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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48화 (48/190)
  • 48화

    넌 내게 반했어!

    “온천 사장에 대한 정보는 돈을 주고도 못 사는 거니까 이걸로도 턱없이 부족해요.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앞으로도 온천 사장에 관해 물어보겠다는 뜻인가?

    이렇게 되면 애써 연락 수단을 없애버린 보람이 없게 됐다.

    “난 괜찮으니까 스마트폰만이라도 가져가.”

    난 핸드폰을 돌려주며 한사코 거부했지만, 지호는 재빠르게 저만치 달아버렸다.

    S급이라 그런지 몸놀림도 가볍고 남다르게 빨랐다.

    “박지호!”

    “누나가 내 이름 불러주는 거 듣기 좋네요. 저장된 번호로 연락이 오는 건 무시하세요.”

    내 부름에 고개를 돌린 지호가 예쁘게 눈을 접으며 나른하게 웃었다.

    그는 곧 내게 스마트폰을 드는 시늉을 했다.

    “제가 지금은 좀 급해서. 곧 연락할게요. 그러니까 꼭 받아요. 누나.”

    내게 손을 흔들어 보이던 지호는 이동 마법석을 쓴 건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우리 지호, 어디 나가면 이성한테 오해 사기 딱 좋겠네.

    집으로 돌아가면 모든 여자에게 과하게 친절하면 생기는 문제점에 대해서 충고해줘야겠어.

    “어쩔 수 없네. 이건 받아두는 수밖에.”

    이제 확인해볼까?

    지호에게서 받은 스마트폰을 가방에 챙겨 넣은 난 던전의 한편을 돌아봤다.

    저곳에 누가 있는지.

    * * *

    “박지호,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길래 이제야 기어 올라와? 내가 연락한 지가 언젠데!”

    지호가 탑 46층에 오르자 벼르고 있었다는 듯이 시우의 잔소리가 폭탄처럼 터져 나왔다.

    “미안, 중요한 일이 있어서 알아보고 오느라 늦었어.”

    “46층 레이드 파티원들을 40분이나 기다리게 할 만큼 중요한 게 뭔데? 너랑 현정우가 제시간에 안 나타나는 바람에 지금 열망 연합 길드한테 선수를 뺏겼단 말이야.”

    다시 생각해도 열불이 난다는 듯 시우가 먹잇감을 놓친 사냥개처럼 이를 바드득 갈았다.

    ‘어쩐지 다른 때보다 유독 화가 많이 나 있다고 했더니 열망한테 순서를 뺏겨서였군.’

    “다른 길드랑 연합했다고 해도 열망이 46층을 깨는 건 무리야. 그보다 화력이 센 랭커들로 뭉친 우리가 떼로 몰려가도 어림도 없었잖아.”

    “그래서 46층 레이드보다 중요한 일이 뭔데? 꼭 납득이 되는 이유여야 할 거야. 길드원들이 버린 소중한 시간을 보상할 수 있을 만큼.”

    시우는 일과 관련해서는 핏줄이라고 해서 적당히 봐주는 것이 없었다.

    지호와는 각성한 이후로 늘 함께 일해서인지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면이 강했다.

    그래서 지호에게 가지는 기대도 더 컸고 말이다.

    날고 기는 랭커들로 이루어진 집필의 길드원들이 그의 말에 군소리 없이 따르는 건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냉철한 판단력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존경할 만한 부분이라는 데에는 공감하지만, 가끔은 너무 매정해서 섭섭할 정도야.’

    다소 뾰로통해진 지호가 볼멘소리로 답했다.

    “온천 사장님에 대한 정보를 얻었어.”

    “정말로?”

    온천 사장이라는 말에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던 시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날고 긴다는 랭커들을 모아도 46층을 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 헌터계의 실상이었다.

    전력을 강화할 수 있는 건, 더 강한 헌터를 영입하는 것뿐.

    그렇기에 최근 집필뿐만 아니라 모든 길드의 관심사는 무소속으로 활동하는 온천 사장의 정체와 행보였다.

    “응, 오는 길에 어떤 사람을 구해줬는데 그 사람이 EX급 온천에서 온천 사장님을 만났대.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늦었어.”

    “그 사람이 온천에 다녀왔다는 게 진짜라는 증거는?”

    지호의 이야기를 듣던 시우의 얼굴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의심이었다.

    익명 커뮤니티에 온천 사장에 관한 정보나 목격담을 제보한 사람에게 현찰로 10억의 포상금을 주겠다는 글을 띄운 이후로 연락이 온 건 전부 허위 증언이었다.

    그러니 시우로서는 사실 여부를 밝히는 게 먼저였다.

    “온천 사우나 가운. 온천 사장한테 받은 사우나 가운을 가지고 있었어. 거기에 온천 사장의 가호가 걸려 있었고 그 위력을 내가 직접 눈앞에서 확인했어.”

    “온천 사장의 가호가 걸린 사우나 가운이 있다고?”

    “응, SS급 몬스터를 단번에 쓰러트릴 정도였어.”

    지호의 말을 들은 시우의 태도가 사뭇 진지해졌다.

    시우의 예리한 눈빛이 지호의 손을 이리저리 훑었다.

    “그런데 왜 맨손이야?”

    “응?”

    “우리 자본을 끌어모아서라도 누구보다 먼저 온천 사장의 가운을 손에 넣었어야지!”

    시우가 답답하다는 듯 목청을 높였다.

    “사고 싶어도 못 사.”

    “왜 못 사? 안 팔 거래?”

    “아니, 사라져버렸거든. 사우나 가운이.”

    시우는 지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우나 가운이 왜 사라져?”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A급 던전에서 갑자기 SS급 몬스터가 나타났거든? 그걸 물리치더니 눈앞에서 빛이 되어 사라져버렸어. 일회성 아이템인 것 같더라고.”

    “너 꿈꿨냐? A급 던전에서 왜 SS급 몬스터가 나와? 낮잠 자서 늦은 거 발뺌하려고 소설 쓰는 거 아냐?”

    들을수록 황당한 전개에 시우가 불신의 눈초리를 했다.

    “내가 내 잘못 덮자고 소설 쓰는 사람이야? 그것도 굳이 온천 사장으로? 있어봐. 이럴 때를 대비해서 사우나 가운 사진을 찍어왔으니까.”

    사진을 보여주기 위해 몸에 있는 주머니부터 가방까지 샅샅이 뒤지던 지호의 손이 일순간 멈췄다.

    “아…… 맞다. 주고 왔지. 연락하기로 했는데.”

    이마를 짚으며 혼잣말을 하던 지호가 가방을 다시 들쳐 메고 시우를 마주 봤다.

    “나 오늘 레이드 못해. 급하게 가야 할 곳이 생겼어.”

    “갑자기? 다 같이 뭉쳐도 죽을 맛인데 너 없으면 오늘 파티 쫑 나!”

    “어차피 지금 우리 화력만으로는 46층 못 깨는 거 알잖아. 형은 온천 사장이 중요해, 실패할 게 뻔한 레이드가 더 중요해? 단서를 하나라도 더 모아서 온천 사장님을 찾는 게 먼저야.”

    시우의 만류에도 지호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서 돌아섰다.

    “그래서 어딜 가는 건데?”

    “스마트폰 새로 뽑으러.”

    “너 최신형 스마트폰 산 지 얼마 안 됐잖아! 그걸 왜 지금 해야 하는 건데?”

    ‘그야…….’

    사실 사우나 가운 사진을 빨리 받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시우의 물음에 걸음을 멈춘 것도 잠시, 자신을 향해 미소 짓던 청순을 떠올린 지호는 큐브 지팡이를 소환해냈다.

    ‘빨리 연락하고 싶으니까.’

    “날개.”

    지호의 외침에 그의 신발에서 날개가 돋아났다.

    평범한 A급 아이템에 지호의 S급 스킬 큐브를 사용해서 얻어낸 레전드리 옵션 날개.

    [레전드리 옵션 ‘날개’의 효과로 30분간 비행할 수 있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15분 00초>]

    “야! 박지호!”

    시우의 애타는 부름에도 지호는 날개 달린 신발로 뛰어올라 휑하니 공중으로 사라져버렸다.

    * * *

    지호가 사라진 뒤, 나는 곧장 볼 빨간 바나나를 흑화시켜 SS급 몬스터로 만든 정체불명의 물체가 날아온 방향으로 향했다.

    ‘뭔가 느껴져?’

    그 방향은 풀과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숲이라 혼자 힘으로는 수색하기가 어려웠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분명 방금만 해도 있었는데 공중분해라도 한 것처럼 기척이 사라졌다”며 수상하게 여깁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괜히 얼쩡거리다가 피곤한 일 만들지 말고 온천으로 돌아와라”라고 설득합니다.]

    SS급 몬스터로 공격한 걸 보면 내게 좋은 감정을 가진 게 아닌 것만은 분명하지.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찜찜하긴 하지만 더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또 누군가의 눈에 띌 수도 있으니까…….

    ‘더 수색하는 건 그만두자.’

    난 다시금 온천 마스터키를 들여다봤다.

    [스킬 ‘락(Lock)’의 효과로 일정 시간 동안 ‘온천 마스터키(EX)’가 잠깁니다. <남은 시간 : 9분 17초>]

    마스터키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아직 9분이나 남았네.

    때마침 바닥에 떨어진 발그레 바나나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널려 있는 바나나만 봐도 수십 개는 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지호가 나를 구해준다고 내가 모아놓은 볼 빨간 바나나를 사냥했었지.

    아마도 그때 떨어진 바나나들인 것 같았다.

    ‘공짜 바나나는 당연히 주워 가야지. 잘 먹겠습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땅에 떨어진 발그레 바나나를 하나씩 가방에 주워 담기 시작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며 귀환석을 써서라도 던전을 벗어나는 쪽을 추천합니다.]

    ‘귀환석을 써도 온천에 가려면 마스터키가 풀려야 해. 그리고 아직 발그레 바나나가 이만큼이나 남았는걸? 내가 직접 잡는 것도 아니니까 안전하고.’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에게 “혹시 주인을 걱정하는 거냐”고 묻습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개소리”라며 “불쾌하니 온천욕이나 해야겠다”며 사라집니다.]

    운수가 내 걱정을 한다니 말도 안 되지.

    나는 모처럼 샤레니안이 개소리를 했다는 것에 공감했다.

    그렇게 열심히 바닥에 떨어진 발그레 바나나를 주워 모은 결과, 내 가방에는 49개의 바나나가 채워졌다.

    하나가 부족해서 50개가 못 되다니 찜찜한데.

    딱 한 마리만 더 잡을까?

    부채를 불러내려던 난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운수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했었지.

    딱 하나 더 주워서 50개 채우고 싶긴 한데……. 그래도 만약을 위해서 전투는 하지 말까?

    사냥을 더 할지 멈출지를 갈등하고 있는데 가방에서 진동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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