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고백했다가
1초 만에 차인 썰 푼다
“웬일로 먹을 걸 보고만 있지?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건가?”
심각한 얼굴로 하고 싶은 말이 고작 그거였냐?
해령에게 위로받는 건 기대도 안 했지만, 왠지 열 받았다.
난 도대체 이 녀석한테 어떤 이미지인 거야?
어쩐지 박시우가 나를 바라볼 때와 비슷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인가?
이러면 나야말로 간식을 기다리는 애완동물이 된 것 같잖아.
“네가 음식을 주면 난 무조건 덥석덥석 받아먹어야 해?”
분한 기분이 들자 나는 고소한 향으로 나를 유혹하는 돈가스를 애써 외면했다.
차마 돈가스에서 눈길을 거두진 못했다.
“그래서 이건 먹지 않을 생각인 건가?”
단호하게 묻는 해령은 내게 두 번은 권유하지 않을 듯 보였다.
이따가 도시락 가져가서 먹을 거긴 하지만, 지금도 먹고 싶어!
사실 방금 전까지는 배고프다는 생각이 그다지 없었는데 잘 익은 돈가스를 보니 식욕이 샘솟았다.
혹시나 해령이 돈가스를 도로 가져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해하고 있는 그때,
“그렇다면 샤레니안이나 영계에게 줘도 상관없…….”
“누가 안 먹는댔어? 준비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해?”
젓가락을 든 해령의 손목을 낚아챈 나는 미끼를 무는 물고기처럼 급하게 돈가스를 입안으로 넣었다.
“앗, 뜨거워!”
욕심이 과했던 걸까?
갓 튀겨져 나온 돈가스의 뜨거움을 맛본 나는 입을 감싸며 후퇴했다.
“내 혀!”
울상을 지으며 얼얼한 혀를 내밀어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돈가스가 그렇게 뜨거웠나? 그러게 조심하지 않고? 갑자기 굶주린 햄스터마냥 달려드니 그렇지.”
햄스터?
“지금 날 햄스터 취급한 거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게 그 뜻인가?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한들 기분 나빠할 건 아니지. 햄스터가 얼마나 작고 귀여운데. 양심을 챙기도록 해라.”
벌겋게 익은 내 혀를 안쓰럽게 바라볼 때는 언제고, 해령은 내 양심에 팩트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매정한 놈.
분하다! 근데 맞는 말이라서 뭐라고 말도 못하겠어!
“뜨거우면 뜨겁다고 말 좀 해주지! 내 혀 어쩔 거야? 흐 뜨거…….”
나는 괜히 해령을 향해 틱틱거렸다.
“갓 튀긴 거니 뜨거울 수밖에. 당연한 것까지 알려줘야 하다니…….”
군소리를 하면서도 해령은 입으로 후후 불어 식힌 돈가스를 물과 함께 가져왔다.
“이제 괜찮을 거다.”
햄스터 이야기에 정색했던 것처럼 그것도 제대로 못 먹느냐면서 타박할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손수 돈가스를 식혀 주는 해령의 마음은 알기 어려웠다.
까칠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꽤 다정한 구석도 있네.
“소스도 찍어줘.”
이왕 양심 없는 사람이 된 김에 더 격렬하게 양심이 없기로 했다.
나는 해령에게 소스까지 찍어달라고 당당하게 주문했다.
“요구 사항이 많군.”
아무리 급해도 할 건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신조였기 때문에, 기왕 먹기로 한 거 더 맛있게 먹을 생각이었다.
해령의 손을 거친 소스는 시중에서는 맛볼 수 없는 특별한 맛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돈가스의 풍미를 더 돋궈준달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해령의 손맛은 타고난 게 분명했다.
오죽 맛있었으면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네.
늘 그렇듯 해령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도 자신이 직접 만든 소스에 돈가스를 찍어 내게 건넸다.
난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돈가스를 받아먹었다.
그래! 이 맛이야!
바삭한 튀김 가루의 식감이 느껴지고 입안에서 잘 다져진 고기가 사르르 녹았다.
소스까지 맛을 더하니까 완벽! 그 자체랄까?
“해령, 나 더는 못 참겠어.”
돈가스의 맛에 감동한 나는 빈 젓가락을 거둬들이려는 해령의 손목을 다시금 붙들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날 보는 거지?”
진지한 얼굴을 하자 해령이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지만, 난 굴하지 않고 지금의 황홀한 기분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너, 나한테 장가올래?”
* * *
난 돈가스가 든 도시락을 가방에 챙겨 넣으며 부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뭐?”
내 고백을 들은 해령은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튀김기 열기 때문인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인 걸지도 몰랐다.
“만약 네가 나한테 장가를 온다면 부엌에 가둬놓고 내내 돈가스만 만들게 하고 싶을 만큼 황홀한 맛이야. 군만두도 제때 넣어줄게. 어때?”
“절대 싫어.”
나의 결혼 계획을 듣자 해령은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단칼에 거절했다.
그만큼 돈가스가 맛있었다고 조금 과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이렇게 단박에 거절당하니 뒷맛이 씁쓸했다.
얄짤 없이 차이긴 했지만, 슬프지 않았다.
나에게는 온천표 수제 돈가스가 있다 이 말이야!
실연의 아픔보다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수제 돈가스가 있다는 기쁨이 더 컸다.
함께 내준 된장국도 입에 딱 맞아서 그 자리에서 돈가스 한 개와 된장국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나온 뒤였지만, 도시락을 생각하니 어김없이 군침이 돌았다.
나, 이미 해령이 만드는 돈가스의 매력에 갇혀버린 걸지도……?
어쨌든 손이 빠른 해령 덕분에 여유롭게 아침도 먹고, 헌터들을 피하기 좋은 시간대에 나올 수 있었다.
덕분에 체력도 Max로 충전됐고!
돈가스뿐만 아니라 된장국도 체력을 Max로 회복시켜주기 때문에 던전에서 포션 대신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았다.
배가 부르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1층으로 내려온 난 어느새 온천의 문 앞에 도착했다.
문을 통해 던전에 들어가려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잠깐, 이 문은 머릿속 장소로만 이동시켜주니까 가본 적 없는 곳에는 갈 수가 없잖아.
난감하네. 어르신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나?
하지만 어르신이 던전으로 가는 표를 가지고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방법이 없다면 직접 A급 던전까지 가는 수밖에는 없는데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헌터들이 활동하지 않는 아침 시간에 발그레 바나나를 구해오겠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뜻밖의 난관에 놓인 내 앞으로 환한 빛이 일며 황금색 결정이 나타났다.
나는 얼떨결에 그걸 손에 쥐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볼 빨간 바나나가 출몰하는 던전의 위치를 담은 마법석이라며 “그걸 쥐고 문을 열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나 시스템창에 말한 거 아닌데? 혼자 생각한 건데?
운수는 어떻게 내가 던전에 가는 것으로 곤란해한다는 걸 알았지?
가끔 보면 정말 용하다니까.
물론 성좌는 언제 어디서든지 계약자를 지켜볼 수 있다지만, 이번에는 꼭 진짜 옆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휙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찰나였지만 황금빛 옷자락이 복도 사이로 재빨리 사라지는 것이 얼핏 보인 것 같았다.
“운수, 너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기습적으로 몸을 던져 복도를 들여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잘못 봤나?
정말로 기분 탓이었을지도.
난 손에 쥔 마법석으로 눈길을 돌렸다.
가만 보면 운수는 평소에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굴다가도 정작 난처한 일이 생기면 빠지지 않고 나타나서 힌트를 주곤 했다.
그간의 행실을 돌아보니 운수는 의외로 섬세하고 정 많은 성격일지도 모른다.
혹시 누가 볼지도 모르니까 미리 각인을 발현하고 가는 편이 좋겠다.
“부채!”
내 부름에 성좌의 부채가 나타났다.
눈앞으로 긴 은발이 살랑였다.
‘다녀올게.’
운수에게 짤막한 인사로 고맙다는 말을 대신한 난 온천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밖에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바나나 나무가 가득한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따가운 햇빛이 살갗을 찔렀고,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지금 바깥은 겨울인데 이곳은 한여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바나나는 열대 과일이었지?
그래서 열대기후라고 적혀 있던 건가?
던전의 설정이 쓸데없이 디테일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면 잠옷에 사우나 가운까지 입는 바람에 수도꼭지를 연 것처럼 땀이 줄줄 흘러나왔다.
[던전의 열기에 5분마다 체력이 5씩 감소합니다. 체력 (40/45)]
5분마다 체력이 5씩이나 감소한다고?
사우나 가운이라도 없었다면 몬스터를 사냥하기도 전에 열사병으로 먼저 쓰러졌겠어.
가운이 체력을 회복해주고 있으니 어떻게 버티고 있긴 했지만, 체감되는 열기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찜통에 든 찐만두가 된 기분이야.
그냥 돌아갈까?
진지하게 갈등하는 내 앞으로 바나나 하나가 통통 튀며 다가왔다.
반쯤 껍질이 까진 채 짤막하고 통통한 몸통을 가진 샛노란 바나나는 동그랗고 빛나는 검은 눈과 앙다문 입술을 하고 있었다.
바나나한테 눈, 코, 입이 있다는 게 어색했지만 발갛게 물든 볼과 반짝이는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진짜 볼이 빨갛네.
보다 보니까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이름값에 충실한 비주얼을 감상하고 있던 중 별안간 날 보던 바나나가 한쪽 입꼬리를 비열하게 끌어 올리며 웃었다.
“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