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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44화 (44/190)

44화

???

고개를 들자 갈변한 거대 바나나가 던전의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아 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늘을 날고 있는 저 거대한 물체가 진짜 바나나는 맞는 거야?

이 와중에 저 크기의 바나나면 하나 가지고 수제 바나나 우유 백 잔은 충분히 만들고도 남겠다는 생각을 하는 나도 정상은 아닌 게 분명했다.

아무리 재료를 모으는 게 고된 노동이고 그걸 단번에 해결해줄 재료가 날뛰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저 거대한 바나나를 잡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고로 지금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시스템창에 뜬 문구를 훑던 난 낯선 스킬을 발견했다.

‘흑막의 령’은 또 뭐지?

일단 내 건 아닌데?

그렇다는 건 이곳에 따로 스킬의 주인이 있다는 거였다.

내 주문에 잠금이 걸린 것도 그렇고, 이 던전에 지호가 아닌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악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어쨌든 시스템창 문구로 봤을 때, 흑막의 령은 몬스터를 흑화시키는 것 같은데…….

설마 방금 그 바나나가 흑막이 되어서 까매졌다 뭐 이런 설정인 거야?

내가 생각하고도 실소가 터져 나올 정도로 어이가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밖에는 바나나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설명할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서 제 소개도 못 드렸네요. 전 집필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S급 헌터 박지호라고 합니다. 사우나 가운 사진은 가운만 나오게 수정해서 온천 사장님을 찾는 단서로 여러 곳에 유포될 예정인데 괜찮을까요?”

“……네.”

나는 답을 하면서도 지호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지호가 설명하는 동안에도 갈변한 거대 바나나는 하늘을 향해 점점 더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안 돼!

저 높이에서 찍어내리면 아무리 지호라도 종잇장이 되어버릴 거야!

보통 볼 빨간 바나나였더라면 S급 헌터인 지호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겠지만, SS급 갈변한 거대 바나나가 상대라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지호에게 알린다고 한들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S급 헌터이긴 하지만 지호는 공격이 아니라 제작 계열이니까.

던전 브레이크에 휩쓸렸을 때, S급 장난감 오리 인형들을 상대하는 것조차 벅차했던 걸 생각하면 그가 갈변한 거대 바나나를 대적하는 건 불가능했다.

갈변한 거대 바나나는 그때의 오리 인형보다 등급이 높은, 무려 SS급 몬스터다.

예전에 우나도 성좌의 각인을 빌려서 간신히 무찔렀는데, 지호가 갈변한 거대 바나나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잘못하면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바나나의 집채만 한 몸통에 치인 지호가 종잇장처럼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하자 등골이 서늘해지며 식은땀이 났다.

나는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가운에 슬쩍 문지르며 침착함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급할수록 냉정하게 판단해야 했다.

지금 갈변한 거대 바나나를 해치울 수 있는 건 태초의 바람뿐.

SS급 스킬인 태초의 바람 한 번이면 흑화한 바나나도 제자리로 돌아오겠지.

스킬을 사용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성좌의 부채를 사용했다가는 지호에게 내 정체가 탄로 날 게 뻔했다.

부채를 사용하는 잠깐의 시간 동안 지호의 주의를 끌 방법이 없을까?

머릿속에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어지럽게 뒤엉켰다.

혼란이 가시기도 전, 최고점을 찍은 갈변한 거대 바나나가 지호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위, 위험해!”

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던져 지호를 감싸 안고 맨바닥을 굴렀다.

사우나 가운 덕분인지 고르지 못한 돌바닥에 강하게 부딪혔는데도 타격이 거의 없었다.

역시 SS급 아이템이라 다르긴 달라?

왠지 흙도 좀 덜 묻은 것 같고?

새삼스럽게 SS급 던전 브레이크에서 개고생한 보람이 느껴졌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 없이 바로 뒤에서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들렸다.

갈변한 거대 바나나가 지호가 있던 자리에 가히 파괴적인 속도로 내리꽂혔다.

조금만 늦었다면…… 지호는 저 아래에 뭉개져 있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지며 손이 떨려왔다.

“괘…… 괜찮으세요?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너무 순식간이라 그런지 지호는 거대 바나나를 미처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내 위에 쓰러져 있던 지호가 당황한 기색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재차 흔들리는 지면의 진동에 이기지 못하고 다시 쓰러졌다.

이제 끝난 건가?

조금 잠잠해졌나 싶었는데 갈변한 거대 바나나의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깊게 파인 바닥의 주변으로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바닥 사이로 우주처럼 어두운 공간이 드러났다.

저건 꼭 베카가 던전 브레이크를 열었을 때 봤던 암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잔잔한 바람 때문에 베란다가 날아갔을 때, 베카가 생성한 던전 브레이크의 입구 역시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기분 탓이겠지? 분명히 기분 탓일 거야!

애써 현실을 외면하려던 그때,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탑의 주인’이 “바닥에 가해진 충격으로 던전에 균열이 생기고 있어”라고 말합니다.]

베카!

몹시 반가운 와중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던전에도 균열이 생겨?

박시우가 새로운 가족이라며 내게 사우나 통을 소개해줬을 때만큼이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키킥!”

나와 지호를 끝장을 낼 때까지 멈추지 않을 생각인지, 갈변한 거대 바나나는 깊이 박힌 자신의 몸을 빼냈다.

긴 몸체가 빠져나올 때마다 그 힘을 버텨내지 못한 돌 부스러기가 날렸다.

순식간에 자신의 몸을 빼낸 갈변한 거대 바나나는 다시 한 번 공중으로 높게 뛰어올랐다.

커다란 덩치로 움직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여기서 균열이 더 생기면 어떻게 되는데?’

[‘탑의 주인’이 “또 다른 던전으로 휩쓸리게 되겠지”라고 말합니다.]

‘그 던전이 어딘데?’

[‘탑의 주인’이 그건 정해진 것이 아니라 본인도 알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거립니다.]

[‘탑의 주인’이 다만 어딜 가더라도 본인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 던전 브레이크에 휩쓸리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

내 절규에 전보다 조금 더딘 속도로 창이 떠올랐다.

[‘탑의 주인’이 “던전 브레이크를 생성하면 난이도 조절이 가능하니 원한다면 지난번처럼 진짜 던전 브레이크를 열어주겠다”고 합니다.]

‘아니야! 멈춰! 베카. 난 그런 걸 원한 적 없어!’

지난번에도 베카는 SS급 던전 브레이크를 놀이 수준으로 여겼다.

나랑은 난이도 기준이 완전히 달라서 믿기 어려울뿐더러 던전 안에서 또 다른 던전 브레이크가 생긴 이유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어.

전례에 없는 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런 일에 자꾸 엮이게 되면 의심을 사기에 딱 좋았다.

겉보기에는 다섯 살 꼬마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자꾸만 잊게 된다니까.

사실은 마탑을 지배하고 마음대로 던전 브레이크를 생성할 수 있는 강력한 존재라는 걸.

[‘탑의 주인’이 단호한 거절에 오리 부리처럼 입술을 내밀며 시무룩해집니다.]

토라진 베카가 아무리 귀엽고 안쓰러워도 던전 브레이크는 안 돼.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베카를 외면했다.

지금은 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게 먼저야.

난 하늘 높이 떠 있는 갈변한 거대 바나나와 균열이 간 바닥을 번갈아 봤다.

저 녀석이 또 떨어지면 땅이 완전히 부서지고 말 텐데…….

그러면 꼼짝없이 또 다른 던전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되겠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검댕이 바나나가 바닥에 부딪히기 전에 처치해야만 했다.

“대체 무슨 일이…….”

내 위로 엎어져 있던 지호가 고개를 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지호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게 얼마 만이더라?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얼굴에 뭘 곧잘 묻히고 다녀서 매번 닦아주고는 한 것 같은데.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워서인지 지호는 살짝 당황하는 눈치였다.

“어…… 그러니까.”

지호가 뭔가를 말하려는 그때, 갈변한 거대 바나나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소용돌이를 만들며 우리를 향해 쏜살같이 다가왔다.

지금을 놓치면 지호랑 나 둘 다 위험해져.

생각해내자. 지호를 잠시라도 묶어둘 수 있는 것.

“말벌!”

“네?”

“지금 지호 씨 바로 뒤에 커다란 말벌 몬스터가 나타났다고요!”

“말벌이 내 뒤에…….”

내 말에 지호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혼잣말을 하면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바퀴벌레, 무당벌레, 지렁이, 삼발이, 사마귀…… 그 어떤 벌레도 맨손으로 때려잡는 그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파충류.

그게 말벌이었다.

아마도 어릴 때 말벌에 쏘여서 죽을 고비를 넘긴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은 거겠지.

그래서인지 지금도 말벌이라는 말만 나와도 몸이 딱딱하게 굳었고 어쩌다 보기라도 하면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질 정도였다.

지호에게 기분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한 건 미안하지만, 이 방법이 최선이야.

‘부채.’

지호가 얼어붙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안, 그의 등을 감싸고 있던 오른손을 살며시 들어 성좌의 부채를 불러냈다.

다행히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부채는 내 부름에 응했다.

갈변한 거대 바나나가 몰아온 서늘한 회오리바람이 머리 꼭대기를 스칠 때였다.

나는 해령과 함께 태초의 바람을 썼던 기억을 떠올리며 부채를 펼쳐 들었다.

온몸의 감각이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동작 하나하나에 전율이 일었다.

난 부채를 든 손에 힘을 실어 거대 바나나를 향해 있는 힘껏 휘둘렀다.

‘태초의 바람.’

[성좌의 부채가 ‘태초의 바람’을 일으킵니다.]

[스킬 ‘태초의 바람’ 효과로 ‘갈변한 거대 바나나(SS)’가 추억에 잠깁니다.]

태초의 바람이 제대로 먹힌 건지 갈변한 거대 바나나의 기억이 필름처럼 쏟아져 나왔다.

다만, 우나 때와 차이가 있다면 필름의 길이가 짤막하다는 것이었다.

우나는 박시우와의 기억만 해도 양이 어마어마했는데 말이야.

발그레 바나나가 상점에서 인기가 많아 따로 볼 빨간 바나나만 잡으러 다니는 헌터도 있다는 지호의 말을 생각해보면,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몬스터인 것 같았다.

기억이 짧을수록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게 빨라질 테니까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

갈변한 거대 바나나의 기억을 대충 훑어보던 나는 한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건 뭐지?’

갈변한 거대 바나나로 변하기 직전, 볼 빨간 바나나에게로 작은 물체가 날아와 붙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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