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요단강 건너갔다가 온 썰 푼다 (1)
‘에이…… 아닐 거야.’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다 보이나 봐.
탕에서 나는 향기에 취했는지 졸린 기분마저 들었다.
게다가 물안개로 사방이 뿌연 데다가 열기로 넘실거리는 바람에 탕 안의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까 들어올 때 보았던 나무 그림자라 생각했던 난 느긋하게 바위에 등을 기댄 채 발가락을 까딱거렸다.
하지만 곧 시야를 가린 하얀 안개 막이 걷히면서 또렷이 드러난 남자의 나체에 점차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나무가 아니라…… 탕에 진짜로 사람이 있었어?
이곳에 나 말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난 다급히 목욕가운을 몸에 걸쳤다.
아니지, 일단 사람은 맞는 거야?
무턱대고 사람이 맞는지부터 의심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온천에 들어올 수 있는 존재는 한정되어 있는데 탕에 들어와 있는 데다 본 적 없는 얼굴까지 하고는…….
안개 속에서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이 세계의 것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고혹적이고 아름다웠다.
너무 신비로워서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밤의 폭포 같은 긴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한 손에는 화려한 금장식이 된 담뱃대를 든 남자.
그의 길고 짙은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강렬한 적안이 내게로 닿았다.
고작 눈을 마주친 것뿐인데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근엄함과 위압감에 압도당해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좋은 쪽으로, 저세상 비주얼인데.
박시우와 지호의 틈에서 부대끼며 자라난 탓에 남자를 돌보기같이 하는 나조차도 현혹되는 수려함에 난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봤다.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생각이지?”
남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며 내게 물어왔다.
매화를 문 것처럼 불그스름한 입술에서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피로한 건지 반쯤 잠겨 거칠어진 남자의 목소리에는 마치 동굴에서 말을 하는 것 같은 울림이 느껴졌다.
남자가 담뱃대를 든 손을 움직이자 성벽 같은 두 어깨에 자리한 근육이 선명하게 부각됐다.
무심결에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갈라진 남자의 복근에 눈길이 가닿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대놓고 본 건 죄송하게 됐습니다.”
남자의 짙은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진 것으로 봐서는 내게 알몸을 보인 것이 무척 불쾌한 듯 보였다.
“일부러 보려고 본 게 아니라…… 보이니까 본 거거든요.”
남자의 겉모습에 혼을 빼놓고 감상했던 것이 내심 양심에 찔렸던 나는 핑계를 덧붙이며 의식적으로 그의 뒤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남자의 옷으로 보이는 검은 도포와 갓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잠깐만, 검은 도포와 갓?
순간적으로 내가 들어온 탕의 이름이 떠올랐다.
이 세계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고혹적인 외모도 그렇고.
눈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검붉은 눈동자도 그렇고.
저승탕이라더니, 저 남자 진짜 저승사자인 거 아니야?
왜, 저승사자가 망자를 수월하게 데려가려고 이상형인 얼굴로 나타난다고 하는 말도 있잖아!
나의 노골적인 시선이 의식되긴 했던 건지 남자가 손을 뻗어 옷을 집어 들더니 검은 도포를 몸에 대충 걸쳤다.
불그스름한 입술이 계속해서 새하얀 연기를 뿜어냈다.
어쩐지 남자가 숨을 뱉어낼수록 숨쉬기가 힘들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날 서둘러 저승에 데려가려고 기를 빨아두는 건 아니겠지?
“당신, 사람은 맞아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 느껴지자 재빨리 탕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당연히 아니다.”
남자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진짜 저승사자?
이어지는 다음 말에 나는 그의 정체를 확신했다.
“가지 않을 생각인가?”
남자가 힘줄이 선 손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내게 갈 길을 재촉했다.
이건 저승사자들의 전매특허 대사잖아!
지금 나더러 가자는 곳이 설마, 저승……?
나 단명할 운명이었어?!
솔직히 성인이 되고 나서는 알바를 전전하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온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딱히 삶에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 인생이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끝난다고 생각하니까 온갖 서러움이 몰려왔다.
나 이제 스물셋이야, 성인이 된 지 3년밖에 안 지났다고.
게다가 며칠 전에 온천 사장으로 각성해서 이제부터 갓생 좀 살아보려는데 이렇게 죽는다니!
이럴 거면 뭐 하러 정체를 숨기고 던전 브레이크까지 들어가서 개고생을 했냐고!
“제가…… 벌써 떠날 때가 된 건가요?”
저승사자가 날 배웅 나왔다는 것이 차마 받아들일 수 없어 남자를 향해 물었다.
“기껏 바쁜 시간을 내서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날 보고 그냥 돌아가라는 건가?”
그렇죠. 저승사자님이 혼자 돌아가시려고 어려운 걸음을 하신 건 아니시겠죠.
“그래도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는 아직…….”
나는 심장을 누르는 압박감에 말을 끝맺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정말 죽을 때가 온 게 맞는 모양이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몸이 왜 이러지?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아.
영혼이라도 빠져나가려는 건가?
“그러면 안 되는데…….”
순간적으로 내가 살아온 스물셋의 짧은 인생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온천을 가득 메운 새하얀 연기 한 줄기가 내 기억을 파고들었다.
박시우와 지호, 내가 같은 유치원을 다닐 무렵의 일이었다.
그때도 유치원 내에 우리 집안에 대한 명성이 자자했던 터라 주변의 시기와 질투가 있었다.
아직 박시우와 지호, 모두 각성하기 전이었는데도 말이다.
한참 어른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워나가는 나이였기에 유난히 흡수가 빨랐던 몇몇 아이들은 내가 돈가스를 좋아한다는 것을 트집 잡아서 ‘돈가스 괴물’이라 놀리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돈가스를 좋아하는 게 부끄럽지 않았던 나는 그 별명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것이 도리어 그들을 자극했던 건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유치원 점심으로 돈가스가 나온 날, 한 아이가 내 식판 위의 돈가스를 가져가더니 유치원 바닥에 던져버렸다. 아껴 먹으려고 가장 마지막까지 남겨놓았던 돈가스였다.
“내 돈가스…….”
나는 충격에 빠졌다. 그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을 먹지 못하게 되어서가 아니었다.
“네가 감히 내 돈가스를 건드려?”
상처 받은 감정이 분노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 내가 그랬다! 어쩔래? 역시 돈가스 괴물…….”
지금 생각하면 그 아이는 내가 아무것도 못하고 엉엉 울기를 기대했던 건지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끝까지 나를 놀려먹으려던 그 녀석을 단단한 머리로 들이박았다.
“우아아앙! 엄마!”
박시우가 인정한 돌머리에 턱주가리를 받힌 아이는 벌게진 턱을 감싼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유치원이 떠나가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소란이 일자 옆 반에서 밥을 먹고 있던 박시우와 지호가 무슨 일인가 싶어 구경 왔다가 내 모습을 보고 황급히 달려왔다.
“뭐야? 박돈돈! 또 누굴 때린 거야?”
“저 자식이 먼저 내 돈가스 바닥에 던졌단 말이야!”
박시우가 바닥에 떨어진 돈가스와 엉엉 우는 아이를 신기한 눈으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얘가 니 돈가스를 던졌다고? 와, 박돈돈 많이 참았네. 내가 그랬으면 머리 박치기에 핵주먹까지 맞았을 텐데.”
“누나, 괜찮아? 어디 다친 거 아니지?”
그 와중에도 지호는 자그마한 손으로 내 손을 꼭 맞잡으며 나를 살뜰히 보살폈다.
그만큼 내가 돈가스를 좋아했다는 걸 둘은 잘 알고 있었다.
“누구야? 누가 내 동생 울렸어?”
그때 나에게 얻어맞은 아이의 형이 나타났다.
“나 햇님반이야. 감히 달님, 별님반들이 내 동생을 건드려?”
그 시절 유치원들은 나이에 따라 반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햇님반이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 남자아이의 형은 겁을 주려고 했던 건지 뒤에 같은 반 아이들을 여럿 데리고 우르르 나타났다.
“돈가스 괴물, 너 이제 큰일 났다! 우리 형이 얼마나 무서운데!”
나한테 거하게 얻어맞은 남자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형 뒤에 숨어서 내게 혀를 내밀어 보였다.
“아, 네가 말로만 듣던 돈가스 괴물이냐? 너 싸움 잘해? 그런데 이번에는 잘못 걸렸어. 내가 아주 매운맛으로 복수할 거야!”
“근데 햇님반 형아들 왜 이렇게 많이 왔어? 저 형아 무서워서 그런 거야?”
기세등등한 햇님반 아이더러 들으라는 듯이 지호가 내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네? 우리는 셋인데, 그쪽은 하나, 둘…….”
“열 명이잖아, 바보야. 빨리 세야지!”
손가락을 접어가며 수를 세는 박시우보다 내가 더 빨랐다.
“그래! 열 명. 셋보다 열이 더 많아!”
‘3’보다 ‘10’이 큰 숫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 자랑스러웠던 건지 박시우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며 큰소리를 쳤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이날 느낀 감정의 대부분은 증발해버렸지만 그 순간의 쪽팔림만은 아직도 선명해서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야, 너네 내가 만만하냐? 진짜로 때리기 전에 빨리 내 동생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누가 무릎을 꿇어?”
싸우는 건 나쁜 거라고, 절대 친구들과 싸우지 말라던 부모님과의 약속이 떠올라 꾹 참았다. 그때 박시우가 거들먹대던 햇님반 아이 하나를 밀쳐 넘어뜨렸다.
박시우의 눈은 방금 전과 달라져 있었다. 그건 좋지 않은 신호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에도 박시우는 한 번 화나기 시작하면 부모님도 못 말렸다.
“귀에 요구르트 박았어? 네 동생이 먼저 박돈돈 돈가스 못 먹게 했다잖아. 무릎은 네 동생이 꿇어야지.”
“달님반 주제에 우리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으름장을 놓는 햇님반 아이의 목소리가 두려움에 떨렸다.
“햇님반이 뭐 어쨌다고? 빨리 박돈돈한테 사과하라고.”
“오빠, 그만해. 엄마가 싸우지 말랬잖아.”
그 당시에도 여기서 더 나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햇님반의 멱살을 잡은 박시우의 팔을 붙잡아 말리고 나섰다.
“까불지 마!”
그때, 햇님반 아이가 박시우의 뺨에 주먹을 날렸다.
뚝―
겨우 붙잡고 있던 내 이성이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뭔데 박시우를 때려?”
그 아이의 동생을 팼던 것처럼 나는 분노의 박치기를 날려버렸다.
“악! 피……. 나 코에서 피 나!”
햇님반 녀석의 코에서는 쌍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난 유치원을 얼려버릴 정도의 스산한 눈빛으로 낮게 읊조렸다.
“다 덤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