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불쾌하네욧!
[퀘스트 ‘온천표 쑥 라테 만들어서 대접하기’를 완료했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100만 골드를 획득합니다.]
녀석, 결국 해줄 거면서 버티기는.
거기다 100만 골드라니 달달하죠?
“역시 패기 하나만큼은 소드 마스터 감이라니까? 그대, 기사가 되어볼 생각은 없나?”
시스템창에 쑥 라테를 욱여넣는 것으로 퀘스트를 달성한 내게 샤레니안이 큰 소리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아주 제대로 키워줄 수 있는데.”
난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 샤레니안의 손을 단호하게 쳐냈다.
“됐거든. 온천 사장 하나만으로도 기 빨려.”
[추가 보상으로 ‘특제 바나나 우유’를 획득합니다.]
“내가 퀘스트 깨려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 추가 보상이 고작 바나나 우유 한 개야?”
나는 내 손에 들린 바나나 우유를 허탈하게 바라봤다.
‘뭐, 안 그래도 목이 타던 참이었으니까 완전 쓸모가 없는 건 아니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시스템창이 주는 건 함부로 받아먹으면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에이, 평범한 바나나 우유인데 별일이야 있겠어?’
무엇보다 퀘스트에 온 힘을 쏟아붓고 격하게 허기가 진 상태여서 운수의 경고 따위 들리지 않았다.
어릴 때 목욕탕에서 때 밀고 먹는 바나나 우유는 국룰이었지.
지금은 박시우랑 지호가 유명해지는 바람에 목욕탕에 가기 힘들어졌지만.
오랜만에 바나나 우유를 보니 옛 추억에 잠겼다.
난 아무 거리낌 없이 입구를 뜯어 한 번에 시원하게 들이켰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특제 바나나 우유’를 섭취합니다.]
[‘특제 바나나 우유’의 효과로 체력이 10 상승합니다. 체력 (35/45)]
오! 체력이 10이나 상승했잖아?
마시기만 했는데 체력 상승이라니, 추가 보상이 바나나 우유만큼이나 달콤했다.
[!!박수온 : 아니, 이 맛은?!!]
[!!박수온이 ‘특제 바나나 우유’의 깊은 맛에 감동하며 레시피를 떠올립니다!!]
내가 언제?
바나나 우유가 달콤하다고는 생각했어도 감동 받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시스템창이 제멋대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특제 바나나 우유 레시피’를 획득합니다.]
레시피 싫다고! 나 이제 레시피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내 만류에도 시스템창은 보복이라도 하듯이 연이어 창을 띄웠다.
[새로운 레시피 획득으로 퀘스트가 열립니다.]
또 퀘스트라고? 설마…….
[특제 바나나 우유 만들기]
[레시피로 특제 바나나 우유 만들기 (0/1)]
[보상 : 150만 골드]
“아악! 안 돼! 차라리 쑥을 150만 개 캐라고 해!”
퀘스트창을 확인한 난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내질렀다.
안 돼애!
겨우 쑥 라테 퀘스트를 달성했더니…… 이제는 바나나 우유를 만들라고?
아악……! 레시피 주지 말라고!
심지어 더 이상 협박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온천표’가 ‘특제’로 바뀌어 있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러게 아무거나 받아먹지 말라니까”라며 한탄합니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지?
나는 싸늘한 미소를 띤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똥손으로 독극물을 만드느니 차라리 시스템창을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시스템창으로 달려들려는 나를 샤레니안이 붙들어 말렸다.
“진정해!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시스템창을 상대하는 건 무리야. 괜히 보복만 당할라.”
“쑥 라테도 못 만들었는데 내가 무슨 수로 바나나 우유를 만드냐고!”
바나나 우유는 편의점에서 저절로 자라나는 줄 알았단 말이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영혼이 빠진 사람처럼 테이블에 납작 엎드려 누웠다.
그때 누군가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렇게 퍼질러 있지 말고, 일단 먹고 생각하도록 해.”
잠깐, 이 냄새는?
익숙한 냄새에 나는 홀리듯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온천표 돈가스를 들고 있는 해령이 서 있었다.
“돈가스다!”
“박수온 너 방금까지 시체처럼 늘어져 있지 않았어? 돈가스라니까 벌떡 일어나네.”
샤레니안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날 지켜봤다.
그사이 해령은 내 앞에 돈가스를 놓아줬다.
“이거 나 먹으라고 가져온 거야?”
“체력이 바닥나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성가시니까.”
돈가스를 보며 군침을 삼키는 내게 해령이 무심하게 답했다.
“내 거는?”
이 모습을 지켜보던 샤레니안이 해령에게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
“넌 굶을 필요가 있다. 24시간 체력이 흘러넘쳐서 문제니까.”
“냉정하네. 하긴 내가 봐도 주인의 체력에는 문제가 있어. 약해도 너무 약하잖아. 아침마다 체력 단련이라도 할 거 아니면 많이 먹는 수밖에.”
샤레니안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젓가락으로 돈가스를 집어 내 입으로 가져왔다.
나는 망설임도 없이 한입에 돈가스를 받아먹었다.
“역시 이 맛이지!”
입안에서 살살 녹잖아.
“내가 이 손을 가졌어야 했는데!”
해령의 손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가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각인 발현하고 요리하면 나도 이 손을 가질 수 있으려나?”
뭐든 잘 만들어내는 손이 탐났던 나는 해령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 손이 내 손이었어야 했는데!
바꾸자고 할 수도 없고.
욕망에 들끓고 있는 내 앞으로 샤레니안이 자연스럽게 해령의 손을 밀어내고 들어왔다.
“난 어때? 내 것도 꽤 쓸 만한데.”
글쎄, 샤레니안의 손이라면…….
“손힘으로 바나나 즙 내는 건 가능할지도?”
하지만 그 외에는 나와 다를 게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똥손에겐 똥손을 알아보는 촉이 있달까?
나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샤레니안의 손을 슬그머니 밀어냈다.
그때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발신인은 지호였다.
그러고 보니까 전화하기로 했었지?
아무래도 소식이 없는 내가 걱정된 모양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성좌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각자 알겠다는 표시를 했다.
“여보세요?”
―누나! 친구 집에는 잘 도착했어?
“응, 난 잘 도착했지.”
―친구 집에 있다고 해놓고 혼자 있는 거 아니야?
“아니야, 지금 해순이랑 같이 있어.”
샤레니안이 해순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저항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누나 친구, 여자라고 하지 않았어? 방금 남자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재빨리 샤레니안에게 매서운 눈빛을 보내자, 그가 본인의 입을 조용히 틀어막았다.
“아니야. 해순이가 좀 호탕하게 웃는 스타일이라서 그래.”
―누나, 혹시 남자랑 있어?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해?”
우리 집안 남자들은 왜 이렇게 촉이 좋은 거야?
아무렇지 않게 답하긴 했지만, 솔직히 당황했다.
―그럼 해순이 누나 좀 바꿔봐.
“좋아! 못할 건 없지!”
난 해령에게 전화를 넘겼다.
졸지에 짐을 떠안게 된 그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수온 누나 동생, 박지호라고 합니다. 누나가 신세를 많이 지고 있어요.
지호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왔다.
‘대충 연기 좀 해줘. 해순이랑 같이 있다고 했는데 거짓말인 거 들키면 일이 여러모로 복잡해져.’
난 두 손을 모으며 간절한 표정으로 해령을 바라봤다.
그가 눈썹을 일그러뜨리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니에욧!”
해령이 콧소리를 내며 목을 쥐어 짜내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샤레니안이 소리 없이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해순이 누나는 목소리가 허스키하신 편이시네요?
목소리를 듣자 지호가 해령의 정체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들통이 나는 건가?
가슴을 졸이고 있는데 잔뜩 흥분한 해령의 콧소리가 이어졌다.
“어머, 지금 제 목소리가 남자 같다는 거예욧? 아무리 친구 동생이라지만 불쾌하네욧! 안 그래도 목소리가 콤플렉스라 고민인뎃!”
대체 끝에 시옷 받침은 왜 넣는 거야?
결국에는 나까지 웃음을 참다가 쓰러지기 직전인 상태가 되어버렸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매력적이라는 뜻이었어요.
해령의 굵직한 한 방에 지호의 의심을 피한 것은 물론, 응접실 안의 모두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널브러져 바닥을 떼굴떼굴 굴렀다.
―다시 한 번 누나를 잘 부탁드립니다.
“알았어욧!”
해령의 새침한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내가 전화를 넘겨받았다.
애써 웃음을 삼킨 나는 태연하게 통화를 이어갔다.
“너 때문에 우리 해순이 기분 상했잖아. 어쩔 거야?”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줘……. 다음에는 정식으로 사과드려야겠다.
지호의 반응을 보니 해순이 진짜 여자라고 믿는 것 같았다.
휴, 일단 위기는 넘겼다.
“됐어. 해순이는 내가 알아서 할게. 그보다 46층 뚫는 건 어떻게 됐어? 클리어 했어?”
―아니, 완전 죽사발 났지. S급 랭커 일곱이 들어가도 못 깨는 걸 온천 사장은 대체 어떻게 솔플로 뚫은 건지……. 다들 완전 멘붕 상태야.
당연히 못 깼겠지.
나도 베카랑 제대로 붙었다면 지금쯤 세상에 없었을 테니까.
“다친 데는 없고?”
―솔직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서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베카가 죽기 직전에 자신의 물음에 답하면 살려주겠다고 하더라고.
베카가 내 부탁을 들어주긴 한 모양이었다.
“뭘 물어봤는데?”
―시우 형한테 여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어봤어.
베카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 물어봤다고?
“박시우는 뭐라고 답했는데?”
―돈가스.
지호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2층에서 무언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났다.
[‘죽을 위기에 처한 납작코 찬장(S)’이 비명을 내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