는 그 누구도 매울 수 없어.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도 해령을 위해서도 난 저승에서 꼭 살아나가야만 했다.

    “일단 밥값에 대한 건 가면서 이야기해요. 재판에 늦으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지. 크르릉…….”

    재촉에 못 이긴 저승사자가 긴 한숨을 내쉬며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앞장섰다.

    “꼬리 잡아도 돼요? 너무 어두워서.”

    “알아서 해라. 크르릉.”

    난 살랑이는 사자의 꼬리를 붙잡은 채 그의 뒤를 따랐다.

    생각보다 촉감이 보들보들해서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 * *

    수온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형, 문자를 보냈는데 읽고도 답장이 안 오는 건 무슨 뜻일까?”

    지호는 스마트폰을 사자마자 새 번호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계속 전화를 해대는 시우 때문에 방금 다시 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46층에서 레이드 순서를 기다리는 내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지호가 게임에 빠져 있는 시우를 향해 심란하게 물었다.

    “게임 아이템 받으려고 연락했냐?”

    “내가 형인 줄 알아?”

    지극히 시우다운 답변에 지호가 답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참……. 아무리 급해도 형한테 물어볼 게 따로 있지.”

    “여자 문제? 뭘 어렵게 생각하고 그래. 그냥 사람 관계랑 똑같아. 너한테 관심이 없는 거지.”

    시우의 무심하지만 묵직한 팩트 폭격에 지호가 한층 더 우울해졌다.

    ‘내가 싫다면 부담 주지 않는 게 맞는 거겠지.’

    청순이 죽기 직전에 보낸 사우나 가운 사진 밑에는 자신이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1은 사라졌지만 회신이 없는 바람에 마지막 메시지로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화면을 침울하게 바라보던 지호가 액정을 끄는 순간이었다.

    전에 없던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탑이 크게 흔들렸다.

    [탑 46층 보스 ‘기억을 잃은 베카(SS)’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 * *

    베카의 폭주로 탑 46층 던전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계약자가 사망했습니다.]

    ‘수온이 죽었다고? 누구 마음대로…….’

    눈에 초점이 풀린 베카가 실소를 터뜨렸다.

    내게서 그 따뜻한 손길이 주는 온기를, 다정한 미소를 빼앗아가겠다는 말인가?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 수온이 죽는 것을.’

    수온이 죽었다는 알림을 본 그는 이성을 잃은 채 수온을 찾기 위해 탑을 빠져나가려 했다.

    “보스가 움직인다! 사방에서 공격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해!”

    그때 베카가 움직이는 것을 본 열망 연합 길드의 헌터들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그 공격에 수온에게 갈 길이 막히자 베카는 이성을 잃고 폭주했다.

    이 사달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이 긴 시간 46층의 문을 지키던 문지기 흰수염 할아버지도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탑이 통째로 흔들릴 정도의 소란이 일고 난 직후, 46층의 문이 열렸다.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냄새, 이건 피 냄새다. 그것도 상당한 양의…….’

    레이드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시우는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는 걸 감지하자 재빨리 선두에 서서 자신의 길드원들을 물러서게 했다.

    그때 열망 레이드 파티원으로 추측되는 두 사람이 어둠 속에서 문을 향해 다급하게 달려 나왔다.

    “사…… 살려줘!”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한 명은 한창희, 다른 한 명은 열망 연합 길드에 속한 파티원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채 마르지도 않은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둘의 몰골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한창희는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겁에 질려서 네발로 기어 밖으로 나왔고, 여자도 별반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강해, 너무 강해……. 길드원 모두가 달려들었지만…… 그 어떤 공격도 먹히지 않았어.”

    집필 길드원들이 비틀거리는 여자를 부축하는 사이, 시우는 초점 없는 눈으로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한창희에게로 다가갔다.

    “한창희, 일단 정신부터 차리고 찬찬히…….”

    “비켜! 길드원들이 보스를 속박했을 때부터 그놈의 공격 패턴이 바뀌었어. 눈동자가 더 시뻘겋게 변하면서 보스를 묶었던 길드원들이 모두 피를 토하면서 죽어나갔다고.”

    “패턴이 바뀌어?”

    “이런…… 이런 일은…….”

    한창희는 차마 완성되지 못한 말만 중얼거리다가 제게 손을 내미는 시우를 밀쳐내고 아래층으로 달아나버렸다.

    ‘눈동자가 시뻘겋게 물들면서 근처에 있는 모든 사람을 튕겨냈다고? 그것도 공격 한 번에 죽어나갈 정도로?’

    시우가 보기에도 46층의 보스는 전의 보스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집필이 46층을 공략하기 위해 들어간 것만 해도 세 번째인데…….’

    하지만 베카가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거나 사상자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통 기억을 잃은 베카는 시큰둥한 얼굴로 신전의 의자에 앉아 손가락만 몇 번 까딱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마치 적당히 어울려 놀아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기억을 잃은 베카는 손가락을 한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 체력의 4분의 3이 달아버릴 정도로 막강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위협적으로 해를 끼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시우는 조금 전 탑 전체에 떠오른 상태창의 문구를 떠올렸다.

    ‘패턴이 달라진 건 폭주 때문인가? 대체 알 수 없는 이유가 뭐길래 레이드 팟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베카가 폭주한 거지?’

    [스산한 기운과 함께 피의 폭풍이 일어납니다.]

    잠잠하던 46층 문으로 기억을 잃은 베카가 나타났다.

    그의 두 눈은 핏빛 섬광으로 빛나고 있었고, 뺨과 몸 곳곳은 자신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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