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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49화 (49/190)
  • 49화

    사망했어요

    가방 안에서 울린 건 지호가 주고 간 스마트폰이었다.

    누나, 저 지호예요. 혹시 제가 찍은 사우나 가운 사진 좀 보내주시겠어요? xxx-xxxx-xxxx]

    스마트폰을 꺼내 액정을 들여다보자 지호가 보낸 것으로 보이는 문자가 떴다.

    벌써 새 휴대폰을 샀단 말이야?

    나한테 폰을 주고 사라진 지 얼마나 됐다고?

    직접 겪고도 믿을 수 없는 실행력이었다.

    원래 이런 거 귀찮아하지 않았나?

    전에 레이드 하다가 핸드폰 액정이 나갔을 때도 밍기적거리다가 한참 뒤에나 새 폰으로 바꿨었잖아.

    오늘따라 내가 모르는 지호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지호의 핸드폰을 오래 들고 다닐 수도 없으니까 빨리 사진만 보내주자.

    이건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숨겨놨다가 적당한 때를 봐서 처리해야겠어.

    난 능숙한 손놀림으로 사진을 전송했다.

    “키킥.”

    그런데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바로 옆에서 볼 빨간 바나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 A급 던전의 몬스터 ‘볼 빨간 바나나(A)’에 스킬 ‘폭주’를 사용합니다.]

    물음표, 너 아직 있었어?

    [몬스터 ‘볼 빨간 바나나(A)’가 폭주의 효과로 무차별 공격을 가합니다.]

    고개를 들자 무척 흥분한 볼 빨간 바나나가 내게 돌진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도 별로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공격이라고 해봤자 체력 1이 다는 게 전부일 테니까.

    [볼 빨간 바나나의 몸통 박치기로 체력이 44 감소합니다. 체력 (1/45)]

    사우나 가운만 믿고 방심한 것을 틈타 바나나가 몸통을 세차게 부딪쳐 왔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며 나는 저만치 날아가 떨어졌다.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참! 그러고 보니까 나…… 사우나 가운 벗고 있는 상태였지?

    가운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이야.

    [칭호 ‘저질 체력’의 효과로 얼마 남지 않은 체력을 보호하기 위해서 강제로 수면에 빠집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칭호 효과까지 발동해서 죽기 직전에 잠들게 생겼다.

    ‘안 돼, 여기서 잠들면 영원히 잠드는 거야. 진짜로 죽는 거라고!’

    난 잠들지 않으려고 억지로 정신을 붙들었다.

    하지만 눈을 뜨는 것조차 버거워서 몸을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당장 바닥으로 쓰러질 것 같은 것을 버텨내기 위해 두 손으로 바닥을 짚는 순간.

    [성좌 ‘온천의 지배자’의 ‘각인’이 새겨진 계약자가 수명을 벗어난 죽음의 위기에 처했으므로 해당 성좌가 강제 소환됩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건가 싶었는데 내 앞으로 부채를 든 해령이 나타났다.

    급하게 소환된 탓인지 바다색 도포 자락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파도처럼 일렁였다.

    “쯧, 그러게 피곤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돌아오라고 했거늘. 분명히 주의를 줬는데도 듣질 않으니…….”

    쓰러지기 직전인 나를 돌아보던 해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잔소리를 쏟아내며 부채를 꺼내 들었다.

    해령이 부채를 새의 날개처럼 활짝 펼치자 주변의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박살 났다.

    ‘이제 살았다…….’

    안도하며 눈을 감으려는 순간이었다.

    [던전의 열기에 5분마다 체력이 5 감소합니다. 체력 (0/45)]

    ……어?

    [열사병으로 사망합니다.]

    내가 열사병으로 사망했다고?

    띠링!

    [사망하기 (1/1)]

    [!!히든 퀘스트(EX)!! ‘저승행 직행열차 (1) 요단강을 건너자!’를 클리어 합니다.]

    [보상 ‘저승행 직행열차 탑승 티켓’을 획득합니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연이어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박수온!”

    날 부르는 해령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몸이 바위에 눌린 것처럼 무거워서 움직일 수가 없어.

    얼마 안 가 세상은 온통 암흑으로 물들었다.

    ―사건 번호-19999013023 망자가 저승행 직행열차에 탑승하셨습니다. 열차가 출발합니다.

    어둠 속에서 지하철 안내 방송처럼 맑고 청아한 여자의 목소리가 열차의 목적지와 출발을 알렸다.

    열차? 열차라니?

    난 분명히 던전에 있었는데 어느 틈에 열차에…….

    당황스러운 마음에 몸을 움직여보려고 했으나 여전히 시야는 어둡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웠다.

    그 와중에도 내 의지와 관계없이 상황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열차가 출발하기 전에 내려야 해.’

    열차가 출발하면 꼼짝없이 저승으로 가게 된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힘찬 기적 소리와 함께 열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생각들이 꿈처럼 아득해졌다.

    * * *

    한편, A급 던전의 해령은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계약자 ‘박수온’이 사망했습니다.]

    “박수오오오오오온!”

    눈앞의 알림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해령의 눈동자가 절망적으로 요동쳤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주름진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해령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이 늙은이가 다시 함께 돈가스를 만들기로 한 약속을 지키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병상에 누운 노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해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범,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만 해도 내가 해준 돈가스 덕분에 힘이 난다고 했었잖아. 꼭 다시 일어나서 나랑 같이 온천에서 오래오래 같이 있어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제 마음도 해령님과 같습니다. 제 몸의 반은 해령님과 같은 신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반은 그렇지 못하지요. 제게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한, 이렇게 죽음을 맞는 순간을 피할 수 없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 다른 성좌들에게 수소문하면 할아범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

    앳된 얼굴의 해령은 거뭇거뭇하게 저승꽃이 핀 온천 할아범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이 꼭 붙들었다.

    “그래도 500년을 넘게 살았으니 보통 인간들보다는 훨씬 오래 살았지요. 해령님께는 찰나에 지나지 않는 순간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인생의 끝자락을 해령님의 온천에서 성좌님들을 모실 수 있어서 무척 즐거웠답니다.”

    “할아범, 왜 꼭 떠날 것처럼 말해? 할아범 말대로 나는 신이잖아. 분명 할아범 목숨 하나쯤은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제 마지막을 이리 행복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령님, 부디 좋은 계약자를 만나 이 늙은이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주십시오.”

    제 손을 쥐며 눈물을 흘리는 해령의 뺨을 고목나무 같은 손이 어루만졌다.

    굳은살이 가득한 탓에 거칠고 투박한 손이었지만, 해령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포근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인의 숨소리가 점점 희미해져갔다.

    “할아범! 정신 차려! 할아범!”

    노인의 숨이 멎었다.

    [계약자가 사망했습니다.]

    힘없이 떨어지는 노인의 손을 지켜보던 해령은 누구보다 슬프게 울부짖었다.

    빛바랜 기억을 떠올리며 휘청이던 해령은 곧장 수온을 향해 달려왔다.

    던전의 나무에 기댄 채 축 늘어져 있는 수온에게서는 늘 넘치던 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한시도 쉬지 않고 떠들며 온천에 활력이 되어줬던 그녀의 환한 미소가 해령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미소는 오랜 시간 적막했던 자신의 삶에 어느새 스며들어 있었다.

    어느샌가 수온의 말대로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성가시게도 느껴졌던 그 웃음이 사라질 거라고, 해령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박수온, 정신 차려……. 지금은 성좌가 고작 이런 일로 우는 거냐고 놀려야 할 거 아냐.”

    수온을 제 무릎에 올려 눕힌 해령이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온천으로 돌아가면 내가 돈가스를 해주겠다. 너 돈가스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눈을 떠봐.”

    ‘온천에서 잠들었을 때도 틈만 나면 잠꼬대를 하더니 왜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데?’

    돈가스라는 소리만 들어도 벌떡 일어나던 수온이었는데, 지금은 작은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시시각각 표정이 바뀌는 탓에 수온은 종일 지켜봐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만 바라보게 됐다.

    ‘지켜봤으니까 알고 있다.’

    수온은 장난기가 많은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이것도 장난이겠지.’

    꼭 장난이어야만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해령은 수온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박수온, 재미없으니까 장난 그만 치고 눈 뜨라고!”

    해령을 벗어난 수온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생명력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해령의 눈에서도 총기가 사라졌다.

    [계약자 ‘박수온’의 죽음으로 계약이 해지됩니다.]

    [‘각인’을 새긴 계약자가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으므로 각인을 새긴 성좌에게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그 자리에 넋을 잃고 주저앉은 해령의 양 손목에 두꺼운 옥으로 된 족쇄가 채워졌다.

    [‘성좌의 족쇄’ 형벌을 받았으므로 10년간 성좌의 힘과 권리를 박탈당합니다.]

    [‘성좌의 족쇄’에 의해 용의 힘을 박탈당합니다.]

    [‘온천(EX)’이 폐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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