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키키키키킥!
지금 바나나가 날 비웃은 건가?
이 세계에 시스템창과 헌터가 나타나면서 많은 학자들이 던전과 각성, 성좌에 대해 연구했다.
하지만 몬스터와 던전브레이크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런 이유로 부모님이 실종되었던 던전이 어떤 경위로 나타나게 된 건지, 다른 던전과 연결되어 있는 건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생겨났다가 소멸해버린 건지조차 알지 못하고 어영부영 수색이 끝나버렸다.
던전에서 출몰하는 몬스터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사람처럼 다층적인 감정을 가진 몬스터가 있다는 건 증명된 바 있지만 그건 오직 지능이 높은 몬스터에 한해서라고 했다.
던전 브레이크 때 만난 오리들은 지능이 높아서 교감이 가능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 정도 수준의 지능 체계를 가진 개체는 드물다고 했다.
보통 A급 몬스터는 날 비웃을 정도로 지능이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말이야.
“킥!”
저 웃음, 묘하게 기분 나빠!
내가 노골적으로 기분이 나쁘다는 티를 내자 바나나가 볼을 한층 더 붉히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단지 시스템 설정대로 웃은 건데 내가 멋대로 오해를 한 걸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바나나가 날 비웃는 것 같다고 느끼는 건 단순히 나만의 착각일지ㄷ…….
“킥킥킥킥킥킥!”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나의 노력은 얼굴에 대고 노골적으로 웃기 시작한 바나나의 연쇄 도발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더는 못 참아!
시스템 설정이든 아니든 열 받는 건 그냥 열 받는 거라고!
이 발칙한 바나나 같으니라고.
당장 발그레 바나나로 만들어서 갈아 먹어주겠어!
몇 번 각인을 사용해봤다고 그새 몸에 익은 건지 성좌의 부채가 내 것처럼 손에 착 감겼다.
은발로 물든 머리카락이나 치렁거리는 귀걸이는 아직 낯선 감이 있긴 하지만…….
뭐, 차차 익숙해지겠지.
아니, 지금 이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난 볼이 빨갛고 비열한 저 바나나를 향해 부채를 펼쳐 들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 타이밍에 정말로 성좌의 부채를 사용할 거냐”고 묻습니다.]
운수의 말에 나는 부채를 휘두르려던 손을 멈췄다.
맞아.
바나나가 너무 열 받게 웃어서 잠시 잊고 있었어.
저번에 가볍게 부채 한 번 휘둘렀다가 베란다가 박살 났었지?
내진까지 고려해 고급 자재만 갖다 쓴 신축 베란다를 일순간에 가루로 만들어버린 바로 그 스킬이다.
하물며 A급 몬스터 한 마리에 이 힘을 쏟아부었다가는 바나나가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릴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성좌의 부채가 아니면 무슨 수로 바나나를 잡지?’
내게 제대로 된 무기라고는 부채가 전부였다.
맨손으로 바나나를 때려잡을 수도 없고.
겉보기에는 하찮고 비열하게 생긴 바나나일 뿐이지만, 엄연히 A급 몬스터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샤레니안한테 불사검을 빌리기엔 그걸 들 힘이 없는데.’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부채로 후려치면 되지 않냐”고 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EX급 부채라 굳이 스킬을 쓰지 않아도 A급 몬스터한테 웬만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다”라고 말합니다.]
오호라, 그런 방법이…….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신성한 성좌의 부채를 함부로 다루지 말라”며 항의합니다.]
‘샤레니안, 머리를 쓰는 데는 재주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제법인데?’
격하게 항의하는 해령을 외면한 채, 난 샤레니안을 향해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실현 가능성이 있는 해결책이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한껏 추켜세운 내 엄지를 보며 쑥스러워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저건 칭찬이 아니라 욕인데 그래도 좋냐”며 한심해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저게 왜 욕이냐”며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넌 그냥 영원히 모르는 게 낫겠다”며 대화하기를 포기합니다.]
역시 샤레니안은 단순해서 편하다니까.
능글맞은 운수가 대화를 포기할 정도면 샤레니안은 다른 의미로 대단했다.
모든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다니.
하물며 욕까지.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화병 날 일은 없어서 좋겠어!
둘과의 대화를 뒤로하고 난 힘차게 옷소매를 걷어붙였다.
어디 한 번, 샤레니안이 말한 방법이 통하는지 시험해볼까?
탁!
나는 바나나를 향해 부채를 세차게 내리쳤다.
“키킥!”
아무런 스킬도 사용하지 않고 그냥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바나나 피통의 1/4로 줄었다.
문득 X플릭스에서 우연히 본 헌터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전투형 A급 헌터들은 같은 등급의 몬스터를 평균 3~4번 때리면서 사냥한다던.
그 말은 즉슨, 성좌의 부채는 스킬을 쓰지 않아도 웬만한 A급 헌터들이 스킬을 써서 사냥하는 수준의 타격을 입힌다는 말이었다.
‘이게 EX급 부채의 위엄이라는 말인가?’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신선한 성좌의 부채를 몽둥이처럼 다루는 건 세상에 너 하나뿐일 것”이라 한탄하며 긴 한숨을 내쉽니다.]
날 뜯어말리던 해령도 끝내 설득하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박시우도 나랑 살면서 저렇게 한탄하던 때가 있었지.
‘해령, 박시우가 23년 동안 나랑 살면서 깨달은 게 있대.’
난 해령에게 그 길을 먼저 걸어간 박시우가 깨달은 바를 알려주기로 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무심한 얼굴로 “그게 뭐냐”고 묻습니다.]
‘난 일찍 포기할수록 편하다는 거.’
말이 끝나자마자 난 부채로 볼 빨간 바나나를 다시 한 번 후려쳤다.
탁!
‘말했잖아. 내가 한 번 마음먹으면 아무도 날 못 말린다고.’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박시우의 깨달음에 깊은 공감을 표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그럼에도 동생을 포기하지 않은 박시우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
‘포기라니 말이 심하네? 내가 배추도 아니고.’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내 아재개그에 정색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러게 왜 섣불리 각인을 새겼냐”며 해령에게 측은한 눈길을 보냅니다.]
후회해도 늦었다고. 해령!
이미 엎질러진 물.
나는 각인을 무를 생각이 전혀 없거든!
“키키킥!”
난 연이어 바나나를 때렸다.
“키키키킥!”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이 바나나 때리면 때릴수록 더 크게 웃었다.
맞는 걸 즐기는 것 같아서 뭔가 기분 나빠…….
꺼림칙한 표정을 짓던 난 재빨리 부채로 바나나를 쳤다.
“키익…….”
볼 빨간 바나나의 피통이 완전히 비워졌다.
바나나는 마지막까지 웃음을 남기며 서서히 사라졌다.
그 빈자리에는 말 그대로 발그레한 바나나가 나타났다.
‘진짜 볼이 빨간 바나나잖아. 이거 사람이 먹어도 되는 거 맞아?’
[가이드 ‘영계’가 “먹어도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생긴 건 그래도 맛은 보통 바나나보다 훨씬 달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야 먹어도 문제가 없는 거겠지.
그런데…….
‘샤레니안, 넌 성좌면서 어떻게 보통 바나나 맛을 알아? 성좌는 안 먹고도 산다며.’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친다”고 경고합니다.]
샤레니안이 선을 긋는 건 처음이었다.
친근하게 지내다가도 자신의 개인사에 대해선 칼같이 벽을 치는 걸 보니 그도 성좌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쳇, 나도 딱히 더 알고 싶지는 않다, 뭐?
괜히 섭섭해지는 마음을 뒤로한 난 볼 빨간 바나나가 떨군 바나나를 주워 들었다.
[발그레 바나나를 획득합니다.]
직접 몬스터를 사냥해 재료를 구한 건 처음이라 신기했다.
은근히 성취감도 드는 게 좋긴 했지만, 이제 한 마리를 잡았을 뿐인데 벌써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는 푹푹 찌는 던전의 열기가 거하게 한몫했다.
가만히 있어도 체력이 떨어질 정도의 온도니까.
레시피에는 한 잔 기준으로 바나나 한 개가 필요하다고 되어 있지만, 내 똥손을 생각하면 열 개라도 부족할 게 불 보듯 뻔했다.
열 개를 구한다고 해도 그 안에 특제 바나나 우유를 만드는 데 성공할 것인지 것인지는 미지수였기 때문에.
퀘스트를 못 깨면 근무 태만에 걸릴 테고, 그러면 온천 이용권을 전액 환불해줘야 할 텐데…….
그러면 앞으로 돈을 벌기도 어려워진다.
산 넘어 산이로구만.
어쩌면 바나나 우유를 만드는 것보다 온천을 때려치우고 새로운 직업을 찾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는데?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온천을 접을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일찍이 접는 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합니다.]
저 자식은 점만 보는 게 아니라 독심술도 할 줄 아는 게 분명해.
그게 아니면 나 혼자서 하는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런데 계약 파기 조건을 들으면 그 생각이 달아날 것”이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습니다.]
계약 파기 조건?
영계한테서 계약 파기 조건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영계야, 계약 파기 조건이 뭔데?’
[가이드 ‘영계’가 못 들은 척 달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