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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38화 (38/190)

38화

요리하는 온천의 남자

역시 문제는 내 똥손인가?

그런데 바나나면 바나나지, 발그레 바나나는 또 뭐야?

빙X레 바나나 우유면 몰라도 발그레 바나나는 처음 듣는 단어였다.

‘영계야, 온천에 발그레 바나나라는 게 있어?’

[가이드 ‘영계’가 “발그레 바나나는 온천에 없고 A급 던전에 출몰하는 볼 빨간 바나나를 잡아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번엔 던전에 가서 직접 사냥을 하라는 거야?

아주 골고루 하네.

바나나 우유는 그냥 바나나로 만들어도 충분하잖아?

꼭 발그레 바나나여야만 속이 후련했냐?

이건 시스템창의 보복이 분명했다.

쑥 라테 때만 해도 재료가 일반 쑥이었는데, ‘강압적 쑥 라테 퀘스트 완료 사건’ 이후로 갑자기 A급 몬스터를 잡아야만 나오는 재료로 바뀌는 게 말이 돼?

이 정도면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흥, 분해도 어쩔 수 없지.

내 멋대로 레시피를 바꿀 수도 없는 일이고.

시스템이 세계를 지배하는 지금 시스템은 갑, 난 엄연한 을일 뿐이었다.

근무 태만으로 경고를 받기 전에 퀘스트를 깨려면 발그레 바나나를 구해오는 수밖에 없었다.

경고를 받아서 일이 커지면 나만 피곤해지니까.

‘사우나 가운 입고 각인 발현하면 A급 몬스터 정도는 잡을 수 있겠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성좌의 부채만 있다면 A급 몬스터는 문제없지만, 몬스터가 출몰하는 던전이 탑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드물게 S급 헌터들이 지나다닌다”며 정보를 흘립니다.]

각인을 발현했다가 다른 헌터를 만날 수도 있다는 건가?

고민하던 난 문득 시스템창 귀퉁이에 떠 있는 시계를 들여다봤다.

오전 7시 30분.

어제 기절하듯이 잠들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이 떠졌다.

지금이라면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없을 거야.

헌터들은 직장인처럼 출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보통 늦은 오후부터 활동했다.

박시우랑 지호만 봐도 아침 시간에는 방에서 쥐 죽은 듯이 늘어져 자다가 어둑해질 시간쯤에나 슬슬 일어나서 집을 나서곤 했다.

한마디로 이 시간에 후딱 다녀오면 다른 헌터와 마주칠 일 같은 건 없을 거라는 말이지.

[체력 (45/45)]

푹 쉬고 일어나서인지 작고 소중한 체력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난 일어나서 가방에 넣어두었던 사우나 가운을 주섬주섬 꺼내 입었다.

“지금 바로 던전에 갈 생각인가? 아무리 약 할아범이 응급처치 했다고 해도 조금 더 쉬는 게 좋을 텐데.”

해령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나를 만류했다.

하지만 한번 발동이 걸린 나를 멈출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대신 던전에 가기 전에 해령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밥은 챙겨야지!”

“넌 항상 이야기가 먹는 것으로 흘러가는군.”

해령이 이제는 놀라울 일도 아니라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해령, 넌 성좌라서 밥을 굶어도 괜찮은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단다.”

물론 내가 그 한국인 중에서도 쬐끔 더 잘 먹는 편에 속하지만.

그건 비밀로 하자.

“어제는 쓰러지기까지 한 내가 밥까지 굶는다고 생각해봐. 인간의 몸으로는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그렇군.”

성좌와 사람의 기준은 다르다고 말하자 해령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좋아. 거의 넘어왔어!

“그런 의미에서 해령이 도시락을 만들어줬으면 하는데. 이왕이면 먹는 김에 체력이 회복되는 것으로!”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아주 당당하게 부려먹을 생각을 하는군. 각인했어도 난 엄연히 성좌다. 네 생각처럼 쉽게 움직이지 않아. 필요하면 직접 부엌에서 만들도록 해.”

“나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이걸 봐.”

난 조용히 해령의 앞에 눈앞에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해령은 세계의 멸망을 막아낼 사명을 가진 용사처럼 비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분명히 내 계획은 성공했는데…….

기분이 나쁜 건 왜지?

찝찝한 표정으로 부엌으로 걸어가던 해령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찰나, 해령이 나를 향해 돌아봤다.

“돈가스에 된장국.”

“응?”

“도시락 싸달라며?”

“돈가스 도시락도 가능해?”

“여기 온천 음식은 시간이 지나도 맛이나 식감이 변하지 않으니까.”

“대박! 무조건 해줘! 돈가스!”

도시락 메뉴가 돈가스라는 말에 난 찝찝함 따윈 잊고 놀이공원에 놀러 온 아이처럼 금세 기분이 들떴다.

“못 말릴 돈가스 사랑이군.”

나지막이 혼잣말을 속삭인 해령이 시계를 확인하고는 얼른 도시락을 만들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신이 나서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그 뒤를 졸래졸래 따랐다.

* * *

부엌으로 들어온 해령은 능숙하게 손질한 돈가스를 튀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된장국을 끓였다.

식탁에 앉아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그의 널찍한 어깨와 힘줄이 선 팔뚝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요리하는 남자가 매력적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우리 집 남자들에게 요리라고는 라면이 전부라 좀처럼 공감이 가지 않았는데.

요리에 능수능란한 해령을 보니까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정확히는 돈가스 먹을 생각에 설렜던 거지만.

요알못인 내가 봐도 해령의 솜씨면 요리왕 미스터 백 선생님과 견줄 수 있을 만한 수준급으로 보였다.

성좌의 부채와 귀걸이에 따로 요리 스킬이 없는 걸로 봐선 순수하게 해령의 능력인 것 같은데.

“요리는 태어날 때부터 잘했어?”

“배웠다.”

“누구한테?”

내 물음에 돈가스를 건져내던 해령의 손이 일순간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온천 할아범.”

온천 할아범이라면 나 바로 전의 온천 사장을 말하는 건가?

드물게 낮게 가라앉은 해령의 목소리에서 짙은 그리움이 느껴졌다.

다른 성좌들이 온천 할아범을 이야기할 때와는 사뭇 다른 무게감이.

잘은 몰라도 해령에게 온천 할아범은 다른 성좌들보다 특별한 존재인 것 같았다.

“요리는 왜 배우게 된 건데?”

궁금해서 질문을 던진 건 아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이 분위기를 깨보려던 것이었는데, 내 질문에 묵묵하게 말을 이어가는 해령의 옆얼굴은 오히려 더 슬픔에 잠긴 듯했다.

“온천 할아범이 이 온천을 운영했을 때, 할아범은 자기가 만든 음식을 손님들이 맛있게 먹는 것만으로 행복하다고 했었다. 처음에 난 그게 잘 이해가 가지 않았어. 요리처럼 손이 많이 가는 일을 해놓고 남이 먹는 걸 보는 것만으로 즐겁다니, 바보 같다고 생각했지.”

온천 할아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우리 엄마도 내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했었는데.

아직 그런 경험이 없는 나는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온천 할아범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엄마와 닮은 부분이 있어서였을까?

나는 어느새 온천 할아범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온천 할아범이 아프기 시작했다. 온천 할아범은 우리와 달리 반은 신의 피가, 반은 인간의 피가 흘렀으니까. 생명이 무한한 우리와는 달랐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서 내 손으로 죽을 끓여 할아범에게 가져다줬었다.”

그때를 회상하는 건지, 해령이 쓰게 웃었다.

“처음 만든 거라 맛도 엉망이었을 텐데, 맛있게 먹으며 웃어주는 할아범을 보니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알게 됐지. 그날부터 요리를 배우게 됐다. 그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아서.”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크게 와닿았다.

해령에게 온천 할아범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온천 할아범은 해령에게 부모님 같은 존재였겠구나.

그러니까 더 가슴 아팠을 거다.

소중한 존재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것이.

나조차도 실종된 부모님을 여태껏 놓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걸.

온천 할아범 이야기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내 앞으로 해령이 천천히 다가왔다.

해령이 손에 쥔 젓가락에는 노릇하게 익은 돈가스 한 조각이 들려 있었다.

“먹어봐. 네가 먹고 갈 것까지 넉넉하게 만들어놨으니까.”

조금 전만 해도 해령의 이야기에 덩달아 침울해져 있던 나는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너 뭘 좀 아는구나?”

명절에도 차려놓은 음식보다 어른들 옆에서 받아먹는 걸 더 좋아했는데.

그게 왜 그렇게 맛있는지.

해령의 이야기 때문이었는지 문득 부모님이 계실 때 가족들이 모두 모여 함께 보낸 명절이 떠올랐다.

엄마는 노릇노릇한 파전을 구워주셨고, 난 옆에 딱 붙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전을 집어 먹었다.

“수온아, 그렇게 먹다가 체해.”

“그래도 엄마가 갓 부쳐준 전이 제일 맛있단 말이야.”

엄마의 걱정 섞인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맛있었다.

“박수온, 오늘 돈돈이 제대로 인증한다?”

“박시우, 넌 동생한테 돈돈이가 뭐냐? 수온이라는 예쁜 이름이 있는데.”

그때는 박시우가 날 돈돈이라고 놀리면 혼내주는 아빠도 있었는데.

부모님이 실종된 이후로는 우리 집에선 명절이라는 게 사라져버렸다.

그래서인지 이런 분위기가 왠지 더 반갑고 괜히 울컥하게 됐다.

옛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느끼는 찰나에,

“박수온, 너…….”

눈을 마주친 해령이 몸을 낮추며 내게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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