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에러 발생!)
얘들아, 그래도 조금은 망설여주는 게 예의 아니니?
“아직 말도 다 안 끝났는데.”
[‘콧대 높은 온천 찬장(S)’이 ‘납작코 온천 찬장(S)’으로 명칭을 변경합니다.]
[‘납작코 온천 찬장(S)’이 잘못했으니까 제발 여기서 요리하겠다는 말만은 하지 말라며 사정합니다.]
내가 요리하는 게 콧대 높은 찬장이 납작코가 되어서 사정할 정도의 일이라고?
[‘텃세 부리는 온천 냉장고(S)’가 ‘굴복한 온천 냉장고(S)’로 명칭을 변경합니다.]
“그래도 간단한 요리는 괜찮지 않을까?”
[‘굴복한 온천 냉장고(S)’가 “대가리 박을까요? 형님?”이라고 물어옵니다.]
냉장고가 대가리 박으면 큰일이 나지.
안에 내용물이 난장판이 될 텐데.
난 쑥 라테를 만들 우유를 지켜야만 했다.
“알았다고! 안 해! 어차피 오늘은 우유만 데워서 나갈 생각이었어.”
[‘굴복한 온천 냉장고(S)’가 “여기 있습니다, 형님!”이라며 손수 우유가 있는 칸을 열어줍니다.]
“그래. 고맙다. 이제 보니까 예의가 바른 친구들이었네. 하마터면 오해할 뻔했어.”
[‘굴복한 온천 냉장고(S)’가 “과찬이십니다”라며 손을 비비며 굽신거립니다.]
난 우유를 꺼내 주전자에 부은 뒤, 인덕션에 올려 데웠다.
“이제 쑥 가루만 꺼내면 되겠네.”
[‘굴복한 온천 냉장고(S)’가 “아그야, 뭐하냐? 형님이 기다리시지 않냐?”라며 찬장에게 눈치를 줍니다.]
[‘납작코 온천 찬장(S)’이 “행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기 말씀하신 가루 가져왔습니다”라며 은밀하게 문을 엽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꼭 위험한 가루 같잖아…….
열린 문 사이로 쑥 가루가 담긴 통이 보였다.
“빨리 꺼내 갈 테니까 조금만 참아.”
나는 재빠르게 쑥 가루 통을 꺼내 품에 안았다.
[‘납작코 온천 찬장(S)’이 거친 숨을 몰아쉽니다.]
나는 소리를 내며 힘차게 끓는 주전자를 돌아봤다.
쑥 가루도 구했고 우유도 적당히 끓은 것 같으니까 슬슬 가볼까?
“둘 다 고생했어! 다음에 보자!”
[‘납작코 온천 찬장(S)’이 “들어가십쇼, 행님”이라며 90도로 인사합니다.]
[‘굴복한 온천 냉장고(S)’가 “수고하셨습니다, 형님”이라고 거듭니다.]
우유가 든 주전자까지 챙겨 든 나는 그들을 향해 인사를 전하고 부엌을 빠져나왔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 온천에는 참 별난 것들이 많아.
온천의 특별함에 새삼 감탄하고 있는 그때, 시스템창이 눈에 들어왔다.
[페널티 적용까지 남은 시간 : 17분 13초]
아차, 부엌에서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어!
난 서둘러 2층에서 내려와 응접실로 달려 들어갔다.
“우와! 쑥 라테다! 쑥 라테! 좋아!”
잔과 재료를 챙겨 자리에 앉는 나를 본 샤레니안은 쑥 라테를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할 수 있다. 박수온.
레시피를 보면서 차근차근 만드는 거야.
숨을 가다듬은 난 레시피를 켰다.
[온천표 쑥 라테 레시피]
[재료 : 쑥 가루 10g, 뜨거운 우유 170ml, 설탕 1스푼]
[쑥 가루(10g)에 설탕 1스푼과 우유(170ml)를 넣는다.]
그런데 쑥 가루 10g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지?
누군가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질문이 많아지면 샤레니안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달아날 것만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먹을 사람이 없으면 퀘스트는 어차피 실패나 다름이 없었다.
지난번 경험을 참고로 해서 만들어보자.
전에는 쑥 가루를 너무 많이 넣었던 게 문제 같으니까 이번에는 적게 넣는 거야.
난 쑥 가루 통을 들어 잔에 비스듬히 기울였다.
“먼저 쑥 가루를 적당히 넣고…… 악!”
조금만 넣으려고 했는데 덩어리진 쑥 가루가 통째로 굴러 들어가버렸다.
“주인, 왜 그래? 뭔가 잘못됐나?”
응접실에 울려 퍼지던 샤레니안의 콧노래가 멎었다.
“아니? 잘못되긴. 여긴 아무 일도 없으니까 걱정 마!”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답했지만 이마에선 진땀이 흘렀다.
“쑥 가루가 컵의 3분의 2인 것 같은데. 너무 많지 않은가?”
샤레니안이 합리적인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덜어낼까 잠시 고민됐지만, 이미 한 말을 번복하면 자칫 신용을 잃을 수 있었다.
“네가 라테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넉넉하게 해가지고 많이 먹게 해주려고 그랬지.”
“그랬군, 어쩐지 양이 많다고 했어! 맛있는 건 많을수록 좋지.”
기분 좋은 말로 둘러대자 샤레니안은 금세 미소를 되찾았다.
지금부터라도 잘하자! 그럼 어떻게든 수습되겠지.
나는 능숙해 보이는 손놀림으로 설탕 한 스푼을 넣었다.
그게 정말 한 스푼 용량이었는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쑥 가루를 많이 넣었으니까 우유도 많이 넣으면 대충 비율이 맞지 않을까?
생각을 마친 난 주전자를 들어 과감하게 우유를 들이부었다.
“주인, 넘쳐!”
턱을 괸 채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샤레니안이 주전자를 기울인 내 손을 붙잡아 멈추게 했다.
많이 놀랐는지 그의 두 눈이 평소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오른쪽 눈 아래에 있는 눈물점에 잠시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황급히 잔을 내려다봤다.
천만다행히도 샤레니안이 재빨리 막은 덕분에 라테가 넘치는 사고는 막을 수 있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그대는 손목이 너무 약해.”
샤레니안이 커다란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에 내 손목이 한 번에 잡혔다.
“이것 봐. 한 줌에 손목이 다 잡히잖아. 이러니까 주전자 드는 것도 힘들지. 이 상태로는 불사검을 드는 건 턱도 없어.”
샤레니안이 진심으로 내가 걱정스럽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걱정하지 마, 샤레니안. 핑계를 대지 않아도 알아서 오해해줘서 고맙긴 한데, 아무리 저질 체력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나라도 주전자를 못 들 정도는 아니야.
우유가 조금 더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색이긴 한데, 그래도 어느 정도 수습이 된 건지 지난번처럼 슬라임을 잡아와서 즙을 짠 것 같지는 않았다.
“다 된 거야?”
샤레니안이 기대감에 빛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꼭 간식을 기다리는 대형견 같았다.
“응.”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이번에는 괜찮으려나?
겉보기엔 전보다 나아 보이는데 해령이 만들어준 쑥 라테보다는 색이 진했다.
그래, 레시피에도 오차 범위라는 게 존재하니까.
의외로 맛있을지도 모르잖아?
“자, 그럼 마셔볼까?”
덥석―
잔을 들어 올리는 샤레니안을 보고 있자니 본능적으로 손이 나갔다.
내게 손목이 붙잡힌 그가 영문을 모른 채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혹시라도 맛이 별로 같다 싶으면 바로 내려놔.”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화장실을 들락거리게 될지도 몰라.
나는 입맛을 다시며 뒷말을 삼켰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주인이 날 생각해서 만들어준 건데 남기는 건 예의가 아니지. 나 맹독에도 단련되어 있는 몸이라 웬만한 것에는 끄덕하지도 않는다고?”
샤레니안이 호기롭게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폭포수처럼 잔에 라테를 도로 쏟아내버렸다.
이것이 바로 질량 보존의 법칙……?
샤레니안은 연신 기침을 해댈 뿐이었다. 언제는 웬만한 독에도 멀쩡하다면서? 잔은 왜 은근슬쩍 한쪽으로 밀어버리는 건데?
[!!온천표 쑥 라테 만들기!!]
[온천표 쑥 라테 만들어서 대접하기 (0/1)]
[보상 : 100만 골드 / 추가 보상 :???]
[!!경고!! 근무 태만으로 실패 시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퀘스트 숫자가 바뀌지 않은 걸 봐선 이번에도 실패인 것 같았다.
“주인, 진지하게 제안하는 건데 온천 사장이 아니라 독극물 제조업자로 일해보는 게 어때? 이거 딱 암살하기에 좋을 것 같은데.”
“네 말을 들어보니까 진짜 한번 해볼까 싶기도 하네. 암살.”
내게 독극물 제조업자를 제안하는 샤레니안을 향해 친절하게 웃어 보이니 그가 움찔하며 슬쩍 내 눈을 피했다.
“농……담이지.”
“기다려봐. 이번에는 제대로 만들어줄 테니까.”
“그걸 또 먹으라고?”
“지금 건 당연히 장난이었지. 네 말대로 쑥 라테의 맛이 아니었잖아.”
난 샤레니안이 달아나기 전에 쑥 라테 한 잔을 뚝딱 만들어냈다.
이번에는 쑥 가루를 과하게 많이 넣거나 우유를 넘치게 붓는 실수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모양도 그럴듯해 보였다.
“자, 이게 진짜야.”
난 샤레니안의 앞으로 새로운 실험용 쑥 라테를 내밀었다.
“어쩐지 쑥 라테가 그런 맛이 날 수가 없는데. 진짜 암살당하는 줄 알았잖아. 이번 건 진짜로 잘 먹겠습니다!”
순진한 샤레니안은 내 말을 믿고 다시 쑥 라테를 들이켰다.
나는 그의 목 넘김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쑥 라테를 한 모금 들이켠 샤레니안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했다.
괜찮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던 샤레니안이 잠시 뒤 배를 움켜쥐더니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야! 이제 그만…… 살려줘! 항복!”
‘이번에도 실패인가?’
곤란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단 5분.
이 시간 안에 내가 온천표 쑥 라테를 제대로 만들고 누군가에게 먹이기까지 할 수 있을까?
좌절하던 내 머릿속으로 번뜩 스친 생각이 있었다.
“어이, 시스템창! ‘온천표 쑥 라테’라는 건 전 온천 사장이 만든 쑥 라테라는 뜻 아니야?”
[시스템창이 맞다고 합니다.]
항상 내 행보를 전체 헌터창에 띄우는 걸 보고 지금도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는데, 운 좋게도 내 물음에 시스템창이 빠르게 대답했다.
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지금 온천 사장은 나잖아. 그럼 내가 만든 게 온천표 쑥 라테 아니야?”
[시스템창이 당황하며 아무리 그래도 보통 수준은 되어야 미션을 완료시켜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구나. 네 뜻이 그렇다면 당연히 따라야지.”
순순히 시스템창의 말에 응하는 날 샤레니안이 섬짓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주, 주인……?”
“하지만 네가 말하는 ‘보통’이라는 건 네 기준이니까 직접 먹어봐야겠네. 그렇지?”
난 테이블에 놓인 쑥 라테를 집어 들었다.
“자, 입 벌려. 쑥 라테 들어간다.”
시스템창으로 라테를 밀어 넣으려는 순간.
[시스템▣▣▣ 창 ▓▓▓▓ 에러 발생!]
[!!온천표 쑥 라테 만들기!!]
띠링!
[온천표 쑥 라테 만들어서 대접하기 (1/1)]
퀘스트를 달성했다.