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문제는 내 X이었다
오 마이 갓!
염라? 선택지가 네 개나 있는데 왜 하필 염라를 찍은 건데?
제일 피하고 싶은 상황을 샤레니안에게 떠밀려서 직면하게 되자 절로 이가 갈렸다.
그렇다고 선택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웬수!
멘탈이 조각나다 못해 부스러기가 된 나는 두 팔로 내 양옆을 짚고 서 있는 샤레니안의 멱살을 잡아 힘껏 끌어당겼다.
“주인, 내가 아무리 온천의 오랜 단골이라지만 이건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코앞까지 이끌려온 샤레니안이 당황한 듯 살짝 볼을 붉히며 서서히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내가 너 때문에……!”
하지만 이미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 난 그의 멱살을 더욱 단단히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주인, 갑자기 없던 힘이 생긴 것 같은데……. 얼마 전에는 주전자도 제대로 못 들지 않았나?”
분노로 펌프질 된 나의 악력에 놀란 걸까? 샤레니안이 꼼짝없이 내게 붙잡힌 채로 진땀을 흘렸다.
“역시 주인은 인재야! 이 정도 성장력이면 머지않아 불사검도 들 수 있겠는걸?”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해보려는 듯, 샤레니안이 입가를 올려 웃었다.
악의라고는 없어 보이는 그 웃음은 나를 더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안 되겠어.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가!
“나랑 같이 가자.”
난 악령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스산한 기운을 풍기며 나머지 손으로 샤레니안의 단련된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어딜…… 같이 가?”
돌아오는 샤레니안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난 그의 선한 얼굴에다 대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저승으로.”
샤레니안이 날 밀치지만 않았어도 4번 선택지를 고르는 일은 없었다.
같이 벌인 일인데 나 혼자만 책임을 지라는 건 억울했다.
그러니까 절대 혼자는 못 가.
“샤레니안, 우린 죽어도 같이 죽는 거야. 알아들어?”
“지금 나더러 저승엘 같이 가자고……?”
샤레니안의 귓가에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놀란 애완동물처럼 그의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이 보였다.
그때 눈앞으로 또 하나의 창이 떠올랐다.
저질러놓은 일이 있다 보니 벌써부터 마음이 불안해졌다.
퀘스트 이름처럼 당장 저승행 직행열차를 타자는 건 아니겠지?
지금 당장 저승으로 강제 연행을 하겠다던가?
일단 나는 샤레니안을 풀어줬다.
그를 저승으로 가는 길동무 삼는다고 해서 나의 억울함이 온전히 풀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기도 했다.
내 손아귀에서 벗어난 샤레니안은 힘없이 바닥으로 내팽겨쳐졌다.
또다시 내게 붙잡힐까 두려웠던 건지 그는 해령에게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나…… 방금 주인에게서 저승귀 봤다……. 전장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기운이었어. 죽는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나?”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해령에게 엉겨 붙은 샤레니안이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중얼거렸다.
“쯧. 앞뒤도 없이 까불 때부터 사달 날 줄 알았지.”
해령은 샤레니안이 당해도 싸다는 반응이었다만.
난 그들의 대화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는 상관없었다.
몸을 일으켜 앉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창에 떠오른 문장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히든 퀘스트(EX)!! 저승행 직행열차 (1)]
내 눈이 잘못됐나?
난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는 퀘스트의 내용을 다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요단강을 건너자!]
[사망하기 (0/1)]
[보상 : 저승행 직행열차 탑승 티켓]
그러니까 지금 이거 나보고 진짜 죽으라는 거지?
나는 주먹으로 바닥을 쿵 찍었다.
처음부터 죽고 시작하라니, 아무리 EX급 퀘스트라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시스템이라지만, 진짜 사람 목숨이 장난인 줄 아나?
염라만 선택하지 않았어도 저승과 엮일 일은 없었을 텐데.
이건 다…….
스르륵, 자동적으로 내 눈이 샤레니안을 향해 돌아갔다.
그는 해령의 뒤에 숨어 있었지만 샤레니안의 저 커다란 덩치가 다 가려질 리 만무했다.
“샤레니안.”
내 부름에 샤레니안의 등이 움찔거렸다.
“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내가 널 볼 수 없는 건 아니야.”
“주인, 내가 날아가 부딪친 것 때문에 화가 난 건 잘 알겠다.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렇다고 한들 그게 생사까지 논할 일인가?”
“어차피 불사신이라 죽지도 않잖아?”
“주인한테라면 진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단 말이다!”
난 그것 때문에 저승행 직행열차를 타게 생겼거든?
아니, 지금 당장 타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고 싶은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눈에 불을 켜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샤레니안을 노려볼 뿐이었다.
지금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 편이 좋겠지.
일반적으로 성좌들은 계약자의 삶에 간섭하는 걸 즐기지만, 정작 본인들을 파헤치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히든 퀘스트가 자신들과 연관이 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딱 걸렸다며 “수온이 지금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고 말합니다.]
눈치 빠르긴.
아주 잠깐 입이 열리다 만 것을 알아차리다니. 항상 느끼는 거지만 운수는 다른 성좌들보다 관찰력이 뛰어났다.
작은 행동도 놓치지 않는달까?
꼭 속을 꿰뚫고 있다는 기분도 들고 말이야.
‘험한 말을 하려다 말았는데 원한다면 들려줘?’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제발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켜달라고 사정합니다.]
“아니, 이 녀석은 그것들을 제대로 귀에 때려 박아줄 필요가 있다.”
내 눈에 수많은 별을 때려 박아준 전적이 있는 해령이 양쪽 귀를 휴지로 막더니 제 뒤에 숨은 샤레니안의 귀를 손수 열어줬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참 사이좋은 성좌들이야.’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합니다.]
와중에도 운수는 계속해서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예리한 것만큼 끈질기다니까.
[성좌 ‘저승의 염라’가 “일단 오늘 자 망자 명부에는 이름이 없는 걸 보니 살아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몸은 좀 괜찮냐”고 물어옵니다.]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성좌가 나타났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뭔가 낌새를 느끼고 나타난 건 아니겠지?
‘예, 전 멀쩡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습니까?’가 “하루 사이에 왜 말투가 저렇게 정중해졌냐”며 웃습니다.]
진짜 저승의 염라대왕이라고 생각하니까 저절로 존댓말이 나오는 걸 어떡해.
순간 탕에서 쓰러지기 직전의 짧은 기억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까 어제 탕에서 내가 저승초라는 것에 취해서 해롱거릴 때 염라한테 무슨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잠깐이었지만 어린 시절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 오랫동안 묵혀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염라, 혹시 내가 어제 너한테 실수한 게 있을까? 네 면전에다 대고 욕을 했다던가. 그게 아니면 어떤 이야기를 했다던가.’
얼굴을 본 것도 처음이고 그다지 친밀한 사이도 아닌데 탕에 멋대로 들어가 헐벗고 만난 것도 모자라 붙잡고 울기라도 했던 건 아니겠지?
그랬다면 아무리 철면피인 나라도 염라를 아무렇지 않게 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완전 민폐 오브 민폐잖아.
[성좌 ‘저승의 염라’가 “저승초 연기 때문에 바로 쓰러져서 잠든 게 전부”라고 합니다.]
다행히 최악까지는 면한 것 같았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다만 탕에서 2층까지 들고 옮기는 수고를 겪어 피곤하다”고 말합니다.]
내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수고까지?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이 창을 좋아합니다.]
염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령이 그에게 동조했다.
‘응, 안 들려.’
그들을 상대하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고 여긴 나는 되돌아와 창을 샅샅이 살폈다.
다행인 건 시간 제약이 있다거나 강제성이 있는 등 수행 조건이 있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점인데…….
그 말은 내가 죽지 않는 한, 퀘스트가 진행될 일도 완료될 일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 애초에 거절하려고 했던 퀘스트였으니까 못 깬다고 해서 아까울 것도 없지.
지금 서둘러야 하는 건 이게 아니었다.
난 급한 불을 향해 눈을 돌렸다.
[특제 바나나 우유 만들기]
[레시피로 특제 바나나 우유 만들기 (0/1)]
[보상 : 150만 골드]
저걸 빨리 해결해두지 않으면 또 근무 태만에 걸려서 환불 당할 위기에 처할 수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어제 시스템창에 한 짓이 있었기에 보복을 당할 위험이 컸다.
이름도 ‘특제’로 바뀌어 버려서 편법을 쓸 수도 없고 꼼짝없이 특제 바나나 우유를 만들어내야 했다.
난 마지못해 ‘특제 바나나 우유 레시피’를 펼쳤다.
[특제 바나나 우유 레시피]
[마시면 체력이 10 상승하는 특제 바나나 우유 레시피다.]
[재료 : 발그레 바나나 1개, 우유 250mL, 설탕 두 스푼]
[믹서기에 발그레 바나나 1개와 우유 250mL, 설탕 두 스푼을 넣고 돌린다.]
일단 레시피는 저번이랑 비슷해 보이는 데 문제는…….
나는 절망적인 눈으로 내 저주 받은 손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