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43화 (43/190)

43화

바나나가 흑화하면?

“그러니까 바로 그…… EX급 온천 사장을 말씀하시는 게 맞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지호가 내게 거듭 확인했다.

“네, 그 EX급 온천 사장이요! 제가 아무래도 그분이 운영하는 온천에 다녀온 것 같아요.”

“아……?”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는지 지호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온천 사장을 언급하려는 순간, 삭제 익명 헌터 게시판에서 봤던 글이 떠올렸다.

EX급 온천에 다녀온 후기.

헌터들의 후기가 있다는 건, 나도 그 후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헌터 중에서 온천에 대해서 나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잖아?

누구보다 생생한 후기를 전할 자신이 있었다.

일단은 여느 후기들처럼 평범하게 시작하자.

“제가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E급 헌터라 던전 지리를 잘 몰라서 길을 헤매고 있었거든요. 체력 포션을 살 돈도 없어서 아이고 이대로 죽겠구나 했는데 목조로 된 건물이 보이는 거예요. 도움을 구하러 안으로 들어갔는데 웬걸? 온천이더라고요?”

난 기억에 남는 후기들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섞어 EX급 온천 썰을 풀기 시작했다.

흔하지 않은 정보인 만큼 지호는 어느새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던전 한복판에 온천이 있었다는 이야기인가요?”

“네, 제가 길치라 정확한 위치는 설명할 수 없지만 던전의 어딘가였어요.”

온천을 처음 봤던 때를 회상하며, 나는 실감 나게 말을 이어나갔다.

“온천 안으로 들어가서 사정을 설명했더니 젊은 여성분이 나오셔서 제게 옷과 먹을 것을 내어주셨어요. 이 가운도 그때 받은 거고요.”

“EX급 온천의 물건들은 특별한 효과가 있다던데, 그 가운도 그런가요?”

사우나 가운의 출처를 밝히니 지호가 관심을 보였다.

사우나 가운이 SS급인 게 알려지면 난리가 나겠지.

다른 의미로 헌터들의 표적이 될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떼돈을 벌었을 텐데, 아쉽게도 이 옷은 평범한 사우나 가운이에요. 진짜 놀라운 건 온천의 음식들이었어요. 사장님이 만들어주셨는데 돈가스는 먹기만 해도 체력이 회복되고 쑥 라테는 먹자마자 체력이 막 상승하더라니까요?”

“쑥 라테를 먹기만 해도 체력이 상승한다고요? 배탈이 나본 적은 있는데…….”

지호는 쑥 라테라는 말에 끔찍한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표정이 어두워졌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지호의 말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가슴 깊이 공감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지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일처럼 공감합니다.]

좀 조용해졌다 싶더니, 또다시 쑥 라테의 피해자들이 줄이어 출몰했다.

‘필요할 때는 감감무소식이더니 이럴 때만 빠르지? 그럴 시간에 내 마스터키 잠근 범인을 찾아내란 말이야.’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마스터키를 잠근 걸 보면 이미 정체가 들통난 것 같은데 범인을 찾아내서 어쩔 거냐”고 묻습니다.]

‘어떻게든 입막음을 해야지!’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살아 있는 입을 무슨 수로 막을 거냐”고 묻습니다.]

‘그건……!’

생각해본 적 없는데.

돈으로 매수해야 하나?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그런 문제라면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그때 염라가 나타났다.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성좌 ‘저승의 염라’가 내게 붓과 명부를 건넵니다.]

…….

확실히 무엇보다 깔끔한 방법이긴 했지만, 너무 극단적이었다.

‘저기…… 염라? 집어넣지 않겠어?’

[성좌 ‘저승의 염라’가 시무룩해집니다.]

아니, 안 되는 걸 안 된다고 했을 뿐인데 왜 풀이 죽는 거야?

무엇보다 아무리 내가 계약자라지만 아무 때나 명부를 덥석덥석 내놔도 되는 거냐고.

‘어차피 이름도 몰라. 그러니까 명부는 넣어둬.’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그럼 온천에 돌아올 때까지 이름을 알아두겠다”고 합니다.]

아놔,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

상대가 염라대왕인 만큼 사후의 일을 생각해서 좋게 돌려서 말했건만, 염라는 끝내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 우리 염라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죽이진 않겠지만 마스터키를 잠근 게 누군지 알아내긴 해야 하니까.

범인을 찾는 건 염라에게 맡겨두기로 했다.

“그런데 죽을 뻔하셨다면서 A급 던전에는 왜 와 계신 거죠?”

지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E급 헌터가 A급 던전에 들어온다는 건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지.

하지만 당황할 건 없었다.

아직 내 EX급 온천 썰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제 말이요! 전 분명히 온천의 객실에서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까 온천은 온데간데없고 A급 던전에 와 있지 뭐예요? 정말 헌터님이 구해주지 않으셨다면 전 이미 세상에 없을지도 몰라요.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난 생명의 은인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감격한 표정으로 지호를 바라봤다.

역시 온천 경험담의 마무리는 ‘있었는데 없었습니다’로 끝나야 제맛이지!

“아니에요. 보상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닌걸요. 하지만 혹시 괜찮으시다면 온천 사장님 생김새에 대해서 말해주실 수 있나요? 온천 사장님을 찾고 있는데 정보가 부족해서요.”

온천 후기가 먹힌 건지 지호가 내게 온천 사장에 관해 물었다.

이미 탑에서 찍힌 사진이 퍼졌으니까 알려진 대로 말하면 되겠지.

“잠깐 본 게 다긴 하지만, 허리까지 오는 긴 은발에 사파이어색 눈동자를 가지고 계셨어요. 그리고 하나 더!”

난 검지를 세워 들며 비장하게 말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엄청난 미인이셨어요.”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당신의 양심, 어딘가에 떨어뜨리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물어옵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성좌의 귀걸이를 뺀 얼굴을 떠올려보라”라고 말합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그새 온천 사장이 바뀌었냐”고 묻습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다들 바보 아니냐”며 “저건 온천 사장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일 뿐이야”라고 말합니다.]

온천 사장이 범접할 수 없는 미인이라는 증언에 성좌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이 와중에 다른 그들을 바보 취급하는 샤레니안이 제일 기분 나빴다.

‘너희들이 뭔데 나를 평가해? 그리고 샤레니안…….’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부름에 나를 기대하는 얼굴로 바라봅니다.]

‘입 다물어.’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영문도 모르고 충격에 빠집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지금도 영문을 모르는 그 머리가 더 충격적”이라고 말합니다.]

“때마침 그쪽이 온천 사장님이랑 머리카락이랑 눈동자 색이 같네요. 혼혈이 아닌 이상 푸른 눈동자는 가지기 어렵잖아요. 은발은 더 그렇고. 우연이라기에는 온천 사장님과 겹치는 부분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성좌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중에 지호가 나와 온천 사장의 외형이 닮았다는 점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지호가 내가 했던 것처럼 검지를 들어 올리며 나와 눈을 맞췄다.

“보기 드문 미인이신 점까지.”

눈을 접으며 은근한 웃음을 흘리는 지호는 내게도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우리 지호, 많이 컸네.

끼도 부릴 줄 알고.

그래봤자 친누나인 나한테는 어릴 때부터 키운 강아지의 재롱쯤으로 보이지만.

“원래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었는데 온천수에 들어갔다가 나왔더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변해 있더라고요. 사장님께 물어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쓰러지듯이 잠들어버렸고 깨어보니까 이곳이어서…….”

“온천수에 들어갔다가 죽기 직전에 살아났다는 이야기까지는 들어보긴 했는데…… 외형이 바뀐다는 이야기는 처음이네요.”

EX급 온천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으니 지호도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일반 온천이라고 생각해서 흘려들었는데 사장님께서 온천 안에 탕이 여러 개 있는데 탕마다 효과가 다르다고 하셨어요. 어쩌면 이것도 탕의 효과일지도 모르죠.”

캬, 내가 생각해도 이번 건 기발했다.

“게다가 저는 고작 E급인걸요. 온천 사장은 EX급이라던데 대체 얼마나 강할지…….”

짧은 시간에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낸 내 창의력에 감탄해 마지않던 그때, 지호에게서 진동음이 들렸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내게 양해를 구한 지호가 전화를 받자 박시우의 목소리가 화면을 뚫고 나왔다.

―너 어디야?

“지금 탑으로 가던 길이야.”

―내가 오늘 아침 일찍 모이라고 했잖아! 지금 너랑 현정우만 안 와서 다들 기다리고 있다고! 그 자식은 포털 스킬도 있으면서 매번 늦는 게 말이 되냐? 집 가까운 놈들이 지각한다더니, 빨리 안 와?

“알았어. 갈 테니까 일단 끊어.”

박시우 목소리 큰 건 알아줘야 해.

스피커폰도 아닌 데다 건너서 들었는데도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적절한 때에 대화가 끊겼어.

“혹시 단서가 될지 몰라서 길드원들과 공유하려고 그러는데 사우나 가운 사진 한 장만 찍어가도 될까요? 부담스러우시다면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평범한 가운인데 예민하게 구는 것도 이상하지.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도 없고.

“옷 외에 다른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받으면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럼 가운 사진 한 장만 찍을게요.”

지호가 사진을 찍기 위해 나를 향해 렌즈를 맞추는 순간이었다.

[???가 A급 던전의 몬스터 ‘볼 빨간 바나나(A)’에 스킬 ‘흑막의 령’을 사용합니다.]

[스킬 ‘흑막의 령’의 효과로 ‘볼 빨간 바나나(A)’가 ‘갈변한 거대 바나나(SS)’로 흑화합니다.]

“키키!”

알 수 없는 힘에 검게 물들며 단숨에 나의 세 배쯤은 커져버린 바나나가 나를 향해 전보다 더 비열하게 웃어 보였다.

이 보기만 해도 불량한 바나나는 또 뭐야?

“찰칵.”

셔터 소리와 함께 지호 위로 흑화한 바나나가 집채만 한 몸집으로 뛰어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