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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41화 (41/190)
  • 41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계약 파기 조건이 뭔데?’

    영계가 대답을 회피하는 걸 보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그런 건 원래 계약하기 전에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안 그래도 제일 불편한 인물이 불편한 이야기를 할 때 나타날 게 뭐람.

    ‘계약인 줄 알았으면 그랬겠지. 난 잠든 직후라 꿈인 줄 알았다고! 그것도 복권 당첨되는 꿈!’

    난 온 힘을 다해 나의 억울함을 설파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죽을 때까지 복권에 당첨될 운은 없으니 헛된 희망은 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운수의 시스템창은 내가 오랫동안 키워온 일확천금의 꿈을 순식간에 깨부쉈다.

    ‘네가 뭔데 내가 일주일 동안 소중하게 키워온 희망을 짓밟아?’

    일주일에 한 번씩 또또 복권을 사면서 이번에야말로 일등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척박한 삶을 성좌가 이해할 리 없었다.

    ‘그래서 계약 파기 조건이 뭔데?’

    [성좌 ‘저승의 염라’가 무미건조한 얼굴로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난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어째서 그런 참혹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거지?

    무정하다고 느끼면서도 염라가 말했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수긍이 갔다.

    저승은 죽은 영혼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염라에게는 죽음이 익숙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

    문제는 내게 죽음은 염라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당장 삶이 끝날 수도 있는 중대 사안이라는 것이었다.

    계약을 파기하면 죽는다고 했지?

    이제야 영계가 왜 눈치를 보며 달아났는지 이해가 갔다.

    이게 말로만 듣던 사기 계약인가?

    성좌들은 원래 미친X들이었으니까 그렇다 쳐도 영계만은 믿었는데.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솜털 같은 영계의 귀여움에 눈이 멀어서 함정에 빠지는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이 백숙으로 만들어서 잡아먹어버리는 건데…….’

    나는 영계가 보라는 듯이 살벌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가이드 ‘영계’가 살기를 느끼고 이불 속을 파고들어 몸을 숨깁니다.]

    [가이드 ‘영계’가 숨은 이불이 작은 몸과 함께 바들바들 떨립니다.]

    무서워하는 것도 귀여울 건 뭐람?

    뭐,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 이제 와서 후회한다 한들 소용없다.

    계약을 무르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으니까.

    성좌들이 복작거리는 이 분위기도 생각했던 것처럼 나쁘지 않기도 하고…….

    계약하지 않았다면 난 아직도 쓸쓸한 집에서 혼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겠지.

    몇 번 밥을 같이 먹었다고 정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이래서 한솥밥 먹는 정이 무섭다고 하는 건가?

    학창 시절 때도 이런저런 이유로 주목받은 탓에 내게는 그렇다 할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성좌들의 존재는 내게 더 특별하고 애틋했다.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가 생긴 것 같달까?

    요리 퀘스트만 아니면 온천 사장이라는 직업도 나름대로 괜찮고 말이야.

    더불어 성좌들의 힘을 빌려서 알아보고 싶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이고, 지금은 정체를 들키지 않고 빨리 발그레 바나나를 하나라도 더 모아서 온천으로 돌아가는 게 먼저였다.

    이렇게 한 마리씩 잡아서는 해가 지는 건 물론이요, 동이 트는 것까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딘 사냥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드는 것과 동시에 내 안에서 빨리빨리 민족의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몬스터가 바나나를 내어놓기도 전에 답답함에 내 속이 먼저 터져버리고 말 거야.

    휴먼, 더 빠르게 바나나를 모을 수 있는 길을 찾아내라.

    두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댄 채로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던 나는 일단 부채로 볼 빨간 바나나를 각자 한 대씩 쳤다.

    몬스터들이 수풀에 숨어 있는 데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바람에 찾는 것만으로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양의 땀방울이 뺨을 타고 턱으로 흘려 내려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돌아가면 당장 찬물로 샤워부터 할 거야.

    푹푹 찌는 열대기후의 던전에서 사냥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진득하게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을 훔쳐냈다.

    한 대씩 얻어맞은 바나나들이 내 뒤를 부지런히 따라오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짧은 다리로는 나를 따라잡기 어려워 보였다.

    장담한다. 다시는 내 인생에 직접 재료를 구해서 바나나 우유를 만드는 일은 없을 거야.

    속으로 쉬지 않고 참을 인을 새긴 끝에 무사히 볼 빨간 바나나들이 한곳에 와글와글 모여들었다.

    [볼 빨간 바나나의 몸통 박치기로 체력이 1 감소합니다. 체력 (44/45)]

    [볼 빨간 바나나의 몸통 박치기로 체력이 1 감소합니다. 체력 (43/45)]

    엄밀히 말해 E급 헌터라 A급 몬스터에 맞으면 타격이 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S급 사우나 가운 덕분인지 체력이 1밖에 달지 않았다.

    맘 같아서는 일찍이 벗어 던지고 싶었는데, 더워도 참기를 잘했어.

    던전의 열기 때문에 5분마다 5씩 깎이긴 하지만 가운이 10초마다 100씩 회복해주니까 무리하지만 않으면 죽을 일은 없었다.

    생사가 걸린 문제 앞에서는 수학과 담을 쌓은 내 머리도 재빨리 돌아갔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냥의 순간이 다가왔다.

    한 번에 여러 마리를 상대하면 내 공격력도 분산될 테니까 발그레 바나나를 조각낼 위험은 덜하겠지.

    최대한 살살해보자.

    바나나는 눈대중으로 봐도 스무 마리는 넘게 모인 것 같았다.

    슬슬 부채를 써볼까?

    내게 몸통 박치기를 날리려는 저 볼 빨간 바나나 부대를 향해 잔잔한 바람 스킬을 날리기 위해 부채를 펼쳐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거기 계신 분 설마……!”

    던전 속 어딘가에서 내가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소리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날 보며 놀라는 남자의 얼굴이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버렸다.

    지호가 왜 여기 있어?

    예상하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얼을 빼놓고 있던 나는 이내 손에 들린 부채부터 몸 뒤로 감췄다.

    부채는 내 뜻을 알아차린 것처럼 곧바로 사라졌다.

    탑이나 던전을 다닐 때는 매번 현정우의 포털을 타고 움직이길래 A급 던전에서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일단 튀고 보자!

    “시X.”

    무슨 일이 있어도 지호가 이런 식으로 내 정체를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난 은밀하고 재빠르게 암호를 속삭였다.

    [‘온천 마스터키(EX)’의 암호와 일치합니다.]

    [!!작동 오류!! ???가 ‘온천 마스터키(EX)’에 스킬 ‘락(Lock)’을 사용합니다.]

    [히든 필드 ‘온천(EX)’으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온천 마스터키가 먹통이 됐어.’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그럴 리가 없다며 눈썹을 일그러트립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온천 마스터키(EX)는 S급 던전까지는 사용이 유효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탑에서 베카를 만났을 때도 먹통이었던 거구나?

    ‘하지만 여기는 A급 던전이잖아? 왜 마스터키가 먹통인 건데?

    마스터키가 ‘락(Lock)’에 걸렸다는 건 또 무슨 소리고?’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던전 안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말합니다.]

    운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새로운 시스템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스킬 ‘락(Lock)’의 효과로 일정 시간 동안 ‘온천 마스터키(EX)’가 잠깁니다. <남은 시간 : 30분 00초>]

    ‘지호를 말하는 거야?’

    내가 아는 그 지호는 스킬을 사용하려면 큐브가 달린 지팡이를 꺼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이곳에 지호 외에 또 다른 누가 있다는 건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박지호에게서 느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속성의 힘이다”라고 말합니다.]

    운수도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그게 누군데?’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알 수 없는 힘이 훼방을 놓아서 상대를 인식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운수도 알아차리기 힘든 상대라는 건가?

    혹시나 해서 주변을 돌아봤지만, 던전 안의 나무들이 숲처럼 우거진 탓에 대충 살펴서는 누가 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사냥하는 걸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야?

    언제부터지?

    내 마스터키는 왜 잠근 건데?

    아니지, 그보다 중요한 건…….

    상대가 EX급 마스터키를 잠글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라는 거잖아?

    랭커인가?

    하지만, 랭킹 1위인 박시우도 S급인데?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너도 실상은 E급 헌터이지 않냐”며 말합니다.]

    ‘그렇지, 그럼 나처럼 성좌의 힘을 빌릴 수 있는 헌터가 또 있다는 걸까?’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성좌가 각인할 확률은 내가 유일하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희박하다”고 말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그만큼 각인은 아주 드문 일이라 보통 사람들은 각인의 존재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 나도 각인에 관한 건 해령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그러면 이 힘을 사용하는 건 대체 누구야?

    “거기 꼼짝 말고 있어요!”

    내 사정을 알 리 없는 지호가 멀찍이서 내게 소리치며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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