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그 S급 헌터의 말할 수 없는 비밀 (1)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정체불명의 물체가 몬스터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어서 흐릿하게 보이긴 하지만 온천 마스터키를 먹통으로 만든 놈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확신합니다.]
‘운수의 부적 같은 건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성좌 중 부적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건 나뿐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럼 부적도 아니라는 건데, 대체 정체가 뭐지?’
난 종잇장처럼 생긴 작고 얇은 물체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며 갈변한 거대 바나나의 기억을 더욱 유심히 들여다봤다.
“이게 다 뭐죠?”
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정신을 차린 지호가 손가락으로 허공의 필름을 가리키며 물어왔다.
“그게…….”
당황한 나는 내 위의 지호를 사정없이 밀치고 벌떡 일어나 내가 성좌의 부채를 사용하는 장면이 담긴 필름을 다급하게 가리고 섰다.
[기억을 되찾은 ‘갈변한 거대 바나나(SS)’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다행히 얼마 안 가 필름이 사라지고 갈변한 거대 바나나는 발그레 바나나로 변했다.
“A급 던전에서 SS급 몬스터가 나타나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뒤늦게 상태창을 확인한 지호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란스러워했다.
다행히 필름 안의 장면은 자세히 보지는 못한 것 같았다.
“SS급 몬스터가 나타난 것도 황당한데 죽어라 바닥만 깨부수다가 혼자 사라지는 건 또 뭘까요? 혹시…….”
뭔가 알아채기라도 한 건가?
내가 생각해도 E급 헌터라기에는 SS급 몬스터 앞에서 너무 태연했어.
의심을 산다고 해도 할 말이 없어.
아직 지호에게서 어떤 말도 듣지 못했는데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 없나? SS급 몬스터를 내가 물리친 게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그때, 내가 입은 사우나 가운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나는 물에 젖은 종이처럼 힘없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괜찮으세요?”
나보다 더 놀란 듯한 지호는 황급히 몸을 낮춰 나를 부축하고 나섰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다리에 힘이 풀렸나 봐요. 괜찮아요. 지호 씨는 못 보셨겠지만, 다행히 이 사우나 가운이 절 지켜줬거든요.”
나는 지호의 부축을 받은 채로 사우나 가운을 내려다봤다.
“사우나 가운이요?”
이 모든 게 사우나 가운 덕분이라는 말에 지호의 눈이 커다래졌다.
난 그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얼떨떨하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네…… 전 평범한 가운인 줄 알았는데 상태창에 온천 사장표 사우나 가운의 가호가 발동했다는 문구가 뜨면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이 가운이 아니었다면 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예요…….”
말끝을 흐리며 상상만 해도 두렵다는 듯이 가련하게 몸을 떠는 연기도 더해가면서.
‘일부러 몸을 떠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네.’
평소에 쓰지 않는 근육을 움직이려니 힘이 배로 들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보고도 믿기지 않는 하찮은 근력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처음 안 사실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충격받기는.
나는 샤레니안의 시스템창을 못 본 척 흘려 넘겼다.
“정말…… 아무 대책도 없이 절 구하신 거네요.”
그때, 어쩐지 전보다 가라앉은 듯한 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지호에게로 옮겨갔다.
꽉 쥔 지호의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네?”
“왜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신 거예요? 커다란 말벌이 아니라 SS급 몬스터였잖아요. S급 헌터도 목숨이 보장할 수 없는데 어째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지호가 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다그쳤다.
내 양어깨를 붙잡은 지호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크게 동요하는 지호의 얼굴을 마주하니 알 것 같았다.
지호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한 내게 도리어 화를 내는 이유를.
“커다랗고 노란 생명체가 하늘을 날고 있길래 말벌인 줄 알았죠. 갑자기 지호 씨 위로 떨어지려는데 일단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어서 상태창을 볼 틈도 없었고요. 그리고…….”
망설임 없이 이어진 내 답에 날 향한 지호의 눈빛이 파도처럼 크게 일렁였다.
“지호 씨도 날 구해줬잖아요.”
“……저는 S급 헌터잖아요.”
잠시간 넋을 놓고 나를 바라보던 지호가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정말, 누가 명예의 헌터 부모님 밑에서 난 자식 아니랄까 봐.
헌터로서 가진 사명감까지 똑같이 닮다니.
헌터가 꼭 정의로울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 근래에는 대부분 자신의 수입이나 명예를 가장 우선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의 부모님은 본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강한 힘을 가진 S급 헌터라는 이유로 그들을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매번 스스로를 사지로 밀어 넣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지호는 그런 부모님을 똑 닮아 있었다.
이런 부분 때문이었다.
박시우와 지호가 던전이나 탑에 가겠다고 나설 때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불안해지는 것은.
이따금씩 그들의 얼굴에 부모님의 잔상이 스쳐 지나가는 것도 다 같은 이유였다.
“S급 헌터라고 해서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똑같이 다치고 고통을 느끼죠.”
부모님은 예고도 없이 생긴 정체불명의 던전 브레이크에 빠질 뻔한 일가족을 구하려고 뛰어들었다.
일가족은 무사히 구조됐지만, 당시 최고의 S급 헌터로 추앙받던 부모님은 던전 브레이크에 휩쓸려서 그길로 실종됐다.
부모님은 수많은 사람을 구해냈지만, 정작 본인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구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없었다.
생사를 확인하기도 전에 급하게 마련된 추모식에 찾아와 의미 없는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추모식에 방문한 사람들이 건네는 위로의 말은 부모님의 죽음을 되돌릴 수 없는 사실로 못 박았고, 어리고 힘없던 우리 남매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부모님을 잃은 슬픔에 빠져야만 했다.
물론 그때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도 그 슬픔은 여전했다.
굳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슬픔을 드러내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더 힘들어질까 봐서 시덥잖은 일에도 웃으려고 노력했다.
물어본 적 없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는 아마 박시우도 지호도 나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둘은 그들보다 더 오랫동안 슬픔에 파묻혀 있던 나를 꺼내준 사람들이기도 했으니까.
더 밝으려고 애썼겠지.
“전 지호 씨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큼 본인을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어요.”
지호와 난 그 힘든 시간을 함께 이겨내온 가족이니까.
내게 더 소중하고 애틋했다.
“지호 씨가 다치면 가슴 아파할 사람들도 분명히 있잖아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누나로서는 네가 너를 위해서 몸을 더 아꼈으면 좋겠다고.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이날 이때까지 혼자 속으로 생각하는 게 전부였지만, 지금은 모르는 사람으로 지호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니 말하는 게 한결 쉬웠다.
“……마음 아파할 사람들. 네, 맞아요.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 같네요.”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들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지호가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 몸을 던져서 절 구해주셨는데 날카롭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그쪽도 충분히 많이 놀라셨을 텐데…….”
지호는 내게 목례를 하며 정중히 사과를 해왔다.
날 보는 그의 눈빛은 의심과 경계심이 어려 있던 이전과 달리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조금 놀란 건 사실이지만 괜찮아요. 절 걱정해서 한 말이라는 걸 아니까.”
“그것도 맞지만, 어쩌면 저 자신한테 화가 났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고개를 든 지호는 어딘가 모르게 풀이 죽어 있었다.
왜 또 신경 쓰이는 표정을 짓는 거야?
지금은 최대한 빨리 지호에게서 벗어나는 게 최선이지만,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모르는 척 지나치기 어려웠다.
박시우였다면 뒤돌아볼 생각도 않고 가차 없이 지나쳤을 텐데, 지호의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외면하기 힘들었다.
그래, 박지호.
내가 졌다.
언제나 그랬듯이 지호에게는 한없이 약해지고 말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울상인 아이를 달래듯이 조심스럽게 지호를 향해 물었다.
“그쪽한테 말벌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어요. 어릴 때 말벌한테 쏘여서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난 기억이 있거든요. 그래서인지 그 후로는 말벌이라는 말만 들어도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지호는 친누나인 내게도 털어놓은 적 없던 속마음을 줄줄 늘어놨다.
트라우마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줄은 나도 모르던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그건…….
박시우를 지키다가 생긴 트라우마잖아.
“그래서 위험한 상황에 무력하게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죠.”
지호의 낯빛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떠올랐다.
어째서 지호는 부끄럽게만 여기는 걸까?
자신의 가족을 지키다가 생긴 트라우마를.
난 문득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