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온천 사장 맞아요!
큰일 났다!
마스터키까지 막혀서 달아날 수도 없게 됐는데…… 이러다 다 들통나는 거 아니야?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어차피 각인을 쓴 상태라 친누나라는 건 모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고작 눈동자랑 머리카락 색 바뀐 걸로?’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보다 온천 사장이라는 게 먼저 들킬 것 같은데 일반인인 척이라도 해보는 건 어떻냐”며 흥미로워합니다.]
맞아.
각인한 내 생김새를 현정우가 커뮤니티에 올린 적이 있었지?
게다가 난 사우나 가운 차림이었다.
여기에 헌터이기까지 하면 영락없이 온천 사장이잖아?
어차피 온천 마스터키도 쓸모없어진 상황에 이 자리를 벗어날 뾰족한 수는 없어 보였다.
부딪치는 걸 피할 수 없다면 이 방법뿐이야!
“악!”
작전을 바꾸기로 한 나는, 마치 종이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바닥으로 힘없이 풀썩 널브러졌다.
온천 사장은 강하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역으로 약한 척을 하는 거야!
몬스터를 잡기는커녕 보는 것만으로 겁에 질린 것처럼 말이다.
약해빠진 모습을 보여서 온천 사장이라는 의심을 피하자는 것이 나의 새로운 계획이었다.
“킥?”
“키킥!”
방금만 해도 자신들을 두드려 패던 내가 느닷없이 뒤로 발라당 넘어가자 내게 몸통 박치기를 날리던 바나나들이 당혹스러워하며 공격을 멈췄다.
야, 이 바나나들아! 여기서 공격을 멈추면 어떡해?
어서 날 위협하라고!
[칭호 ‘몬스터도 당황한 명품 발연기’를 획득합니다.]
[칭호 ‘몬스터도 당황한 명품 발연기’의 효과로 몬스터들이 1분간 공격을 멈춥니다. <남은 시간 : 59초>]
대체 저딴 칭호는 누가 만드는 거냐고!
몬스터가 날 공격하지 않으면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단 말이야!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시스템창한테 독극물로 암살 시도를 해놓고 무사할 줄 알았냐”고 묻습니다.]
‘야, 너 자꾸 독극물 취급하는데, 그건 엄연히 내가 만든 쑥 라테였다고!’
[시스템창이 ‘내가 만든’에서 이미 독극물이 된 거라고 말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이 창을 좋아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이 창을 좋아합니다.]
기분 나쁘긴 한데……! 또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네……?
쑥 라테의 피해자들이 연이어 시스템창의 편에 섰다.
‘야, 너희들! 내 성좌 아니야? 사람 뻔히 눈앞에 있는데 시스템 편을 들어?’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틀린 말은 아니지 않냐”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옳소!”라며 주먹을 쥔 팔을 뻗어 듭니다.]
어느새 그들에게 내가 만든 쑥 라테는 독극물로 분류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하여간 정나미라고는 없는 성좌놈들.’
그래도 내가 계약자인데 최소한 독극물은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
“괜찮으세요?”
성좌들과 시덥잖은 논쟁을 벌이던 사이, 지호가 큐브 지팡이로 볼 빨간 바나나들을 무찌르고 내게 다가와 물었다.
내게로 건넨 손을 응시하던 나는 고개를 들어 지호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해령의 말대로 진짜 날 못 알아보잖아?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각인을 한 데다가 성좌의 귀걸이를 착용한 상태니 최소 천상계 외모로 보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처음 각인한 내 모습을 거울에 비쳐봤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확실히 현실에 존재한다고 믿기 어려운 분위기였지.
어쨌든 지호가 나라는 걸 알아채지 못한 것 같으니까 내가 박수온이라는 걸 들킬 위기는 넘겼다.
‘그래도 목소리를 들으면 알 텐데…….’
아주 잠깐 지호에게만 내 정체를 밝힐까도 생각해봤지만, 금세 마음을 접었다.
지호라면 비밀을 지켜줄 거야.
문제는 너무 정직한 나머지 거짓말이 티가 난다는 거지.
눈치 빠른 사람이 지호를 추궁한다면 들통이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원한다면 음성변조 부적을 사용해주겠다”고 합니다.]
웬일로 운수가 먼저 날 돕고 나서는 거지?
평소대로라면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면서 팝콘을 가져와서 관람했을 텐데.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아직 정체 모를 어둠이 던전 안에 머물고 있다”며 “그것이 바라는 상황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을 것”이라며 눈살을 찌푸립니다.]
‘온천 마스터키를 잠근 걸 보면 그 존재는 이미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이런 상황을 만든 걸 보면 내가 온천 사장인 게 외부로 알려지길 바란다는 거야? 그래서 본인이 얻는 게 뭔데?’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건 알 수 없지만, 정확히 반대로 움직여줄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그건 또 왜?’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단호하게 “내 계약자가 남에게 휘둘리는 건 보기 싫다”고 답합니다.]
내 계약자는 나만 괴롭힐 수 있어, 뭐 이런 건가?
어느 쪽이든 운수가 정체를 숨기는 데에 힘을 보태준다니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음성변조 부적’을 사용합니다.]
운수의 부적이 물감이 번지듯 나타나 내 이마에 붙었다.
스킬도 주인을 닮는 건지 묘하게 인기척이 없고 신비로웠다.
[‘음성변조 부적’의 효과로 음성이 변조됩니다.]
‘그런데 부적이 이마에 붙어 있으면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강시도 아니고.’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부적에 본인 외에는 볼 수 없는 주문을 걸어뒀으니 안심하라”라고 합니다.]
설렁설렁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은근히 철두철미하다니까.
적으로 만나지 않은 게 행운인 성좌였다.
안도한 나는 지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내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자,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진짜 뉴스에 나오는 음성변조잖아!’
당장 뉴스에 모자이크 처리된 채로 출현해도 이상할 게 없는 목소리였다.
‘운수, 이 자식아! 얼굴이랑 목소리가 전혀 매치가 안 되잖아!’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자신은 말 그대로 음성변조를 해줬을 뿐”이라며 떳떳하다고) 말합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헬륨 가스를 주지, 뭐하러 어렵게 부적을 써?’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부적을 쓰는 게 더 쉽다”고 말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그대로 뉴스에 나가도 정체 들킬 일은 없을 듯”이라며 배를 잡고 웃습니다.]
‘……둘 다 성좌인 것에 감사해라.’
나는 둘을 향해 바드득 이를 갈았다.
“크게 다친 곳이 없으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착한 지호는 내 목소리에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친절하게 웃어줄 뿐이었다.
내가 박시우는 말아먹었어도 동생 하나는 정말 잘 키웠다니까.
개념 있고 바르게 잘 자라준 동생을 흐뭇하게 바라보자 지호가 방금 전과 다르게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헌터는 맞으신 거죠……?”
“네?”
“발그레 바나나 개당 가격이 꽤 나가니까 괜히 욕심부리시는 분들이 많아요.”
개당 가격이 꽤 나간다니, 그래서 발그레 바나나 인기가 많았나 보네.
나도 넉넉하게 모아서 우유 만들다 남으면 팔아봐?
“그러다가 사망 사고가 빈번하게 나는 지역이거든요. 여기.”
발그레 바나나에 잠시 혼이 빠져 있던 나는 이어진 지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헌터들이 빈번하게 사고가 나는 곳이라고? 여기 헌터들 잘 안 온다며?’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S급이 드물게 지나다니는 곳이라고 분명히 말했다”고 항의합니다.]
‘그랬……었나?’
그래서 지호가 내가 바나나에 둘러싸인 걸 보고 급하게 달려온 거구나.
더더욱 아침에 오길 잘했다, 나. 하마터면 다른 헌터들 앞에까지 사우나 가운을 입고 나타날 뻔했잖아.
그래도 꽤 괜찮은 핑곗거리가 생겼다.
대충 바나나를 구하고 있었다고 둘러대면 되겠어.
“그래서 바나나 상인이신 줄 알았는데 옷차림이…….”
말끝을 흐리며 지호가 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렇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난 지금 사우나 가운 차림이었다.
누가 목숨 걸고 A급 던전에 들어오면서 이런 걸 입냐고?
딱 한 사람.
사우나 가운이 SS급이라는 걸 알고 있는 나뿐이지.
“그러고 보니까 은발에 사파이어색 눈동자라는 건…….”
온천 사장 팬클럽에 가입한 온천 회원답게 지호도 나를 보며 온천 사장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내가 온천 운영을 손에서 놓지 않는 이상, 계속 재료를 구할 일이 많아질 텐데.
어쨌든 현재 나는 E급 헌터. 각인 없이 던전에 들어올 수는 없다.
그 말은 즉, 던전에 나올 때마다 이 착장일 거란 뜻이다.
지금 사진으로 공개된 건 뒷모습뿐이니까 가능하면 온천 사장의 모습도, 내 본모습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없을까?
이 의심스러운 차림새를 변명할 만한 그럴듯한 이유가.
“혹시 온천 사…….”
때마침 지호가 운을 떼려 한 그 순간.
“맞아요!”
“네……?”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확신에 차서 답하는 내게 지호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나는 그를 향해 확신에 찬 얼굴로 답했다.
“맞는 것 같다고요. 온천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