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타따!
―이게 무슨 소리야?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납작코 찬장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며 비명을 지르는 걸 보면 부엌 쪽에 무슨 일이 난 것 같았다.
“아, 해순이가 저녁 준비한다더니 그릇을 깼나 봐.”
“수온앗! 나 너무 아팟! 손에서 피낫!”
‘해령, 이 똑똑한 녀석!’
난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 해령에게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나 해순이가 다친 것 같아서 가봐야겠다. 끊는다!”
덕분에 대화를 마칠 구실이 생긴 나는 황급히 통화를 끊었다.
“해순 씨, 목소리가 매력적이십니닷?”
기다렸다는 듯이 샤레니안이 본격적으로 해령을 놀리기 시작했다.
악착같이 웃음을 참은 탓에 그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한가하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저 위에서 뭔가 삿된 것이 난동을 피우고 있는 것 같은데.”
말하는 본새와 다르게 해령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섰다.
서서히 상황 파악이 되자 나는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가 사장이니까 누가 난동을 피워서 온천이 부서지면 수리도 내가 해야 할 것 아니야?
EX급 온천이니 수리비도 EX급일지도 모른다.
돈방석에 앉아보기도 전에 빚더미에 앉을 수는 없지.
생돈을 날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해령을 앞질러 달려 나갔다.
[‘황천길 직행열차 타게 생긴 온천 냉장고(S)’가 “똥손 형님, 살려주십시오!”라며 발악합니다.]
똥손이라는 말에 냉장고를 고이 보내줄까 하는 고민에 빠지긴 했지만.
그때, 거대하고 검은 숯덩어리가 부엌을 부수고 튀어나왔다.
“안 돼! 내 부엌 문짝이!”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는 절규할 틈도 없이 괴성을 내질렀다.
“타따! 완즈니 타따!”
[‘어째서인지 완전히 타버린 돈가스(S)’가 고온에 불타올라 분노를 표출합니다.]
완전히 탔다고? 갑자기? 그래서 울음소리가 저 꼴이 된 거야?
대체 돈가스를 어떻게 튀기면 몬스터가 되어버리는 거지?
의문을 가지던 나는 내 손을 내려다봤다.
가능……할지도?
독극물도 만드는데 몬스터라고 못 만들어낼까?
“어이! 탄 돈가스! 더 난동을 피우면 곤란해. 지금이라도 얌전하게 굴면 목숨만은 살려주도록 하지.”
“타따! 대따 타따!”
말이 통하지 않으면 각인을 발현해서라도 혼쭐을 내줄 생각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완전히 타버린 돈가스(S)’가 바삭한 주먹을 휘두릅니다.]
성질 급한 돈가스는 내게 탄내가 나는 주먹으로 선방을 날렸다.
젠장, 이래서 박시우가 항상 입버릇처럼 선방 필승이라고 말했던 거구나.
그대로 얼굴을 가격당하려는 찰나였다.
“뭘 대화로 풀려는 거야?”
해령이 물색 도포로 나를 감싸 안으며 부채를 펼쳐 바람을 일으켰다.
“타따! 시거따!”
[성좌의 부채가 ‘태초의 바람’을 일으킵니다.]
[스킬 ‘태초의 바람’의 효과로 ‘어째서인지 완전히 타버린 돈가스(S)’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돈가스 몬스터가 있던 자리에는 잿덩어리가 된 튀김 조각이 남아 있었다.
난 곧장 부엌으로 달려 들어갔다.
“베카! 괜찮아?”
내 예상대로 부엌에는 꼬맹이 베카가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두른 채 서 있었다.
“난 괜찮다.”
얼굴에 검은 재를 묻힌 베카가 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실패했다.”
베카가 복도에 덩그러니 놓인 잿더미를 돌아봤다.
“돈가스를 만들려고 했던 거야?”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베카가 시무룩해졌다.
“네가 돈가스를 좋아한다고 해서 만들어주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겠지만, 머릿수건을 한 채로 울상을 지은 베카는 너무 귀여웠다.
도토리를 잃어버려서 심통이 난 다람쥐 같잖아?
“난 베카가 나를 위해서 뭔가를 해주려고 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쁜데? 고마워, 베카.”
난 감사의 뜻으로 베카의 둥그런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큰 표정 변화가 없는 베카의 동그란 적안에 거센 파도가 일렁였다.
“그런데 그 앙증맞은 머릿수건이랑 앞치마는 어디서 난 거야? 돈가스는 뭘 보고 만든 거고?”
“약방 할아범에게 부탁했다. 손녀에게 먹일 음식이라면 위생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건 어르신 작품이었구나.
“레시피도 어르신이 준 거야?”
“그렇다.”
그렇다면 레시피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란 거군.
[‘겨우 위기를 모면한 온천 찬장(S)’이 살다 살다 지독한 똥손은 봤어도 요리를 괴물로 만드는 손은 처음 봤다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찬장, 놀란 건 알겠지만, 대놓고 말하는 건 너무 심하잖아. 듣는 사람은 상처받는다고!”
오늘도 거침없이 쓴소리를 내뱉는 찬장에게 베카를 대신해 한소리를 했다.
[‘탑의 주인’이 스산한 기운을 뿜어냅니다.]
[‘겨우 위기를 모면한 온천 찬장(S)’이 ‘채팅을 금지당한 찬장(S)’으로 변경됩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내가 너 말 심하게 할 때부터 알아봤어! 오죽하면 시스템창이 채금(채팅 금지)을 걸겠냐?”
날 똥손이라고 놀리던 찬장에게 채금에 걸린 것이 고소했던 나는 이때다 싶어 신나게 약을 올렸다.
“이번에 온천에 새로 들어왔다는 손님이 이 녀석인가?”
해령이 부엌 안으로 들어오며 부서진 문을 향해 부채를 흔들었다.
[성좌의 부채가 ‘태초의 바람’을 일으킵니다.]
[스킬 ‘태초의 바람’의 효과로 ‘부서진 문짝(S)’이 본연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부채질 한 번에 처참했던 문이 새것으로 돌아왔다.
태초의 바람을 저렇게 쓸 수도 있는 거였어?
그 말은, 내가 미리 태초의 바람을 배워뒀더라면 던전 브레이크에 빠져서 개고생하지 않아도 됐다는 거네?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일.
되돌릴 수 없는 과거는 더 이상 곱씹지 않기로 했다.
후회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맞아, 내가 데려온 손님이고 이름은 베카야. 귀엽지?”
난 베카의 삐뚤어진 머릿수건을 다정하게 고쳐 매줬다.
“세상에 5000살도 넘은 마왕을 귀엽다고 하는 건 너뿐일 거다. 겉모습에 넘어가서 경계를 풀었다가는 화를 입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해령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와 베카를 지켜봤다.
그러고 보니까 지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지.
궁금하면 직접 베카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진짜 5000살이냐고.
“베카, 있잖아.”
“여기 있어.”
“응?”
질문하려는데 내게로 베카가 자신의 얼굴을 가져왔다.
“내 볼이 만져보고 싶었다면서.”
지난번에는 진하게 사랑해주겠다고 약속한 게 있어서 이마에 뽀뽀를 남발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볼이니까 다시 허락을 받는 게 좋겠지?
“만져봐도 돼?”
베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실례할게.”
질문하려던 것도 잊은 채 나는 홀린 듯이 베카의 볼로 손을 가져갔다.
“볼이 통통하고 말랑한 게 마시멜로 같아! 너무 귀여워!”
“아주 단단히 빠졌군.”
상황을 둘러보러 온 샤레니안이 실없이 웃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해령 쪽으로 곁눈질했다.
“너무 날을 세우지 말고 일단은 지켜보는 게 어때? 저 아이에게 해를 끼칠 생각으로 붙어 있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누가 신경이나 쓴대?”
“솔직하지 못하긴.”
샤레니안이 못 말린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 베카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지? 누나랑 돈가스 먹으러 갈까?”
내가 손을 건네자 베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고 단풍잎 같은 손으로 나를 잡고 부엌을 나섰다.
[‘탑의 주인’이 고개를 돌려 해령에게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저 삿된 것이…….”
해령이 이를 바드득 갈았지만, 나는 베카와 돈가스를 먹을 생각에 푹 빠져 아무래도 좋다는 듯 흘러 넘겨버렸다.
* * *
“넌 2층에 있는 방에서 자면 된다. 약방 바로 옆이라 여러모로 안전할 거다.”
돈가스로 배를 채운 뒤, 베카는 내가 지낼 방과 당장 입을 옷가지를 내어줬다.
“나도 같이 자겠다.”
베카가 나와 같은 방에서 자겠다고 하는 걸 약방 어르신이 잡아채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한바탕 소란을 치른 뒤, 나는 한동안 머무르게 될 2층 방으로 올라갔다.
생각보다 아담한 크기의 방이었지만, 나 혼자 지내기에는 넉넉한 크기였다.
“종일 정신없이 움직였더니 온몸이 뻐근해 죽겠네.”
이럴 때는 뜨끈한 물에 몸을 푹 담그면 피로가 쫙 풀릴 텐데.
……고민은 온천에 들어가는 걸 늦출 뿐!
“당장 온천에 가자!”
온천 사장이 된 지 며칠이 지났는데 그사이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바람에 정작 온천에 들어가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난 재빠르게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온천으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가 아니잖아?
어떤 문을 열어야 하지……?
방으로 돌아오기 전, 각자 지정된 방으로 돌아가는 성좌들을 떠올렸다.
시간도 늦었고 다들 자러 간 것 같으니까 아무도 없겠지.
난 야심한 시각에 제일 사람이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저승탕’을 선택했다.
문을 열자 온천의 김이 서린 건지 탕 안이 온통 연기로 자욱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피곤이 몰려왔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탕 안에 몸을 담갔다.
“아, 따뜻해.”
뭔가 달콤한 향도 나는 것 같고.
EX급 온천에선 향기라도 나는 건가?
“하아…… 너무 좋다.”
온몸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기분에 기분 좋은 탄성을 내뱉는 순간이었다.
자욱한 연기 너머로 장성한 남자의 실루엣이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