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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47화 (47/190)
  • 47화

    청순하게 잠밍 아웃!

    염라가 손수 내게 옷을 입혀주는 장면을 떠올리자 나의 낯빛에 절망감이 서렸다.

    [가이드 ‘영계’가 “온천수에 휩쓸려서 쓰러진 날, 내가 두고 간 잠옷을 세탁해뒀는데 이번에 급하게 갈아입을 옷을 찾다 보니 그 잠옷으로 갈아입혔다”고 말합니다.]

    휴……. 다행이야.

    영계였구나.

    그 작은 몸집으로 내게 옷을 갈아입히려 애썼을 영계를 생각하니까 안쓰럽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귀여워!

    ‘영계야, 넌 온천의 빛이야! 위험한 남자들만 득실대는 온천을 환하게 밝혀주는 귀여움이자 희망!’

    난 어디에선가 나를 보고 있을 영계를 향해 아낌없이 애정을 표현했다.

    [가이드 ‘영계’가 날 노골적으로 부담스러워합니다.]

    [‘탑의 주인’이 ‘영계’를 경계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지금 영계를 귀여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맞아, 나 지금 대낮에 던전 한복판에서 애착 수면 잠옷을 입고 서 있는 중이었지.

    챙겨온 겉옷은 사우나 가운이 전부였다.

    아무 생각 없이 사우나 가운 하나 달랑 입고 나왔는데…….

    사우나 가운을 벗을 일이 생길 줄이야.

    그렇다고 이미 사라졌다고 부적까지 써서 감춘 가운을 주섬주섬 다시 꺼내 입을 수도 없고…….

    난처한 중에 또다시 창이 떠올랐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제발 어디서 본인이랑 계약했다고 말하지 말아달라”라고 부탁합니다.]

    ‘그렇게까지 부탁하지 않아도 말할 생각 없었거든요?’

    저승의 염라대왕이 내 성좌라고 말한다고 쳐, 누가 믿어주겠어?

    나만 미친 사람 취급받겠지.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나는 주인과의 의리를 위해서라면 쪽팔리는 것쯤은 감당해낼 수 있다”며 “원한다면 같이 잠옷을 입고 함께 있어주겠다”고 합니다.]

    ‘그건 내가 쪽팔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잠옷을 꺼내려다 말고 시무룩해집니다.]

    이 와중에 내가 쪽팔린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샤레니안이 잠옷을 입고 이곳에 오는 대참사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또라이는 무시하는 게 답이다.’

    징징거리는 샤레니안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난 내 최애 애착 잠옷으로 눈을 돌렸다.

    혹시 이 잠옷 때문에 지호가 날 알아보는 거 아니야?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내가 한 노력이…….

    나는 슬쩍 지호의 눈치를 살폈다.

    지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표정이 왜 저래?

    설마 진짜 알아챘나?

    아니지, 이건 공장에서 찍어내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옷이라고.

    한때 유행했던 옷이라 나만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혹시 의심하면 박박 우기면 됨.

    그런데 의심한다기에는 지호의 표정이 이상했다.

    꼭 당혹스러움을 숨기려는 것 같달까?

    어쩌면 잠옷 바람으로 나온 날 미쳤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긴장감에 잊고 있던 부끄러움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아니야! 박수온, 정신 차려!

    쪽팔릴 게 뭐 있어?

    옷에 노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곰돌이가 얼마나 귀여운데!

    자신감을 가져! 무려 내 최애 곰돌이 캐릭터라고!

    어느새 난 누가 뭐라 한 적도 없는데 애착 곰돌이 잠옷에 대한 자부심으로 기세등등해져 있었다.

    일전에 저승탕에서는 다 젖은 온천복만 걸치고 염라를 보기도 했는걸.

    그것보다는 잠옷이 훨씬 낫지! 암!

    “이건 온천에서 자다가 갑자기 던전으로 오게 되는 바람에…….”

    별일 아니라는 듯이 행동하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호는 이미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내 잠옷 차림이라면 지호에게 이미 수백 번도 더 보여줬다.

    분명 똑같은 잠옷 차림이라 특별할 것도 없는데, 애써 웃음을 감추는 지호를 마주하는 순간 기분이 언짢아졌다.

    “웃는 거 다 보이거든요. 내가 잠옷 바람으로 던전 한복판에 서 있는 게 그렇게 웃겨요?”

    “웃기다기보다는 귀…….”

    시큰둥한 물음에 지호가 하려던 말을 멈췄다.

    “왜 자꾸 말을 하다 말아요?”

    내가 아는 지호는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낯을 가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의외로 수줍어했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제게도 눈에 익은 잠옷이라 반갑게 느껴졌거든요. 친누나가 그 잠옷이랑 똑같은 걸 매일 입고 있어서.”

    다행히 걱정했던 것처럼 나를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그 친누나다. 이 녀석아.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건지 사과를 하던 지호는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더니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디건이라도 챙겨오는 건데……. 걸칠 만한 건 챙겨 오질 않아서요. 대신 이걸 드릴게요.”

    지호는 가방 안에서 에메랄드색 돌을 꺼내 들었다.

    “이게 뭔데요?”

    “A급 귀환석이에요. 주소를 검색하면 가장 가까운 지점으로 데려다줄 거예요.”

    A급 귀환석이면 700만 원은 거뜬히 넘는 물건인 걸로 알고 있는데, 이걸 덥석 내준다고?

    지호는 마트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생필품을 나누듯이 내게 A급 귀환석을 건넸다.

    이런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내주는 걸 보면 내 동생이 S급 헌터이긴 했구나?

    새삼스럽게 S급 헌터의 자본력에 실감하게 됐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인데?

    솔직히 전에 박시우에게 받은 200만 원도 큰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그에게는 정말로 용돈 수준이었다.

    모르는 사람한테도 700만 원짜리 귀환석을 덥석 안겨주는데 말이야!

    집에 돌아가면 박시우한테 용돈 더 달라고 해야지.

    박시우에게서 용돈을 뜯어낼 생각에 즐거워하던 나는 온천 마스터키로 눈을 돌렸다.

    [스킬 ‘락(Lock)’의 효과로 일정 시간 동안 ‘온천 마스터키(EX)’가 잠깁니다. <남은 시간 : 15분 00초>]

    아직 온천으로 돌아가는 마스터키가 잠긴 상태이니까 일단 귀환석은 받아두는 편이 좋겠어.

    “그럼 사양하지 않고…….”

    귀환석을 받으려는 순간, 지호가 귀환석을 든 손을 뒤로 뺐다.

    이건 또 뭐 하자는 거지?

    줬다 뺏는 거야? 뭐야?

    “그전에 그쪽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 어쩐지 700만 원이 넘는 귀환석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덥석 내준다 싶었다.

    어릴 때부터 심성이 순하고 착해서 밖에 나가서 이용당하기만 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럴 일은 없겠어.

    좀 성가시긴 했지만 동생이 한편으로는 여기저기 뜯기고 다니지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뭔데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알 수 있을까요? 그쪽 전화번호.”

    얼마나 더 캐물으려고 전화번호까지 물어보는 거야?

    지호는 A급 귀환석 하나로 아주 뽕을 뽑을 생각인 것 같았다.

    아주 장사꾼 다 됐네. 내 동생.

    그런데 어쩌나?

    “악!”

    나는 전화번호를 묻는 지호를 눈앞에 두고 냅다 고함을 내지르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내 핸드폰! 사우나 가운 주머니에 넣어뒀는데 가운이 사라지면서 같이 없어져버렸어요. 아직 할부도 다 못 채웠는데…….”

    난 지호의 가벼운 술수에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이름은요?”

    곤란한 표정을 짓던 지호가 내게 이름을 물어왔다.

    ‘어쩌지? 딱히 생각해둔 이름이 없는데.’

    갑작스러운 물음에 말문이 턱 막혔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해순이 자매품으로 염순이가 어떻냐”고 묻습니다.]

    염순이라니…….

    왠지 염라의 여자 모습이 상상되어서 꺼림칙해!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그 이름을 자꾸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하지 마라”라고 경고합니다.]

    [성좌 ‘샤레니안’이 “그냥 대충 아무 글자에나 ‘순’을 붙여서 지어봐”라고 말합니다.]

    ‘아무 글자에나 ’순‘을 붙이라고? 이왕이면 날 표현할 수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역시!’

    고민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청순?’

    [성좌 ‘저승의 염라’가 할 말을 잃습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요즘 청순이라는 말의 정의가 바뀌었냐”고 묻습니다.]

    난 연달아 떠오르는 창들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재밌자고 해본 말에 이렇게나 강력한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샤레니안은 원래 빠지는 데 없이 나타난다고 치자.

    그런데 염라는 다르잖아.

    운수가 염순이를 언급할 때도 아무 말이 없더니 내 이름을 청순으로 한다니까 굳이 할 말을 잃었다면서 나타나는 거 뭐죠?

    염라의 언행이 결심을 서게 했다.

    “청순이요.”

    오기로라도 청순으로 간다!

    “청순…….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그쪽이랑.”

    ‘봐, 우리 지호가 나랑 청순한 게 찰떡같이 잘 어울린다잖아!’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남매가 쌍으로 답이 없다”며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운수가 뭐라거나 말거나 난 지호의 칭찬에 어깨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나이는요?”

    이름이야 인사하는 셈 통성명했다 쳐도.

    한 번 보고 말 사이인데 나이까지 묻는다고?

    지호가 아직 나에 대한 의심을 다 못 버렸나?

    “스물셋이요.”

    나이가 같은 사람은 많으니까 나이만큼은 솔직하게 말했다.

    “저보다 한 살 누나시네요.”

    알아. 우린 한 살 터울 남매니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청순이 누나라고 부를게요. 제가 동생이니까 말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안 그래도 친동생한테 존댓말 쓰는 게 어색했던 터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놓자 지호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귀환석이랑 이것도 챙겨가세요.”

    지호는 내게 귀환석과 더불어 스마트폰도 안겨줬다.

    “이건…….”

    얼마 전에 새로 뽑은 지호의 최신형 스마트폰이잖아?

    게다가 한정판이라 중고여도 프리미엄이 붙은 모델이었다.

    “이건 네 거 아니야? 거의 새것 같은데 왜 날 줘?”

    대략 값을 매겨도 합쳐서 1,000만 원에 달하는 선물 공세에 당황한 내게 지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더 알고 싶어져서요.”

    “응?”

    뭐, 뭘 알고 싶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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