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그 S급 헌터의 말할 수 없는 비밀 (2)
박시우는 어려서부터 벌레를 극도로 무서워했다.
“박수온, 바퀴……! 바닥에 바퀴벌레! 징그러워 죽겠다고!”
“난 바퀴벌레 한 마리 때문에 쭈그려져 있는 네가 더 징그러워.”
키 187cm의 장성한 성인이 된 지금도 박시우는 작은 바퀴벌레 한 마리에 소파에서 붙어서 발을 동동 구를 정도니까 어렸을 때는 훨씬 더 심했다.
“악! 벌이야! 그것도 엄청 커다란 대왕 벌!”
내가 초등학교 5학년쯤이 되었을 때 일이다.
난 박시우와 지호랑 다 같이 하교하고는 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는 공원에서 말벌이 나타났다.
“호들갑 떨지 말고 그냥 지나가. 저 벌이 널 더 무서워할걸?”
그 당시의 내 성격은 지금이랑 다를 게 없어서 말벌에 바들바들 떠는 박시우에게 눈곱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지호는 달랐다.
“형아, 내가 말벌을 쫓아내줄게.”
그때에도 정의감이 투철했던 지호는 겁에 질려 있는 박시우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맨손으로 말벌을 잡았다.
그 뒤의 상황은 불보듯 뻔했다.
“악!”
말벌에 쏘인 지호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지호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그를 들쳐 메고 뛰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내 동생을 살려달라고 악을 썼다.
박시우는 본인 때문에 지호가 쓰러진 거라며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 내 뒤를 쫓았다.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요란하게 우는 바람에 주변의 어른들에게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주변의 신고로 늦지 않게 병원에 도착한 지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난 그때 정신이 든 지호의 첫마디를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누나는 진짜 멋진 전설의 용사님 같아. 난 나중에 커서 꼭 누나 같은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크윽!
지금 생각해도 심장을 부여잡게 만드는 귀여움이지.
그 꼬맹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지금은 세계가 알아주는 능력 있는 S급 헌터가 됐다.
그것만으로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운데.
“S급 헌터씩이나 되어서는 한심하죠?”
씁쓸하게 웃는 지호는 본인이 얼마나 빛나는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보다 타인을 위하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날 위해서라면 소중한 닭다리도 흔쾌히 양보해주는데…….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이게 다 어릴 때 S급 헌터로 각성한 지호에게 격려랍시고 언론과 사람들이 쏟아낸 기대 때문이겠지.
그 격려와 기대가 어린 지호에게는 독이 되어 어깨를 짓누르고 때로는 숨 막히게 했을 것이다.
“전혀요.”
내 단호한 대답에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지호의 시선이 곧바로 나를 향했다.
난 지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누구에게나 두려운 건 있어요. S급 헌터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지 로봇이 아니잖아요?”
난 지호가 자신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깨닫기를 바랐다.
그리고 자신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세우며 몰아세우는 대신 조금 더 자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겨주길 바랐다.
“문득 EX급 온천에 갔을 때 온천 사장님이 흘리듯이 하신 말이 떠오르네요.”
“어떤 말을 하셨는데요?”
온천 사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니 지호는 전보다 더 귀를 쫑긋 세웠다.
“본인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손님이 온천 이용권을 환불해달라고 하는 거라고요.”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쓸데없는 부분에서 솔직하다”고 말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온천 사장이 속물”이라며 “대체 누가 추천한 거냐”고 따집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일단 나는 아님”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자는 척 연기합니다.]
‘자꾸 이런 식이면 새로 만드는 바나나 우유 제일 먼저 입에 넣어준다? 누가 기미 상궁 할래?’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쟤 방금 말할 때 동공이 풀렸었다”라며 “더 자극하면 무슨 짓을 벌일지 예상할 수 없으니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도 종잡을 수 없을 정도라는 것에 나지막이 감탄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조용히 입을 다뭅니다.]
역시 운수가 눈치가 참 빨라?
운수의 대처가 흡족했던 나는 한결 또렷해진 눈으로 지호를 바라봤다.
“혼자 탑 46층을 뚫고 SS급 던전 브레이크를 클리어 할 만큼 강한 온천 사장님도 무서워하는 게 있다는 거예요. 사람이니까. 그게 당연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호 씨에게 두려운 존재가 있다고 해서 한심한 사람은 아니라는 거죠. 게다가…….”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던 나는 내 진심이 제대로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호와 눈을 맞췄다.
“지호 씨는 영문도 모른 채 던전에서 떨어져서 죽을 뻔한 저를 구해주신 은인이잖아요? 오히려 대단하고 멋진 분이죠.”
환하게 웃으며 지호를 칭찬하자 쑥스러운지 그의 양 볼이 수줍게 물들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럼 지호도 기운을 차린 것 같고 이제 슬슬 자리를 떠볼까?
“어쨌든 둘 다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아 참, 가운 사진은 다 찍으신 거죠?”
“그렇긴 한데…….”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지호는 내게 용건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미심쩍은 부분은 대충 잘 둘러댄 것 같은데, 아직도 물어볼 게 남았나?
“편하게 물어보셔도 돼요.”
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태연하게 행동했다.
“혹시 그쪽 이…….”
이? 이로 시작하는 게 뭐가 있지?
대체 뭘 물어보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저건 분명 뭔가 말하기 곤란할 때마다 짓던 표정인데…….
이 상황에서 지호가 나한테 말을 꺼내기 불편할 만한 게 뭐가 있지?
“이?”
“이…….”
참다가 못한 내가 재촉해서 묻자 나와 눈을 맞춘 채로 말을 더듬던 지호가 내 눈길을 피했다.
“……입은 사우나 가운 말이에요.”
“사우나 가운이 왜요?”
“그게…….”
급하게 이유를 찾기라도 하듯이 말끝을 흐리던 지호가 마침내 말을 이어갔다.
“온천 사장의 가호가 걸려 있다고 하면 부르는 게 값일 텐데, 저한테 파시는 건 어떠세요? 값은 원하는 대로 드릴게요.”
사우나 가운을 파는 건 곤란했다.
내 거짓말이 들통나고 말 테니까.
그렇다고 내가 온천 사장의 가호가 걸린 사우나 가운을 가지고 있다는 게 외부로 알려지면 그것대로 위험했다.
한창희 같은 물불 안 가리는 헌터들이 사우나 가운을 얻기 위해서 악독한 수를 쓸지도 모르는 일이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비장의 카드를 사용하기로 했다.
‘운수야. 네가 나설 때가 왔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어째서 내가 네 말대로 움직여줄 거라 생각하냐”며 거만한 표정을 짓습니다.]
‘여기서 네가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네 계약자가 다른 성좌의 손에 놀아나는 게 되니까. 그래도 괜찮다면 네 마음대로 해.’
난 운수의 대답도 채 듣지 않고 지호의 제안에 답했다.
“좋아요. 지호 씨는 제 은인이기도 하니까 팔게요.”
‘지금이야. 날 도울 생각이 있다면 내가 사우나 가운을 벗어서 인벤토리 창에 넣을 때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게 해줘.’
말과 동시에 나는 사우나 가운을 벗어들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특수 효과 부적’을 사용합니다.]
동시에 사우나 가운이 빛을 내며 사라지더니 인벤토리 창으로 들어갔다.
이게 되네?
솔직히 반신반의했는데 운수가 타이밍 좋게 도와줘서 다행이야.
안 되면 좀 아깝긴 해도 샤레니안한테 가운을 찢어달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지금 운수가 주인의 말을 들은 게 맞냐”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손으로 눈을 비빕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닥쳐”라고 말합니다.]
“어머, 이를 어쩌죠? 아무래도 일회성 아이템이었나 봐요, 하긴 SS급 몬스터를 막아낼 정도면 너무 사기긴 하죠.”
떠들썩한 성좌들을 뒤로한 나는 운수의 연출에 힘입어 사우나 가운을 팔지 못해서 안타깝다는 연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날 보는 지호의 표정이 어째서인지 당혹스러워 보였다.
“그보다 옷이…….”
손으로 입을 가린 지호의 눈길이 사우나 가운이 있던 자리로 향했다.
고개를 숙이자 나의 최애 곰돌이 잠옷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까 탕에서 쓰러진 뒤 깨어났을 때부터 난 이미 수면 잠옷 차림이었지?
그 당시에는 비몽사몽한 상태인 데다가 박시우가 문신이라고 놀릴 정도로 매일 입는 옷이라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럼 내가 잠든 사이에 누가 내게 수면 잠옷을 입혔다는 건데…….
‘대체 누가 잠옷으로 갈아입힌 거야?’
탕에 들어갈 때 온천복을 입긴 했지만…….
내가 아는 대로라면 그 온천엔 남자들만 득실거렸다.
그중에도 쓰러졌을 당시 내 곁에 있었던 건 단 한 명, 염라.
그렇다는 건 염라가 내게 잠옷을?
안 돼. 제발 그것만큼은 아니라고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